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17. 마왕 무르무르(2)
“좋아. 한 놈 찾았다.”
잠시 흑마력을 탐지하던 세은의 기감에 가장 가까이 있던 리치 하나가 걸려들었다.
“찾았습니까?”
너무 빠른 세은의 탐지에 사노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타닥―
하지만 세은은 사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바로 리치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저기 있네.”
이내 세은의 시야에 흑마법을 이용해 언데드를 일으키고 있는 리치가 들어왔다.
“망자의 원혼이여. 일어나 나의 명을 들으라.”
콰앙―
언데드들이 일어나기 직전.
리치의 코앞에 강렬한 신성의 빛이 터지며 캐스팅을 취소시켰다.
“어이, 말을 하는 걸 보니 꽤 고위 리치인데?”
“고, 고위 사제?”
방금의 일격으로 세은이 지닌 신성력의 격을 느낀 리치가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하나만 물어보자. 누가 시켜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흥…….”
그러나 리치는 세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흑마법을 발동했다.
“일어나라. 사자의 영혼이여. 그대의 복수를 방해하는 가증스러운 자…….”
그러나 세은은 리치가 흑마법을 발동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바로 달려들어 지팡이를 붙잡았다.
콰악―
“컥?”
지팡이를 통해 전해지는 강렬한 신성력에 리치가 신음을 내뱉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대화 좀 하자니까.”
세은이 지팡이를 잡은 손으로 신성력을 더욱 불어넣으며 말했다.
“크으윽. 이 가증…… 스러운 신의 개 같으니. 우리의 복수를 방해…… 하지 마라.”
“미친놈이? 발을 뻗을 곳을 보고 뻗어야지. 이상한 곳에다 복수하겠다고 설치면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큭…… 인간은 모두 복수의……. 대상이다…….”
“아주 지랄은.”
세은은 더욱 힘을 줘서 리치의 지팡이를 아예 뺏어들었다.
“마지막 질문이야. 대답하면 깔끔하게 보내줄 테니까, 신중히 고민하는 게 좋을 거야.”
“농락하지 말고 죽여라!”
그러나 세은은 분개한 리치의 외침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질문을 던졌다.
“니들 셋이 전부야?”
“…….”
해골이라 표정 변화는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는 것으로 리치의 결의가 전해졌다.
세은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다시 한 번 리치에게 물었다.
“마지막 기회다. 니들 셋이 전부냐고.”
“흥.”
슈욱―
리치의 코웃음과 함께 세은의 발밑에서 흑마법으로 된 창이 튀어나왔다.
“컥?”
그러나 어둠의 창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세은의 몸에 닿자마자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리치 주제에 귀엽네.”
세은이 싱긋 웃으며 손에 든 지팡이를 부서 버렸다.
리치의 마력이 깃든 지팡이의 코어가 서서히 빛을 잃었다.
“내가 살살 다뤘더니 감이 안 잡히나 본데.”
우웅―
세은의 손에 신성력이 가득 모여들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꺼져.”
파아앙―
동시에 세은의 손에서 쏘아진 신성력이 리치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마력만 있으면 자가 복구가 가능한 리치라지만, 지팡이와 신체 전부가 소멸한 상황에서 부활은 무리였다.
“그럼 다음 놈을 잡으러 가볼까.”
세은은 지체 없이 다음에 느껴지는 리치의 흔적을 따라 몸을 날렸다.
* * *
“오른쪽이요!”
“알았어!”
쾅!
채연과 재호는 윌밍턴 레인의 방어에 투입되었다.
윌밍턴 레인은 바로 옆이 본토로 이어지는 다리이기 때문에, 뚫리면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도로 중 하나였다.
무질서하게 늘어진 차 위로 올라가 고지대를 선점한 채연과 재호가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언데드들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헤이!”
그때 같이 도로를 막고 있던 미국의 각성자 중 한 명이 채연과 재호에게 뭐라 소리쳤다.
“뭐라는 겁니까?”
“건물 안에 민간인이 있어 구조하러 진입할 거랍니다. 엄호 부탁한답니다.”
사노가 붙여준 통역사가 버스 뒤에 몸을 숨긴 상태로 통역을 해주었다.
“두 명이 건물로 진입한답니다!”
“아오. 이 와중에 두 명이나?”
그러나 당장 시야에 보이는 민간인들을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구하지 않으면 그들도 언데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알겠다고 해요!”
“네.”
통역사의 말을 들은 금발의 각성자는 자신의 동료와 함께 대부분의 창문이 깨져 버린 건물로 진입했다.
“쿠오오!”
두 명의 각성자가 건물로 진입하자 언데드들이 그들을 따라 건물로 향했다.
“여기다 이 새끼들아!”
콰앙―
재호의 마법이 건물로 몰려가는 언데드 무리에 직격했다.
“도저히 끝이 안 보이는데?”
“크악!”
“옆이요!”
파앙―
설상가상으로 건물 안, 언데드가 되어버린 시민들이 예상치 못한 곳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와 일행을 공격했다.
“아! 민간인들을 일단 구해야지 언데드도 막을 텐데. 진입을 할 수가 없으니 미치겠네. 진짜.”
“그러니까요. 건물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계속 언데드가 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잡아도 줄어들지 않는 숫자에 점점 지치고 있던 채연과 재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투둑― 투둑―
“……또 부활한다.”
심지어 쓰러진 언데드들은 머리가 날아간 것이 아니라면 일정 시간 후, 자리에서 부활했다.
난전에서 모든 언데드들의 머리를 정확하게 날려 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진짜?”
“그러니까요. 진짜 나쁜 말이기는 한데 여기가 우리나라가 아니라 다행이에요.”
좀비 영화에서나 나올 세기말 적인 광경이 재호와 채연의 두 눈을 꽉 채웠다.
콰앙―
“안에서 난리 났다!”
민간인을 구출하기 위해 각성자 둘이 진입한 건물에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마법이 잘못 폭사되면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에 채연이 집중해서 건물을 바라보았다.
파앙―
“베리 굿!”
채연은 화살을 날려 뒤에서 금발의 각성자를 노리던 언데드의 머리를 터트렸다.
언데드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상황을 파악한 각성자가 소리 높여 채연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사이 건물 안에서 구조 신호를 보낸 민간인 세 명을 무사히 구출했다.
“구한 거 같아요!”
“다행이네.”
콰앙―
그러나 기쁨도 잠시.
끊임없는 언데드들의 파도에 채연과 재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 위에도 민간인이 있어요!”
계속해서 폭발음과 각성자들의 고함이 들리자 건물 구석구석 숨어 있던 시민들이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창가로 향했다.
“지금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나와 오러가 고갈되어 가는 각성자들.
처음과 달리 민간인을 구출하러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언데드들이 구조를 요청하던 민간인들의 소리에 득달같이 그 건물로 진입했다.
“젠장! 이러다가는 우리가 먼저 지쳐서 쓰러지겠어.”
재호가 짜증을 내며 마법을 날렸다.
콰앙―
그때였다.
커다란 폭발음과 동시에 갑자기 미친 듯이 밀려오던 언데드들이 모래성이 허물어지듯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응? 뭐야?”
“무슨 마법을 쓴 거예요?”
“그냥 파이어 애로우 쓴 건데?”
갑작스런 언데드들의 소멸에 윌밍턴 레인을 지키고 있던 각성자들이 모두 분주히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다른 도로들도 갑자기 언데드가 소멸되었답니다!”
“오션 게이트웨이(Ocean Gateway)도 마찬가지입니다! 본토로 가는 길의 언데드들이 모두 소멸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오션시티 후미의 방어를 맡은 지휘관이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다.
“팀장님! 코스텔 하이웨이 쪽은 여전하다고 합니다.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지휘관은 재빨리 예하의 각성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이곳의 언데드가 정리된 것 같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 1조와 2조가 최소한의 방비를 맡고, 나머지는 다른 곳을 지원하라. 이동한다.”
“썰!”
통역을 전해들은 재호가 통역사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같이 이동하랍니다.”
채연과 재호는 다시 미국의 각성자들을 따라 차에 몸을 실었다.
* * *
“크윽…… 이게 마지막일 거라 생각하지 마라.”
“이미 한 놈은 조졌고, 너 말고 한 놈 남았는데 뭐?”
“흐흐흐흐. 마음껏 생각하거라.”
우웅―
망설임 없이 두 번째 리치를 소멸시킨 세은이 방금 전의 대화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흐음. 자기들 정도로는 날 막을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이상하게 당당하네.’
잠시 고민하던 세은이 일단 남은 리치부터 처리하고자 마음먹었다.
‘뭐가 되었든 다 처리하면 나오겠지.’
리치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사방으로 퍼져서 언데드들을 조종하고 있는 터라 오히려 이동하는 시간이 더 길게 걸리고 있었다.
“저쪽이군.”
마지막 리치의 위치를 파악한 세은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두 명의 리치가 소멸되어 도시를 점거했던 언데드의 삼분의 이가 이미 힘을 잃고 소멸된 상태였다.
“이 정도면 이제 시민들 피해도 덜 하겠지.”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하고 지원을 왔지만, 온통 언데드로 뒤덮여 엉망이 된 도시를 보던 세은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전에도 이러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아직 들리지 않지만, 세은이 리치를 전부 정리하고 나면 사태를 수습하면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도시를 가득 채울 것이 분명했다.
“하여간 흑마법을 사용하는 놈들은 기본적인 인성이 없다니까……”
마치 폭격이라도 당한 듯 허물어진 건물 사이를 질주하며 세은이 중얼거렸다.
지금 세은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빨리 남은 리치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저기 있네.”
세은의 눈에 흑마법을 사용해서 언데드를 쉴 새 없이 일으키던 리치가 들어왔다.
쾅!
세은은 우선 신성력을 날려 리치의 캐스팅을 방해했다.
“크윽! 어떤 놈이냐?”
신성력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기운에 신음을 내뱉은 리치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나다.”
“하! 신의 개가 나타나셨군.”
앞선 두 리치와는 달리 이번의 리치는 꽤 말이 많았다.
“꽤 고위 사제인 것 같은데. 혼자 온 용기가 가상하군.”
리치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세은이 피식 웃었다.
“네가 마지막이야. 인마.”
세은은 손에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검을 만들어 가볍게 쥐었다.
“너보다 먼저 간 놈이 이상한 소리를 하던데. 너들 보스가 누구야?”
“하하하. 앞의 두 놈을 처리했다고?”
세은의 말에 리치의 안광에서 빨간 빛이 폭사되었다.
리치는 다른 두 명의 리치가 모두 당했다는 얘기에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미 우리의 목표는 모두 이뤘다. 이제 그분이 강림하실 차례다!”
“강림? 혹시…… 마왕이냐?”
“하하하하하하!”
미친 듯이 광소를 터트리는 리치를 보며 세은은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마왕을 소환하기 위한 에너지를 모은 것 같았다.
“어떤 놈이야?”
“하! 직접 그분을 마주해라!”
쿵!
리치는 가볍게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찍었다.
쿠구구―
동시에 게이트 쪽에서 격렬한 진동과 함께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스악―
세은은 재빨리 소환을 취소하기 위해 검을 휘둘러 리치를 소멸시켰다.
쿠구구궁―
그러나 이미 발동한 소환진은 리치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다.
“아…… 끝까지 귀찮게 만드네.”
세은은 재빨리 게이트로 신형을 날렸다.
정말로 마왕이라면 리치 세 마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피해가 발생할 것이 자명했다.
“흑마법이랑 언데드면 누구지? 후보군이 몇 명이 되는데…….”
게이트로 가면서 세은은 마땅한 후보군을 물색했다.
그러나 워낙 능력이 겹치는 마왕들이 많아서 딱히 특정해서 예상하기는 무리였다.
“뭐, 보면 알겠지.”
세은은 소환진이 완전히 발동하기 전에 게이트 주변의 각성자들을 물리기 위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