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9. 화성 행궁 게이트(3)
“후우. 이제 좀 기분이 풀리네.”
깨애앵…….
스트레스가 풀릴 때까지 실컷 은빛 웨어 울프를 자근자근 다진 세은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아내었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쑤욱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불행하게도 샌드백 역할이 된 은빛 웨어 울프는 때리고 치료하고, 때리고 치료해 준 덕분에 겉모습은 멀쩡했다.
그러나 이미 생기를 잃은 눈으로 바닥에 축 늘어진 채 의미 없는 울음소리만 흘리고 있었다.
“끄, 끝나셨습니까?”
사노와 스미스와는 달리 처음에는 그 모습을 재밌게 감상하던 이지호도, 끈질기게 치료와 구타를 반복하던 세은의 모습에 질린 표정을 하며 물었다.
‘저런 사람을 처음에 제압하려 했다니.’
바닥에서 부르르 몸을 떠는 웨어 울프가 마치 남 같지 않았다.
“아, 네. 끝났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오래 기다리기는요.”
세은이 사노와 스미스를 바라보자 둘도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끼잉. 낑.
세은이 다시 자신에게 다가서자 웨어 울프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꼬리를 말고 울었다.
세은은 그런 웨어 울프를 보고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야, 여기서 제일 센 놈이 누구야.”
그러나 웨어 울프는 그런 세은의 말을 못 알아들은 듯이 그저 바닥에서 몸을 말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세은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 이거…… 아직 정신 못 차렸네.”
깽깽!
세은이 다시 신성력으로 둔기를 만들어 손에 쥐자 웨어 울프가 깜짝 놀라 짖으며 벌떡 일어났다.
키잉!
그러고는 꼬리를 애처롭게 흔들며 마치 세은을 안내하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몬스터가 사람 말을 알아듣다니…….”
처음에 세은이 웨어 울프에게 말을 걸 때만 해도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했던 일행은, 웨어 울프가 세은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스터 도! 지금 그 늑대 몬스터가 당신의 말을 알아듣는 게 맞습니까?”
사노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몬스터도 지능이 있는데 왜 못 알아듣겠어? 보디랭귀지는 만국 공통어야.”
보디랭귀지라고 하기에 세은의 의사표현이 엄청 과격했다.
하지만 당장 사노의 머릿속에 몬스터들을 길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 가득 찼다.
‘굳이 죽이지 않고, 가축처럼 키울 수 있다면?’
몬스터의 사체를 이용한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경우, 이제 고블린과 오크는 거의 분석을 끝냈다.
고블린과 오크의 가죽이나 힘줄 정도나 쓸 만했다.
그리고 최근에 특유의 재생력으로 인해 의료 쪽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자, 일단 출발하죠. 슬슬 배가 고프네요.”
생각에 잠겨 있던 사노가 세은의 말에 퍼뜩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디야? 똑바로 안내해.”
키이잉…….
세은이 한 번씩 위협을 할 때마다 웨어 울프의 귀와 꼬리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처음의 흉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겁먹은 강아지 같은 모습만이 보였다.
낑낑.
“다 왔나?”
웨어 울프를 따라 이십여 분 정도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울창한 나무를 뚫고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 되었을 무렵, 웨어 울프가 울음소리를 내며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은빛 웨어 울프는 세은이 자신을 바라보자 두 눈 가득 애처로움을 가득 담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음…… 고생했다.”
사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느새 생성된 빛의 검이 은빛 웨어 울프의 목을 깔끔하게 베고 지나갔다.
웨어 울프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생을 마감했다.
“왓? 미스터 도! 기껏 길들인 놈을 왜 죽이십니까?”
“길들이다니?”
사노가 안타까운 마음에 소리쳤다.
“완전히 미스터 도에게 굴복했던데 아깝습니다. 저대로 데리고 나갔으면 실험용으로 쓸 수 있는데 말입니다!”
정말로 아쉬워하는 사노의 표정에 세은이 말했다.
“당장은 저래 보여도 몬스터지. 나가서 내가 하루 종일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거기다 이런 놈이 필요하지도 않고.”
“그, 그래도 다른 방법이…….”
세은은 사노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확실하게 경고했다.
“혹여 길들일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 몬스터를 괜히 몬스터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니까. 또 혹시 모르지. 6서클 대마법사가 나타나면 테이밍을 할 수는 있을지도.”
“6서클이면 가능합니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노와 마찬가지로 안타까워하던 이지호가 물었다.
세은은 이지호에게 말했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6서클 대마법사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지금 가장 높은 서클의 마법사가 4서클입니다.”
“5서클과 6서클은 그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6서클이 생기면 그나마 제가 믿고 동료로 삼을 수 있을 정도네요.”
“그 정도입니까?”
세은의 말에 이지호가 깜짝 놀랐다.
세은이 가르쳐 준 수련법 이후로 각성자들의 실력이 쑥쑥 늘어서, 사실 6서클이라 해도 큰 감흥이 있지 않았다.
세은이 알려준 수련법이라면 어렵지 않게 올라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은이 자신이 믿을 정도라고 하자 6서클이라는 단어가 다르게 다가왔다.
“단순히 6서클부터는 단순히 서클 하나의 차이가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이지호와 대화를 주고받던 세은이 숲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는 더 주의해서 따라오세요.”
방금 웨어 울프의 행동을 보고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일행들은 세은의 말에 잔뜩 긴장을 끌어 올린 채 뒤를 따랐다.
“이런 숲에 살 만한 몬스터가 뭐가 있더라…….”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 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멈췄다가 가죠.”
세은이 결국 잠시 멈춰서 제대로 기감을 탐지하려고 뒤를 돌았을 때였다.
쾅!
갑자기 울창한 나무 위에서 커다란 물체 하나가 뛰어내려 세은을 덮쳤다.
“뭐야? 재규어?”
세은은 담담하게 자신을 덮친 몬스터를 살펴보았다.
“재규어치고는 큰데요?”
이지호가 어마어마한 위압감과 크기를 자랑하는 몬스터를 보며 말했다.
통상 가장 큰 재규어가 거의 2미터의 몸길이를 자랑하기는 하지만, 지금 일행의 앞에 있는 재규어는 거의 그 두 배에 달하는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일단 눈앞의 재규어는 일반 몬스터와 느껴지는 위압감부터 달랐다.
거대한 앞발,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근육, 사람 몸을 가볍게 찢어버릴 이빨까지.
검은색 재규어는 그 위용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이 크기를 가지고 여태 숨어 있었단 말이야? 능력도 좋지.”
세은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재규어를 보며 중얼거렸다.
“개 다음 늑대, 마지막은 재규어라…… 완전 동물의 왕국인데요 여기?”
“하하하…….”
커다란 맹수가 침을 뚝뚝 흘리고 노려보고 있는 와중에도 태연하게 농담을 하는 세은의 모습에 사노와 스미스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눈앞의 재규어는 지금까지 본 어떤 몬스터보다 그 위용이 남달랐기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은은 여전히 태평한 모습으로 사노에게 말했다.
“자, 잘 봐. 게이트를 닫으려면 일단 이런 보스를 찾아야 해.”
“게이트의 보스가 거의 다 이럽니까?”
크와왕!
사노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재규어가 사납게 달려들었다.
“에일린, 홀리 웨이브.”
쿵!
하지만 그 정도에 당할 세은이 아니었다.
날렵하게 돌진하던 재규어가 세은이 만들어낸 신성력의 파도에 막혀 버렸다.
위잉―
그런 상황에서도 재규어는 포기하지 않았다.
“응? 얘 오러도 사용하네.”
재규어는 자신의 앞에 방어막이 생기자 발톱에 오러를 담아 휘둘렀던 것이다.
질긴 천을 찢듯 재규어의 발톱이 신성력의 파도에 살짝 구멍을 만들었다.
“이래서 광범위 방어 마법은…….”
재규어의 오러에 뚫린 홀리 웨이브를 보며 세은이 혀를 찼다.
물론 이 신성 마법도 오러 마스터 이하의 공격은 대부분 막아냈지만, 세은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파앗―
일단 한 번에 뚫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세은이 빛의 활을 만들어 시위를 놓았다.
파아앙―
그러나 재규어는 매우 날렵하게 세은의 홀리 애로우를 피했다.
“어쭈. 괜히 재규어가 아니네?”
팡― 팡― 팡―
“흐음…….”
그 뒤로 빠르게 화살을 연사했지만 재규어는 여유롭게 세은의 공격을 피해냈다.
오히려 피하는 와중에도 신성력의 파도에 자신의 발톱 자국을 더 만들어냈다.
“여기서 가만히 있어요.”
세은은 결국 화살로 재규어를 요격하는 것을 포기한 뒤, 손에 빛이 검을 만들어 쥔 채 뛰쳐나갔다.
챙!
그러나 재규어는 이번에도 나름 여유 있게 오러를 품은 발톱으로 세은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고양이 새끼가 귀엽네.”
예상외의 상황에 세은이 눈가가 반달로 휘었다.
슬슬 짜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카아왕!
재규어가 자신감을 얻었는지 이번에는 세은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세은은 재규어의 공격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녀석의 공격을 맞받을 준비를 했다.
세은이 자세를 살짝 낮추고, 재규어가 달려드는 타이밍을 쟀다.
사악―
그리고 재규어가 달려드는 순간 빛의 검에 신성력을 집중해서 재규어의 미간을 중심으로 세로로 갈랐다.
푸아악―
세은을 물기 위해 달려들던 힘까지 더해져 재규어는 부드럽게 반으로 갈렸다.
너무 깔끔하게 반으로 갈려 원래 그렇던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
그리고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사노와 스미스는 이번에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저걸 한 방에?”
“이게 가능합니까?”
“하하. 하지만 이것도 세은 씨의 힘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사노와 스미스에게 이지호가 말했다.
“지금 이 방어막도 그렇고 말입니다. 세은 씨가 숲이라서 자제한 겁니다.”
“왓?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지금으로도 충분히…….”
이지호가 사노의 말을 끊었다.
“충분하죠. 그러니 제가 여기서 거짓말을 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지호와 사노가 그렇게 얘기를 하는 중에, 세은은 재규어의 시체에서 나온 마정석을 줍고 있었다.
이전 거대 거미에게서 나온 마정석보다 더 크고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정석이 계속 나오네…….”
이계에서나 보던 광물이 자꾸 나오자 세은은 생각에 잠겼다.
‘이게 왜 자꾸 나오지?’
여태까지는 마왕들 때문에 마계와 이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왕들과의 대화를 잘 생각해보면, 그들이 게이트를 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게이트에 무엇인가 다른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다음 게이트는 시간이 되면 제대로 조사해 봐야겠어.’
자꾸 이런 일을 반복하느니 가능하면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멍청하게도 미국에서는 오러를 심장에 쌓는다고 하니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나가서 수련법을 다른 나라에 제공하는 사안을 이지호와 의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나가죠.”
재규어가 죽은 자리에 생겨난 출구를 보며 세은이 말했다.
그때까지도 서로 대화를 하고 있던 사노와 이지호는 세은이 먼저 게이트를 나서자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 * *
“오, 다시 입구로 오는 겁니까?”
게이트에 생성된 포탈을 타고 나오자 다시 들어왔던 입구인 화성행궁의 봉수당으로 나오게 되었다.
세은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제 게이트를 닫는 건 간단해.”
우우웅―
세은의 손에서 정형화 되지 않은 빛무리가 모이기 시작했다.
세은의 미간에 그려진 금이 하나둘씩 늘어날 무렵, 갑자기 세은이 손에 모인 신성력을 게이트의 출구로 쏟아부었다.
키이잉―
무엇인가 긁히는 소리가 나며 게이트가 눈앞에서 빠르게 소멸되었다.
“자, 이러면 끝이야.”
세은은 손가락 끝으로 미간에 생긴 주름을 꾹꾹 눌러 피면서 말했다.
사노는 이번에도 눈을 크게 뜨고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평생 오늘만큼 자주 놀란 적은 없었다.
“이, 이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사노는 힘겹게 뒷말을 꺼냈다.
“저희는…… 불가능한 방법이군요.”
“그렇지.”
세은이 사노의 말에 담담하게 긍정했다.
“미스터 도!”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털어 정신을 차린 사노가 세은에게 말했다.
“저희를 도와주시기를 이렇게 바랍니다.”
동양식으로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며 부탁하는 사노를 따라 뒤늦게 스미스도 허리를 굽혔다.
도저히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오늘 하루 동안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세은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대답하기보다 다른 것을 먼저 물었다.
“그런데, 야쿠자들은?”
세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세은의 실력을 본 사노는 그 모습이 웃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