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15. 미국의 의뢰(2)
“그럼 다들 가고 싶다는 말이지?”
“네! 당연하죠.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어요?”
“제 생각에도 이번만큼 좋은 의뢰가 또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세은의 질문에 채연과 재호가 눈을 반짝이며 활기차게 대답했다.
무려 500만 달러, 한화로 50억 상당의 계약인데 거절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거기에 세은의 능력이라면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이트 닫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는 관광을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정재호가 가장 열성적이었다.
오랜 시간 고시 준비를 하느라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와! 좋아요. 미국에 몇 번 가봤지만 놀러간 적은 없어요!”
채연도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호조에 매우 들떠 있었다.
세은에게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거기다 정식으로 게이트를 조사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이 또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전 야쿠자들의 돌발 행동으로 부모님을 둔 채 멀리 미국으로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모시고 갈 수도 없고…….’
세은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정재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은 씨? 어떤 점을 고민하고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부모님 때문에 그래요. 전에 일이 좀 있어서.”
“아! 맞아. 불안하죠. 그럼.”
같이 일본까지 갔던 채연이 세은의 말에 공감했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채연은 세은에게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그럼 길드에다가 의뢰를 넣는 게 어때요? 오빠 미국에 다녀올 동안 지켜달라고요.”
“길드?”
채연의 제안에 세은이 물었다.
“길드가 호위 의뢰도 받아?”
“어차피 지금은 게이트도 없는데요 뭐.”
“하지만 게이트가 생길 수도 있으니 의뢰를 안 받지 않을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재호가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도 세은 오빠 일인데 도와줄 거 같아요.”
“흠…….”
잠시 볼을 긁적이던 세은이 채연에게 물었다.
“보통 길드가 몬스터 처치 의뢰를 받으면 얼마나 받아?”
“돈은 따로 안 받고요, 처치한 몬스터 사체에 대한 소유권을 받아요. 7대3으로 3은 정부가 가져가고요.”
“그럼 대충 얼마나 나오는데?”
“그건 몬스터 종류에 따라 달라지니까 뭐라고 말을 못하겠어요.”
“일단 물어보면 되나?”
세은의 말에 채연이 반문했다.
“네? 뭐가요?”
“의뢰비.”
“아마 돈은 안 받을 걸요?”
채연은 딱히 의뢰비를 받지 않아도 세은과의 관계를 위해 이성우가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모르지, 그런데 대한 길드가 제일 믿을 만해?”
“그럼요. 영한이도 있고, 길드장님도 있고, 다른 실력자들도 많아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이 이런 의뢰를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에이. 그래도 영한이가 그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아요. 적어도 일에는 나름 프로페셔널해요.”
적어도라는 채연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세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한 번 연락해 봐.”
“네!”
채연은 세은의 말에 지체 없이 휴대전화를 들어 이성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실 필요는 없는데, 감사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저희가 세은 씨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얼마인데요.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바로 저에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충분합니다.”
이성우는 채연의 전화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세은이 뭐라 말을 하기 전에 자신이 생각한 호위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세은으로서도 꽤 만족스러운 제안이었기 때문에 두 말 없이 이성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정말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설마 미국에서 그 조항으로 물고 늘어지겠습니까?”
“또 모르죠. 일단 최대 기한을 명시할 생각입니다. 저들도 다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고 가져오지는 않았겠죠.”
“하긴, 원래 계약이나 거래는 밀고 당겨야 제 맛이죠.”
“혹시 길어질 것 같으면 다시 얘기를 나누면 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편하게 연락 주세요.”
세은은 이성우와 진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아, 그런데 혹시……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제가 더 이상 오러가 늘지 않는데 혹시 이유를 알고 계시는지요.”
“다시 손 좀 주세요.”
“아, 예.”
세은은 다시 이성우의 손을 잡고 신성력을 이용해 이성우의 오러를 살펴보았다.
‘흐음. 양적인 성장은 거의 다 끝났나 것 같은데.’
가벼운 진단을 끝낸 세은이 이성우에게 말했다.
“일단 양적 성장은 다 끝난 거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 말은 오러의 양말고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 거 같은데요.”
“맞습니다.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에 야쿠자 두목이 반 정도 경계에 걸쳐 있더군요.”
“그자가 그 정도였습니까?”
“물론 반편이였기는 했지만, 제가 본 사람 중에는 나름 가장 수준이 높았습니다.”
“아…… 야쿠자인 게 아쉽네요. 조언을 구할 수도 없고.”
“일단 앞으로는 오러의 성장보다는 기본기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원래 검을 쓰던 분은 아니지 않나요?”
“예. 전문적으로 배운 건 각성자가 된 이후입니다.”
“그럼 한 번 검술을 연마해 보세요. 사실 원론적인 말이지만 기본이 가장 중요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대로 된 검술 선생을 초빙해야겠군요.”
시원시원한 이성우의 대답에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을 다녀와서 변화가 있는지 한 번 봐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부모님을 잘 부탁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성우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가슴을 강하게 팡팡 내려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부모님의 신변 문제가 해결된 세은이 이성우가 떠나자마자 바로 재호에게 말했다.
“이지호 실장보고 내일쯤에 한 번 보자고 하세요. 어차피 다 알고 있을 테니 연락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마 자신이 미국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하면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세은은 이지호와 무슨 얘기를 할지 생각을 정리하며 소파에 앉아 몸을 뒤로 뉘였다.
* * *
“미스터 도! 여기입니다!”
뉴욕 JFK 공항에 내리자, 먼저 미국에 돌아가 있던 사노가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헬로. 여러분. 미합중국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사노는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와. 비행시간 정말 기네요. 퍼스트 클래스인데도 지겨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정재호가 찌뿌둥한 몸을 피며 말했다. 전지훈련이나 올림픽 참가를 위해 여러 번 비행기를 탔던 채연도 피곤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일단 숙소로 이동하시죠.”
특수국토안보국 측에서 준비한 차량이 공항 앞에 위용을 뽐내며 대기하고 있었다.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세단의 위용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시선이 한 번씩은 차량에 꽂혔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대우에 신이 난 재호와 채연과 달리 세은은 덤덤했다.
‘공간이동 게이트가 진짜 편했는데.’
조금 어지럽기는 하지만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아 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공간이동이 그리웠다.
“미스터 도. 많이 피곤하신가 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세은을 보며 사노가 물었다.
아직 최종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그의 마음이 변할까 노심초사였다.
세은이 고개를 저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괜찮으니 숙소 가서 얘기하지.”
“하하, 알겠습니다.”
차량은 빠르게 뉴욕 시내를 향해 질주했다.
“세계 어디나 거의 공항은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네요.”
채연이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며 말했다.
“시끄러우니까 그럴걸?”
집이 김포공항 근처에 있던 재호가 대답했다.
“비행기가 시도 때도 없이 다니면 생각보다 엄청 시끄럽거든. 뭐, 무덤덤한 사람도 많지만 그만큼 예민한 사람도 많으니까.”
“으음. 그래도 항상 시내로 다시 이동하는 게 불편하더라고요. 내리자마자 시내라면 얼마나 좋을까.”
둘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사노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끼어들었다.
“아쉬운 말이지만, 서류상의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면 오늘 하루 쉬고 다시 이동해야 합니다.”
“네? 얼마나요?”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코네티컷 주의 뉴헤이븐(NewHaven)이 최종 목적지입니다.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거기 예일 대학교 있는 곳이 아닙니까?”
“오! 알고 계시는군요.”
정재호의 말에 사노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합중국이 자랑하는 대학 중 하나죠. 코네티컷 주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각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아하. 처음 알았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차량은 호텔에 도착했다.
“와…… 정말 여기서 잡니까?”
“진짜! 완전 좋아요.”
호텔의 외관을 올려다보는 채연과 재호의 눈이 감탄으로 진하게 물들었다.
미국에서 충분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호텔의 수준은 고급스러웠다.
직원들도 하나같이 기강이 잘 잡혀 있는데다, 행동에 예의와 품위가 있었다.
사노가 나서서 모든 일을 처리해 주니 신경 쓸 일이 생기지 않았다.
호텔의 최고층에 각자 방을 하나씩 배정받은 일행이 짐을 내려놓고 세은의 방에 모였다.
세은은 이미 사노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 기한은 한 달. 그 이상은 상황을 봐서 합당하고 생각되면 내 허락 아래 연장.”
“아, 그 문제에 관해서 상부에 올렸는데 제 권한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노의 말에 세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이러다니.
그러나 사노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국장님께서 미스터 도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하십니다. 사실 이 정도 계약이면 적어도 국장님이 직접 체결하시는 게 맞기도 하고요.”
잠시 심기가 불편해졌던 세은은 사노의 말에 구겨진 미간을 다시 폈다.
“그럼 국장은 언제 오는데?”
“잠시 후에 오실 겁니다. 아무래도 국장님은 바쁘셔서요. 현재 미합중국에는 게이트가 총14개 있습니다. 하루에 14곳의 보고를 처리하다 보니 국장님께서는 항상 과로하시죠.”
사노의 말을 듣던 세은이 이상한 점을 느꼈다.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가 무한으로 생성되는 것도 아니고, 숫자가 정해져 있던데 14개 전부에서 여전히 몬스터가 나오나?”
“아! 물론 처음과 같이 폭발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몇 마리씩 나옵니다. 가장 최근의 게이트에서는 거대한 몬스터들이 나오더군요.”
“뒤에 생성된 게이트일수록 몬스터의 수준이 높다는 얘기야?”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데 평균적으로 나중에 열릴수록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지더군요.”
‘아공간이랑 비슷한데 완전히 아공간은 아니란 말이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생각할수록 오히려 의문점만 쌓여갔다.
나중에 들어와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채연이 조용해진 틈을 타 사노에게 물었다.
“그런데 사노 씨.”
“예, 미스 서. 말씀하세요.”
“미국 전역에 게이트가 14개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한국에 여태까지 나타난 게이트만 7개인데 미국 전체에 14개라고요?”
“확실히 한국에 게이트가 몰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을 수 없어 하는 채연의 말에 사노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풀기 시작했다.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일본에 3개, 중국에 8개, 그리고 영국에 2개입니다.”
“다른 곳은요?”
“다른 곳은 저희가 완벽하게 파악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다만 이 정도만 봐도 한국이 유난히 게이트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죠.”
“그러게 땅은 작은데 거의 중국이랑 같은 숫자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정재호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마 세은 씨가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우연은 아니지 않을까요?”
“헛소리야.”
세은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자신은 게이트 때문에 능력이 생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나 때문에 게이트가 한국에 생긴다고? 내 능력은 게이트랑 상관이 없으니까 헛다리 그만 짚고 다른 쪽으로 생각해 봐.”
“왓? 게이트와 상관이 없다는 말은?”
“게이트와 상관없이 원래 내 능력이란 말이지. 이런 것도 두 번 설명해야 해?”
“그런…… 믿을 수 없습니다.”
“믿든 말든 자유고, 좀 제대로 된 가정을 가지고 와봐. 이상한 이론 세우지 말고.”
“하하. 관련 부서에 전달하겠습니다.”
똑똑―
“국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두 번의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경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미국 특수국토안보국의 국장 펜 샌데로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국장님 오셨습니까?”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사노는 펜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 사노! 수고했네.”
사노의 인사를 받은 펜은 여전히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있는 세은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특수국토안보국 국장 펜 샌데로크라고 하네.”
사노의 통역을 들은 세은이 마주 손을 내밀며 말했다.
“도세은.”
“하하. 보고 받은 것처럼 과묵하시군.”
펜은 그런 세은의 태도에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악수를 끝내고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빙빙 돌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을 들었지.”
펜은 바로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들었다.
“그럼 바로 계약에 대해 얘기하지.”
“시원시원해서 좋네. 역시 윗사람이 통한다니까.”
탁―
그런 펜의 태도에 세은 역시 재호에게서 번역이 적힌 서류를 건네받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