# 58
17. 마왕 무르무르(5)
그리폰이 추락한 무르무르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상전.
무르무르가 자존심을 접으면서도 그렇게 피하고 싶어 했던 상황이었다.
반대로 세은으로서는 꼭 원하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무르무르가 태연한 안색으로 흑수정 지팡이로 다시 땅을 찍었다.
쿵.
동시에 또다시 수많은 언데드가 무르무르의 부름에 따라 육신을 일으켰다.
“턴 언데드.”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세은의 간단한 신성 마법에 의해 대부분의 언데드가 스러졌다.
하지만 무르무르가 노린 것은 따로 있었다.
“꾸우우……”
그 잠깐의 사이에 그리폰의 날개가 무르무르의 마기에 의해 치료되었다.
날개에 난 구멍이 메워지며 그리폰의 울음소리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
파앙―
세은이 빛의 화살을 날려 무르무르가 다시 그리폰에 타는 것을 견제했다.
하지만 세은의 예상과는 달리 무르무르는 그리폰에 올라타지 않았다.
퍼덕퍼덕―
오히려 그리폰은 무르무르를 두고 혼자서 고공으로 날아올랐다.
“짐의 생각이 바뀌었다.”
무르무르가 붉은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너무 정직하게 그대와 싸우려고 했던 것 같군.”
“꾸에엑!”
동시에 그리폰의 괴성이 들렸다.
“으아아!”
“막아!”
그리폰은 독자적으로 각성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대가 두 명이서 나를 잡으려 한다면 이쪽은 시선을 분산시켜야지.”
“여기도 있다!”
“언데드도 막아!”
그리폰이 날뛰자 리치를 상대하던 로이스의 손속이 어지러워졌다.
그 틈을 타 리치가 다시 한 번 흑마법을 이용해 언데드들을 소환했다.
“아니나 다를까, 더러운 짓은 여전하네.”
“허어. 싸움의 승패에 비겁함이 어디 있는지. 승리가 정의다.”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는 거 같은데 말이야.”
세은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던 무르무르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너를 죽이면 모든 게 끝이야.”
“설마 짐이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글쎄다. 답이 있었다면 여태까지 이렇게 공중으로 도망 다니지도 않았겠지.”
“무엄하도다. 짐의 위대함을 오늘 느끼게 해주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은이 무르무르에게 돌진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세은을 보자 무르무르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흑마법을 발동했다.
쿠릉―
순식간에 솟아오른 뼈의 벽이 세은의 돌진을 방해했다.
그리고 바로 소환된 언데드들.
“일어나라! 짐의 신하들이여!”
콰지직―
세은의 검의 뼈의 벽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무르무르의 친위대가 소환되었다.
매우 아슬아슬한 타이밍.
세은은 또다시 신성 마법을 발동했다.
“에일린. 턴 언데드.”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팡!
절묘하게 방해하던 무르무르의 흑마법.
중간에서 부딪혀 마법들이 가볍게 터져 나갔다.
이어서 줄줄이 전열을 가다듬은 언데드들이 세은에게 달려들었다.
“폐하를 위해!”
“신의 개를 잡아라!”
서걱―
그러나 세은의 빛의 검이 그런 언데드들을 가볍게 베어내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사이 무르무르 또한 자신의 지팡이를 땅에 박아 마법진을 그린 것이었다.
“영이여! 나 이제 위대한 권세를 가진 아래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하노라.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어라. 나 무르무르의 이름으로, 그대가 원하는 것을 주겠노라!”
화악―
영창이 끝남과 동시에 마법진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언데드들을 처리하던 세은이 시선을 돌려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귀찮게 진짜.”
이미 전에도 무르무르를 상대한 적이 있던 세은은 마법진에서 소환되는 것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보았다.
“오랜만입니다, 무르무르.”
“루키푸게, 잘 지냈는가.”
무르무르의 마법에 의해 소환된 악마재상 루키푸게 로포칼레는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한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무슨 일로 불렀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군요.”
“허어. 이럴 때 불러서 미안하군.”
“낄낄. 저는 재수 없어야, 역소환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잘 부탁한다.”
“저야말로. 계약의 대가는 제가 챙겨가겠습니다.”
“좋을 대로.”
“에일린. 홀리 파이어.”
콰앙―
대화를 나누는 무르무르와 루키푸게의 사이로 세은이 날린 홀리 파이어가 날아들었다.
공격을 피한 루키푸게가 낄낄거리는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세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시렌 공!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만나니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굳이 안 만나도 되는데.”
“낄낄. 대가를 받은 이상 만날 수밖에요. 그러니 공께서 저를 고용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필요도 없는데 고용할 필요가 있나?”
“하긴, 공은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루키푸게가 세은과 거리를 두면서 주머니에서 씨앗을 꺼내 땅으로 던졌다.
쉬익―
“자라라. 나의 시종들이여!”
씨앗이 급속도로 발아하더니 사람의 키에 육박하는 크기로 자라났다.
동시에 무르무르가 또다시 언데드들을 소환했다.
“일어나라. 짐의 신하들이여!”
“어지간히 좀 하지 그래?”
시간벌이에 지나지 않는 행위를 무르무르와 루키푸게가 계속하자 짜증이 치민 세은이 말했다.
그러나 둘은 세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부하들을 소환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물량으로 밀어붙이면서 빈틈을 노리겠단 의도가 매우 뚜렷하게 보였다.
루키푸게의 식물은 언데드와 달라서 턴 언데드로 뭉뚱그려서 처리할 수가 없었다.
‘케인은?’
세은은 결국 보조를 맡기기 위해 케인을 찾았다.
그러나 케인 역시 로이스와 함께 그리폰과 리치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네.”
세은은 결국 귀찮고 번거롭지만 혼자서 둘을 상대해야 했다.
“에일린. 홀리 레인.”
가장 광범위한 마법이 세은의 손에서 펼쳐졌다.
동시에 세은이 몸을 날려 언데드와 식물 사이로 뛰어들었다.
“홀리 노바!”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원이 순식간에 주변을 정리했다.
“크아!”
그러나 개중에도 뛰어난 언데드 몇 구가 하늘로 뛰어올라 노바를 피해내고 세은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하지만 그런 그들의 공격은 세은의 휘두른 빛의 검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때 무르무르의 흑마법이 세은에게 날아들었다.
“심연의 불꽃!”
루키푸게 역시 늑대로 변신해 무르무르의 공격에 호응했다.
퍼엉―
“컹!”
무르무르의 공격은 막혔지만, 루키푸게가 빠르게 세은의 뒤를 점하고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세은의 하얀 목덜미를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아오! 진짜!”
스악―
세은은 검을 휘둘러 루키푸게를 단숨에 끝장내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세은이 루키푸게에게 집중한 그 짧은 순간에도 무르무르의 언데드와, 루키푸게의 식물 소환수들이 세은에게로 달려들었다.
덕분에 루키푸게와 세은은 서로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전반적인 전황은 단연코 세은에게 유리했다.
이 대 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세은이 천천히 무르무르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에도 시민과 각성자들이 피해를 입는 만큼 언데드가 늘어나고 있었다.
‘어쩔 수 없겠어…….’
어차피 이런 식으로 천천히 잡는다고 해도 피해가 누적될 건 자명했다.
결국 세은은 도시에 피해 없이 무르무르를 잡는단 계획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루키푸게의 존재가 세은이 계획을 수정하는 데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미리 죽었다고 생각해라.”
세은이 시동어를 외웠다.
그의 손에서 신성력이 여태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 저건!”
같은 마법에 당한 적이 있던 무르무르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루키푸게, 막아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무르무르와 루키푸게는 모든 소환수들을 세은에게로 돌진시켰다.
콰과과과―
그러나 세은의 몸에서 신성력이 쏟아져 나와, 반경 2미터의 모든 언데드와 식물 소환수들을 소멸시켰다.
펑― 퍼엉―
무르무르의 흑마법이 세은의 몸에 작렬했다.
어느새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루키푸게도 가죽 주머니에서 흑마석을 꺼내 빠르게 집어 던졌다.
하지만 그 어떤 시도로도 세은의 마법을 막을 수가 없었다.
쿠구구구―
가까이에 있는 자동차와 도로가 신성력의 회오리에 휘말려 파괴되기 시작했다.
신성력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다가 어느 순간 확장을 멈췄다.
그리고.
“에일린. 신의 심판.”
단탈리안을 죽일 때 사용했던 신성 마법이 다시 한 번 세은의 손에서 발동되었다.
도심에서 사용하기엔 범위 조절이 어려운 신성 마법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세은의 캐스팅이 끝나고, 신성력의 배치가 마무리되자 태양에서 빛의 내려와 세은의 손에서 형태를 이루었다.
이윽고 세은의 손에 붉은 빛의 검의 쥐어졌다.
“천벌.”
세은이 검을 가볍게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 행동의 결과는 매우 참혹했다.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치며 순식간에 무르무르의 언데드 군단과 루키푸게의 식물 소환수들의 씨를 말렸다.
“크으. 젠장!”
무르무르가 녹아내리는 자신의 군단을 보며 침음했다.
“짐의 모든 신하들이여! 이곳으로 집결해라!”
결국 무르무르는 도시를 파괴해서 군세와 사기를 늘리던 걸 포기했다.
대신 모든 부하들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 모았다.
세은이 신의 심판을 사용한 이상, 더 이상의 여유는 없었다.
무르무르의 명령에 우선 바로 옆에 있던 리치와 그리폰이 무르무르에게로 달려왔다.
“어디를?”
세은이 손에 든 심판을 휘둘러 리치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그러나 그사이에 루키푸게와 무르무르의 공격이 다시 세은에게 박혀들었다.
“죽어라!”
전력을 다한 마왕의 공격과 악마재상 루키푸게의 공격은 신의 심판을 발동한 세은으로서도 쉬이볼 만한 게 아니었다.
콰앙!
공격을 막아냈지만 마기와 상충되는 신성력의 소모가 심했다.
심의 심판은 그 막대한 파괴력만큼, 신성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한 마법.
이런 식으로 소모적인 교전을 해봐야 세은에게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세은은 도시가 얼마 정도 피해를 입을 것을 각오했다.
그리고 무르무르와 루시푸게를 한 번에 소멸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단죄.”
세은이 불의 검을 휘둘러 주변의 공간을 화염으로 점유해 나가기 시작했다.
“루시푸게! 피해라!”
무르무르가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빠르게 도망가며 소리쳤다.
뿐만 아니라 어느새 무르무르의 명령을 듣고 날아온 언데드들이 부나방처럼 세은에게 달려들었다.
루시푸게 역시 온 힘을 다해 도주를 시도했다.
화르르륵―
그러나 세은은 더욱 신성력을 밀어넣어 반경 200미터를 신성의 화염으로 뒤덮어 버렸다.
“오 마이 갓…….”
그 모습을 지켜보던 케인은 자신도 모르고 탄성을 내뱉었다.
마치 순백으로 타오르는 불은 마치 도시를 정화하는 것 같았다.
다만 화염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빌딩의 절반이 부서지던 모습은 정화보다 소멸에 가까웠다.
* * *
후우우―
그렇게 30초 정도 타오른 화염이 사그라졌다.
“휘유…….”
“세은!”
그리고 케인의 눈에 텅 비어버린 공간에 오롯이 홀로 서 있던 세은이 보였다.
케인이 다급히 세은에게 달려갔다.
“괜찮은가?”
“아, 시끄러워.”
순식간에 너무 많은 신성력을 쏟아낸 세은이 살짝 어지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직 리치 두 마리가 남아 있었다.
세은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케인에게 말했다.
“헤이, 케인. 피니쉬. 오케이?”
“허허. 알겠네.”
가까이서 느껴지던 리치의 기운에 케인이 세은의 말을 알아들었다.
케인은 세은을 둔 채 로이스를 불러 리치를 처리하기 위해 이동했다.
세은은 혹시나 무르무르나 루시푸게가 남아 있을 경우를 대비해 신성력을 퍼트려 주변을 살폈다.
“……응?”
그런데 세은의 기감에 무언가 걸려들었다.
이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세은의 신성 마법 범위에 걸쳐 있던 무너진 빌딩의 아래였다.
고개를 들어 빌딩을 보니 완전히 무너져, 당장 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런!”
자신의 마법 때문에 빌딩의 잔해에 갇힌 것이 분명한 사람.
그를 구하기 위해 세은은 몸을 날렸다.
아무래도 정리는 다른 이에게 맡기고, 자신은 위급한 상황의 생존자들을 찾아내야 할 것 같았다.
타닥―
세은의 다급한 발소리가 도시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