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17. 마왕 무르무르(1)
“드디어 성공인가?”
케인이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파란색으로 변한 마정석을 바라보았다.
짙은 보라색이었던 마정석이 케인의 마나로 불순물이 정화되어 마법 물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 번 해봤으니 이제 다음부터는 수월하게 하겠지?”
케인이 마법 물품을 만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세은이 물었다.
“물론이네. 하지만 생각보다 마나가 많이 들어가는군.”
“처음이라 조절을 못해서 그래. 일단 좀 쉬지.”
“그래야겠군. 그나저나 마나 스톤으로 이런 용도를 생각하다니…… 자네, 정말 대단하구먼.”
케인의 감탄에 세은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세은이 대답하기 꺼려한다는 느낌을 봤자, 케인은 주제를 바꾸기 위해 옆에서 열심히 통역을 하고 있는 사노에게 말했다.
“마나 스톤 중에 가용 가능한 재고가 있으면 가져오게. 아주 유용할 것 같아. 이 정도 크기로 파이어 애로우를 스무 번이나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네.”
“아, 알겠습니다. 위에 얘기하겠습니다.”
“어차피 한 번에 여러 개는 만들지 못할 것 같구먼. 적당한 거 한두 개만 가져오게.”
케인은 말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마법 물품 하나 만든 것으로 마나가 고갈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마나를 사용한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후우. 알면 알수록 마법이란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군.”
케인은 현대의 지식에 얽매이지 않고 더 다양한 마법의 활용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노는 그런 케인의 모습에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노의 발전 하나만으로도 세은을 미국으로 초빙한 보람이 있었다.
“사, 사노 실장!”
“응?”
갑자기 게이트 안으로 뛰어 들어온 각성자의 부름에 사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한 일로 게이트에 자신을 찾으러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었으니까.
케인 역시 세은과 함께 들어왔지만, 게이트는 여전히 일급 위험 지역이었다.
“무슨 일인가?”
“오션시티의 게이트 포위망이 뚫렸답니다! 급히 케인과 함께 다른 인원을 지원하라는 명령입니다.”
“왓? 오션시티의 게이트가 왜 뚫려?”
“자세한 사항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게이트에서 처음 보는 기괴한 몬스터가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민간의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해야 해서 가용한 모든 전력을 지원해 달라고 합니다.”
사노는 급히 케인을 바라보았다.
이미 얘기를 듣고 있던 케인은 사노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바로 움직일 채비를 했다.
사노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멍하니 자신을 바라만 보던 세은에게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럼 당신도 가나?”
“아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음. 그럼 여기를 정리하고 있으면 되나?”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아, 걱정하지 마.”
세은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기다리는 동안 일행의 수련을 도우면 되는 일이었다.
“케인! 얼른 가시죠.”
사노는 다급함을 숨기지 못하며 케인에게 말했다.
“세은은 안 가나?”
사노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케인이 따라오지 않는 세은을 보며 사노에게 물었다.
“미스터 도의 계약은 게이트의 소멸 및 조사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남아서 조사를 부탁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다른 곳도 아니고 시내가 뚫렸는데? 물어보기라도 해야지!”
케인의 말에 사노가 대답했다.
“계약 조건이 아닌 걸 부탁한다고 들어줄 성격이 아닙니다.”
“허어.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네. 저 정도 실력자가 있고 없고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나?”
“알고 있습니다만…… 한시가 급하니 일단 출발하시죠.”
사노가 길을 재촉했지만, 케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물어보기라도 하게!”
단호한 케인의 표정을 본 사노는 한숨을 쉬며 세은에게 물었다.
“미스터 도?”
“응?”
“혹시 이번에 저희를 도와주실 수 없으십니까? 다른 곳도 아닌, 중부 대서양 관광지라…….”
세은은 방금 전에 케인의 언성이 높아진 이유를 알아챘다.
“같이 가는 건 상관이 없는데…….”
“정말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세은의 태도에 사노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럼 채연이랑 재호 씨도 데리고 가야지.”
케인이 간단하게 조사한 바로는 코네티컷의 게이트에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몬스터들이 각성자들의 포위를 뚫고 나온 오션시티의 게이트라면, 뭔가 다른 점이 있을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그럼 기다려, 일행 데리고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먼저 나가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세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을 찾아 움직였다.
* * *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오션시티이래.”
“오션시티요? 거기가 어디예요?”
“글쎄…… 나도 처음 들었어. 메릴랜드 주에 있는 관광지라는데?”
“메릴랜드요?”
“중부 대서양에 있는 인기 휴양지라는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그래도 휴양지면 사람이 많겠네요? 큰일이네…….”
보스턴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재호와 채연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둘과 세은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정보를 얻을 만한 루트가 없었다.
가장 많은 정보를 접하는 세은은 비행기의 앞쪽에서 케인과 함께 보스턴의 상황을 브리핑 받고 있었다.
“현재 이슬 오브 와이트 만(Isle of Wight Bay)을 기준으로 한 포위망이 뚫린 상태로, 최대한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코스텔 하이웨이 78번가를 기준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몬스터들은 길이 막히자 오션시티 후미 쪽으로 남진하고 있습니다.”
“그쪽에도 본토와 이어지는 다리가 있지 않은가?”
케인의 질문에 사노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직까지 진압 중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상자의 파악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점차 민간인들의 피해가 확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세은은 사노에게 물었다.
“어떤 몬스터들이 나왔는데 밀려?”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른다고?”
세은의 말에 사노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분석 팀의 보고로는 언데드 몬스터인 것 같다고 합니다. 다만…….”
잠시 머뭇거리던 사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몬스터에게 공격당한 시민들까지 몬스터가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시민들이 몬스터가 된다고?”
“예. 분석 팀이 거의 확실하다고 합니다. 사람이 몬스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상부에서는 우려가 매우 큽니다.”
사노의 말에 세은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번뜩 떠올랐다.
“네크로멘시인가?”
“네크로멘시 말입니까?”
“멀쩡한 사람이 언데드가 된다면 그것밖에 없는데?”
“설마 몬스터 중에 네크로멘시가 가능한 몬스터가 있습니까?”
“아예 없는 건 아닌데……”
‘평범한 리치가 이렇게 하기는 힘들 텐데…….’
한 지역을 막지 못하고, 언데드가 밀려들 정도면 리치 정도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했다.
네크로맨서는 일인군단이라고 불릴 정도로 숫자에 강점이 있지만, 개개인의 능력치가 그리 크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이성이 없다 보니 유인하거나 포위 및 섬멸하기에도 매우 용이했다.
그래서 비슷한 숫자라면 각성자들이 이렇게까지 밀릴 일은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환자가 명령을 내려서 조종하면 모르겠지만, 도시 전체가 난리라고 하니 그건 아닐 테고.’
아무래도 현장에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정확한 판단이 힘들었다.
“일단 가서 현장을 봐야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다른 어떤 몬스터보다도 언데드나 마물 종류에 대해서는 예민한 기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세은이었다.
신성력과 반대되는 사기나 흑마력의 특성을 집어내는 건 그에게 정말 쉬운 일이었다.
일련의 사건에 대한 문제도 현장에 도착하면 쉽게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초조한 표정의 사노가 다시 한 번 세은에게 부탁했다.
* * *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잠시 후에 오션시티 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앞으로 무운을 빕니다.
잔뜩 긴장한 기장의 안내 멘트가 기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기내의 모든 각성자들이 각자 긴장이 섞인 결연한 표정으로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쿠웅―
작은 진동과 함께 비행기의 바퀴가 땅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난 이후로는 거침이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최단 거리로 공항을 빠져나와 각자 준비된 차량에 탑승했다.
“언데드 몬스터들의 보편적인 약점을 먼저 알려줄게.”
일단 일행과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 세은이 조심해야 될 점에 대해 말을 이어 나갔다.
“언데드들도 대부분 머리가 약점이니까. 머리를 노려.”
“머리요?”
“간혹 머리를 부서도 움직이는 놈들이 있으니까, 그럴 때는 다리를 노려. 그럼 적어도 이동은 주춤하게 할 수 있지.”
“아하. 네, 알겠어요!”
“그리고 재호 씨는 얼음이나 화염 계열 마법을 주로 사용하세요. 얼리거나 태우는 게 제일 효과가 좋으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리하지 말고요. 저는 사노와 함께 게이트 입구로 갈 겁니다.”
“알겠습니다.”
"게이트 입구가 정리되면 다른 인원들이 시내를 정리하러 갈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 조심하세요.”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채연과 재호에게 간단한 조언을 해준 세은은 사노와 같은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말이 안 통할 텐데, 괜찮나?”
“아, 미리 한국어 가능한 사람을 붙여달라고 했습니다.”
세은의 혼잣말을 들은 사노가 대답했다.
상상 이상의 깔끔한 일처리에 세은이 속으로 감탄했다.
‘사노가 일을 잘하는 건지 위에서 컨트롤을 잘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만족스러운 대처였다.
대화가 통하면 만약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도 대처하기 훨씬 수월했다.
한층 편안해진 마음으로 세은은 사노와 계획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아직 입구에 남아 있는 몬스터들을 다 소탕하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게이트를 지키게 만들면 된다는 거군. 그다음에 시내로 합류해서 이미 빠져나간 놈들을 사냥하고.”
“맞습니다. 로이스도 오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거리가 더 멀어서…….”
“미국이 넓기는 넓은가 보네.”
“이럴 때는 단점인 것 같습니다.”
사노의 배부른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세은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국가 재난 사태가 발동된 오션시티의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구워어.”
조금 더 이동하다보니 괴상한 소리와 함께 언데드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접근하기 전에 처단해!”
지휘권자의 명령과 함께 갖가지 마법들이 차량으로 몰려오던 언데드들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말했던 것보다 적고 약한데?”
“대부분의 언데드들이 외곽에 몰려 있다고 합니다.”
“그럼 외곽부터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상부에서는 게이트에서 더 이상 변수가 일어나는 것을 먼저 방지하고자 합니다.”
“흐음. 그렇다면야 뭐…….”
산발적인 언데드들의 공격을 가볍게 물리치자, 차량은 빠르게 오션시티의 게이트에 도착했다.
“사노! 왔습니까?”
지원군을 애타가 기다리고 있던 각성자들이 사노가 보이자 반갑게 그를 불렀다.
사노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는 바로 실시간 현장 상황을 물어보았다.
“현재 상황은?”
“게이트에서 더 이상 몬스터가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에 나온 몬스터가 대체 정확히 뭔가?”
“기다란 망토를 뒤집어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해골 세 구였습니다.”
사노의 통역을 들은 세은이 말했다.
“리치네.”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미스터 도.”
“일단 걔들은 보통 머리를 부순다고 해도 움직이니까. 지팡이를 노리라고 해. 지팡이가 부서지면 가지고 있는 힘의 절반도 못 쓰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을 게 아니라 그놈들을 잡으러 가야겠는데.”
“게이트는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그래도 여태까지 몬스터들이 더 이상 안 나왔다면 일단 안에 들어가기보다 밖을 먼저 정리해야 되지 않겠어?”
“그렇긴 합니다.”
세은의 말은 들은 사노는 현재 리치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무전을 보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아. 됐어. 그놈들이면 쉽게 찾을 수 있으니까.”
사기에 대한 기감에선 세은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세은은 이내 기감을 퍼트려서 게이트에서 튀어나왔다는 세 구의 리치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자,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