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14. 단서는 작은 것부터(1)
“지금이에요!”
“윈드 커터!”
“꾸에엑…….”
마지막 재호의 마법을 마지막으로 와일드 피그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오히려 놀들 상대할 때보다 쉬운데요?”
“그런 거 같지?”
같이 사냥을 하면서 나이대로 말을 편하게 하기로 한 재호가 대답했다.
채연의 말대로 세은이 어려울 거라고 한 와일드 피그가 놀보다 더 사냥하기 수월했다.
물론 날카로운 송곳니와 저돌성은 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동족 의식을 살살 자극해서 채연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숙련도가 오른 윈드 커터로 차분히 잡으면 오히려 할 만했다.
결정적으로 놀만큼 많은 숫자가 몰려 있지 않았다.
숫자가 적으니 더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할 수가 있었다.
‘이 정도면 여기서는 더 할 게 없을 것 같은데.’
둘의 사냥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세은이 생각했다.
이제 놀이랑 와일드 피그는 둘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다.
상황에 따른 다양한 대처 역시 이제는 알아서 척척하고 있었다.
‘잠깐 쉬라고 하고 게이트 좀 둘러보고 올까?’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둘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세은이 이제는 알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둘에게 말했다.
“여기서 좀 쉬고 있어.”
“네? 어디 가시게요?”
“게이트 좀 둘러보고 오게, 궁금한 게 있어서.”
“아하. 그럼 알아서 수련하고 있을까요?”
의욕적인 채연의 태도에 세은이 웃으며 만류했다.
“됐어. 괜히 나 없을 때 돌발상황 생기면 곤란하니까. 그냥 푹 쉬고 있어.”
“헷, 알았어요!”
“재호 씨도 쉬면서 마법의 특성에 대해서 고민 좀 하고 있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느꼈겠지만, 단 하나의 마법을 써도 특성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역시 의욕이 넘치는 정재호의 모습에 세은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갔다 올 테니까 기다려.”
“네에!”
세은은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당장 안전하다고 해도 게이트 안이라서 일행을 오래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게이트에 끝이 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대체 게이트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의문이었던 것이다.
파바박―
세은이 빠른 속도로 초원을 가로질렀다.
채연과 재호가 없으니 속도를 조절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의 늪과는 달리 초원은 벌써부터 그 끝이 보이고 있었다.
“응?”
초원의 끝에 다다른 세은의 눈에 들어온 건 폐허가 된 마을이었다.
50여 가구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었는데,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은은 조심스럽게 마을로 진입했다.
사람이 없는 것치고는 마을의 상태가 상당히 멀쩡했다.
끼익―
세은이 근처에 있는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있을 건 다 있는데?”
조리 도구부터 테이블까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모두 있었다.
“이 인테리어는…… 오피뉴에서 많이 보던 거……?”
상당히 익숙한 디자인이 세은의 눈길을 끌었다.
이계에서 자주 봤던 모양의 가구들.
“흐음…….”
증폭되는 의문에 세은은 탐색을 마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봤지만 정말로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일하러 갔을 리도 없고…….”
세은은 뺨을 긁적거렸다.
무엇인가 단서가 있을 것 같은데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마을 탐사를 마치고 세은은 다시 움직였다.
“아, 뭐야. 또 늪이야?”
마을을 빠져나와 다시 전진하던 세은은 다시 늪을 발견했다.
“늪, 초원, 늪의 반복인가?”
질퍽거리는 것이 싫었던 세은이 잠시 고민하다가 늪으로 진입했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캬악!”
조금 더 늪으로 들어가자 리자드맨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늪은 리자드맨, 초원은 놀이랑 와일드 피그가 전부인가.”
마을과 가까운 곳에서 발견한 몬스터들에 세은은 그쪽으로 향했다.
혹시 마을 사람들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키야아악!”
소리를 따라 이동하자 리자드맨들의 부락으로 보이는 마을이 나타났다.
리자드맨들이 경계를 서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동하는 모습이 세은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을 안쪽에는 리자드맨들이 꾸물꾸물거리고 있었다.
세은은 마을을 확인하고서야 나직이 신성 마법을 발동했다.
“에일린, 성스러운 안개.”
세은이 신성 마법을 발동함과 동시에 리자드맨들의 마을 위로 안개가 서서히 깔리기 시작했다.
“키악?”
“캬우으…….”
안개로 인해 리자드맨들의 시야가 제한되었다.
그리고 신성력이 포함된 안개가 리자드맨들의 기운을 서서히 빼앗고 있었다.
탓―
세은은 리자드맨들의 감각을 둔화시키고는 마을로 진입했다.
혹시 생존자가 있을지 모르니 조용히 잠입하는 방법을 택했다.
괜한 소란이 일으키면 광폭해진 몬스터들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파충류 특유의 비릿한 향이 코를 강하게 찔렀다.
‘아오…….’
불쾌한 냄새에 세은이 인상을 가득 찌푸리며 빠르게 이동했다.
보통 몬스터들은 전리품을 모두 마을 중앙의 족장 집 근처에 쌓아두었다.
‘별건…… 없는데?’
리자드맨들의 마을 중앙에 도착한 세은의 눈에는 오직 다른 건물과 외향이 다른 족장이 집과, 재물을 쌓아두는 창고만 들어왔다.
인질들을 잡아넣을 감옥처럼 보이는 건물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없는 건 리자드맨이랑 관련이 없는 건가?’
조금 더 마을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움직이고, 여긴 나중에 상황 봐서 둘을 데리고 와서 처리해 보라고 해야겠어.’
사람의 흔적을 찾지 못하자 세은은 깔끔하게 리자드맨 마을에서 벗어났다.
다시 세은은 늪을 뚫고 전진했다.
별다른 변화가 없는 늪의 풍경을 계속 보자니 끝이 없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슬슬 초원에 남겨두고 온 채연과 재호의 신변이 걱정되기도 했다.
다른 몬스터들이 없는 것은 확인했지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르릉.”
이번에는 그만 되돌아갈까 고민하던 세은의 귀에 낯선 울음소리가 들렸다.
“뭐지?”
굉장히 묵직한 울음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재빨리 허공을 살펴보았지만 허공에는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르르르르.”
그때 다시 울음이 들렸다.
귀를 종긋 세우고 있던 세은은 소리의 근원을 찾아 몸을 날렸다.
“이 근처인데?”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세은이 기감을 확장했다.
우웅―
신성력이 세은의 제어에 따라 공간을 점령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음?”
얼마 되지 않아 세은은 자신의 발 밑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꼈다.
“이거 설마…….”
“그라라라!”
정체불명의 생물도 세은이 신성력을 느꼈는지 불쾌한 울음소리를 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두두두―
땅이 사정없이 울리며 거대한 몸체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아까 그 악어잖아?”
세은은 처음에 늪에서 지나쳐 왔던 악어의 주둥이 부분에 서 있던 것이었다.
늪에 들어가 있느라 감겨 있던 악어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번쩍―
탁한 빛을 내뿜고 있는 악어의 누런 눈이 세은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벌써 잡으면 수련을 더 못 시키는데…….”
세은은 지금 이 악어를 잡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런 세은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악어는 세은을 인식했는지 주둥이를 격하게 흔들었다.
“읏차!”
자신을 떨어트리려는 악어의 행동에 세은이 가볍게 뛰어올라 바닥으로 착지했다.
“이걸 잡아? 말아?”
세은은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열심히 달리다 보니 제자리로 돌아온 걸 보면, 게이트가 하나의 독립된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라진 마을 사람들의 단서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게이트를 닫아버리기에는 조금 아쉬웠다.
물론, 일행의 수련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롸!”
그러나 악어는 그런 세은의 결정을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지 거대한 주둥이를 크게 벌리며 괴성을 질렀다.
족히 성인 남자 한 명의 크기는 되는 이빨들이 태양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응?’
악어가 하는 짓을 귀엽게 바라보고 있던 세은은 저 높이 주둥이 안에서 휘날리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천조각?’
악어의 주둥이 안에서 펄럭거리고 있는 것은 분명히 천이었다.
세은이 자세히 보기 위해 집중하려는 찰나, 악어가 아름드리나무 같은 발을 움직여 세은을 밟으려고 시도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지만 워낙 덩치가 크니 바로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흐음.”
탓―
그러나 세은은 가볍게 악어의 발을 피해내고는, 다리를 디딤돌 삼아 주둥이로 접근했다.
하나하나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악어는 덩치에 맞게 두터운 가죽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세은이 추진력을 얻기 위해 악어의 가죽에 홀리 파이어를 폭발시켰지만 상처는커녕 그을림만 조금 생겼다.
“어째 점점 나오는 놈들이 비정상인 거 같냐?”
세은은 투덜거리며 무사히 악어의 주둥이로 안착했다.
그러나 크기가 너무 커서 입 안을 살펴보려면 아예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으음.”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더러운 몬스터의 입 안에 사실이 꺼림칙했다.
그러나 방금 전에 본 천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우웅―
신성력으로 방어막을 두른 채, 가볍게 살짝 벌어진 악어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우욱!”
신성력이 악어의 축축한 침을 막아주기는 했지만, 냄새까지 차단해 주지 못했다.
폐부를 깊숙하게 찔러오는 악취에 세은이 헛구역질을 했다.
“젠장! 냄새에 질식해서 죽겠네.”
도저히 코가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악취였다.
세은은 결국 임시방편으로 입으로 숨을 쉬며 악어의 입 안을 탐사했다.
“홀리 라이트.”
세은의 시동어에 맞춰 빛의 구가 나타나 내부를 환하게 비추었다.
시야가 밝혀지자 세은은 단숨에 아래에서 봤던 천조각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이건 사람 옷?”
가까이서 보니 악어의 이빨에 달라붙어 있는 천 조각은 사람의 옷이 분명했다.
옷의 디자인이나 천의 상태를 봐서는 지구의 옷이 아니었다.
“아까 그 마을 사람들의 옷인가?”
순간 세은의 머릿속에 리자드맨들이 게이트 밖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 떠올랐다.
“보스 악어, 리자드맨, 비어 있는 마을…….”
세은은 차분히 여태까지 얻은 단서들을 조합했다.
“악어는 사람을 먹었고, 마을은 비어 있다. 악어가 마을로 갔다기에는 건물들이 너무 멀쩡해.”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리자드맨들 게이트 밖으로 나온 게 악어가 시켜서라면? 악어가 먹을 사람이 없으니 통로로 사냥을 하러 나왔고, 지구와 연결됐다.”
하지만 정작 처음에 알고자 했던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게이트 안의 마을 사람들이 없는 것에 대한 거지. 게이트의 원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그러나 이 정도로도 더 궁금한 것이 많았다.
게이트는 왜 이렇게 작은지, 그리고 이 안에 사람의 마을이 있었는지.
그 모든 것이 새롭게 생긴 미스터리였다.
“일단 둘에게 돌아가야겠어.”
여기서 더 알아낼 것이 없다고 생각한 세은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채연과 재호에게 돌아가기 위해 몸을 날리려 했다.
“그르르륵.”
“뭐야?”
한참을 찾았지만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간 세은을 찾지 못한 악어가 탐색을 포기하고 다시 늪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히 늪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미친…….”
세은은 욕설을 내뱉으며 빠르게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