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8. 그럴 생각이 없는데(2)
“참, 세은 씨. 이제 말 편하게 할까요. 우리?”
소진이 아는 가로수길의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 소진이 세은에게 물었다.
세은은 별다른 표정 없이 대답했다.
“편한 대로 하세요.”
“그럴까요? 그럼 나도 편하게 할 테니 세은이도 편하게 해.”
“그래.”
‘이이. 진짜 완전 여우라니까.’
소진과 세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채연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까 전에 안보원에서 이지호에 의해 알게 된 미국 얘기였다.
“오빠! 그런데 정말로 왜 미국은 안 만나는 거예요?”
소진도 그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에 채연을 따라 세은에게 물었다.
“맞아. 미국은 각성자 전력으로도 세계 1위일 정도로 막강한 곳이야. 알아서 손해가 될 일은 없는데 말이야.”
세은의 입에서 나온 건 둘을 허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귀찮아서.”
“겨우 그런 이유로요?”
“미국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지 않을까? 이 실장 말처럼.”
“자기들이 가만히 안 있으면 뭐 어떻게 해.”
“그, 그렇기는 한데요.”
“그렇기는 하지.”
채연과 소진은 세은의 능력을 상기해 내고는 대답했다.
확실히, 세은의 능력이라면 그 누가 덤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게 확실했다.
“그리고 분명히 걔들 말 들어주면 미국에 가야 할 텐데. 그럼 부모님에게 다 말해야 하고. 그럼 부모님이 걱정하셔서 싫어.”
전혀 상상도 못한 이유에 채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부모님이요?”
“왜 그렇게 놀라?”
“아, 아니요 그냥. 그런데 오히려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지 않아요?”
“우리 부모님은 내가 뭐하는지 모르시는데?”
“왜요?”
“말을 안 했으니까.”
“왜 말을 안 했어요? 부모님이 자랑스러워 하실 텐데?”
그러나 더 이상 대답하기 귀찮아진 세은이 채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세은이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느낀 채연도 더 이상 세은에게 묻지 않았다.
“식사 다 했으면 차 마시러 갈까?”
모두가 식사를 거의 마친 것을 확인한 소진이 세은에게 물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차를 꽤나 즐기던 세은이 소진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좋아하는 것 같네.’
소진과 채연의 정보에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세은이 이지호에게서 전달받은 포상금으로 먼저 계산을 마쳤다.
“어? 내가 사려고 했는데.”
“됐어.”
“그래도 목숨값이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사게 해주지.”
소진은 이미 계산을 끝낸 세은에게 아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다음에는 꼭 내가 살게.”
식사 속도를 맞추느라 꽤 오랜 시간 실내에 있어서 답답했던 세은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갔다.
* * *
끼이이익―
세은이 가게를 나서자 갑자기 온통 검정색으로 선팅 된 차 두 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도세은 씨 되시죠?”
한 차에서 두 명씩. 총 네 명의 남자가 세은의 앞에 섰다.
그중 가장 먼저 차에서 내린 남자가 세은에게 물었다.
“…….”
세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남자를 응시했다.
세은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남자가 세은에게 말했다.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남자는 한 손으로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세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해서 그런 거라 생각한 남자가 선글라스를 손끝으로 추켜올리며 다시 말했다.
“차에 타시죠. 도세은 씨.”
“이게 무슨 일이에요?”
“누구야?”
마침 가게에서 나온 채연과 소진이 그 모습을 보고 세은에게 물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두 여자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미국이 벌써 움직였나?’
세은은 아까 전에 들었던 이지호의 제안을 떠올렸다.
세은이 생각에 잠겨 있자 남자는 강제로 그를 데려갈 생각으로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같이 가지.”
덩치 큰 장정 셋이 세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며 거리를 좁혔다.
갑작스럽게 번화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채연과 소진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철썩―
남자의 손이 세은의 팔에 닿으려고 할 때 세은이 그의 손을 쳐 냈다.
찰진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이이?”
아프지는 않지만, 갑작스런 행동에 기분이 나빠진 남자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남의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라. 기본적인 예의도 안 배웠나?”
“그러던 너는 사람이 얘기하는데 대답도 안 하더군.”
세은의 말에 처음 세은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말에 세은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미국인가?”
“알면서도 이런 태도인가? 간이 부었군.”
“너희들 일 정말 병신같이 처리하네.”
“뭣?”
세은의 도발에 손등을 맞은 남자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세은은 몇 마디를 더 이어 나갔다.
“적어도 상대방에 대해 제대로 모르면 정중해야 할 거 아냐.”
“알만큼 알고 있지. 이름 도세은, 나이는 스물넷. 게이트를 소멸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 마나와 오러 수련법을 한국에 알린 당사자.”
“알 만큼 아네. 그런데 이래?”
“아니까 이렇게 오는 거네. 이래 보여도 다들 한가락씩 하는 친구들이야.”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의 말에 세은의 얼굴에 걸린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방금 전에 자신을 잡으려던 남자의 손을 쳐 냈던 세은의 손이 천천히 가운데 손가락을 꼿꼿이 세웠다.
“지랄. 그걸 아는 놈들이 이래?”
“퍽킹!”
세은에게 손등을 맞았던 남자가 결국 참지 못하고 세은에게 달려들었다.
남자의 손에서 파란색 오러가 타오르고 있었다.
세은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남자가 그를 제지하기도 전에 세은은 그의 팔을 잡아서 가볍게 제압해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모두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귀로 세은의 싸늘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게이트 소멸에 내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소멸시켰는지 조사를 더 했어야지.”
세은의 눈에 가소롭다는 감정이 여과 없이 투영되어 있었다.
이지호에게 알아서 보고하라고 할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어차피 한 번 정도 보여줘야 될 문제였다.
그렇지 않은 채 어물쩍 넘기면 귀찮아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세은에게 있어 차라리 이 편이 훨씬 편했다.
“뭐해? 들어와?”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세은의 도발에 남자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잡아!”
방금 세은에게 제압당해 넘어진 남자를 제외한 두 명이 세은에게 달려들었다.
둘 다 오러 사용자인지 양손에 오러를 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을 상대하는 일인데다, 번화가라서 무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 판단한 것 같았다.
퍽!
그러나 세은에게 맨손으로 달려든 대가는 참혹했다.
“컥!”
신성력이 담긴 단 한 번의 손짓에 먼저 주먹을 휘둘렀던 남자의 팔이 바깥으로 튕겨나갔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히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고통에 찬 소리를 냈다.
그 와중 한 명이 용케 세은에게 가까이 달라붙어 주먹을 휘둘렀다.
이미 두 명의 동료가 당했다. 우습게 볼만한 놈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퍼억―
그러나 그런 남자의 집중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제압했다.
다급하게 마법을 캐스팅하려고 하던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세은이 가볍게 신성력을 이용해서 그의 목을 부여잡았다.
“커, 컥…….”
목젖이 눌려서 숨이 콱 막힌 남자는 자연스럽게 캐스팅이 취소되었다.
남자의 마법이 취소되자 목을 부여잡았던 손을 풀었다.
“…….”
남자는 목을 자유롭게 풀리고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헐, 대박. 싸운다. 싸워.”
“와. 저 몸으로 덩치 네 명을 이기네?”
지나가던 민간인들이 보기에 그냥 싸움으로 보일 정도였다.
세은이 너무 유려하고 부드럽게 네 명을 순식간에 제압한 것이다.
세은은 더 이상 남자들에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타고 온 차로 다가갔다.
아직 숨이 조금 막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남자는 세은이 자신들의 차로 다가가자 그를 바라보았다.
콰직―
손에 신성력을 두른 세은이 가볍게 차의 보닛에 바람구멍을 만들었다.
“……쉣”
그 모든 걸 지켜본 남자, 조니 스미스의 눈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런 남자를 힘으로 데려가려고 했다니.’
왜 한국 정부에서 알아서 해도 된다고 했는지 스미스는 알 것 같았다.
정확한 정보를 요구해도 신빙성 없는 보고서만 줬을 때 알아차려야 했다.
보고서의 내용이 너무 터무니없어서 영웅을 만들기 위한 단순한 조작이라 생각했다.
거기에 만약 보고서가 사실이라면 그렇게 흔쾌히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너무 간도 쓸개도 빼줄 것 같은 한국 정부 놈들의 행동에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실 그의 예상은 전부 틀렸지만, 스미스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생각이었다.
“멋있어…….”
처음부터 그 모습을 끝까지 보고 있던 채연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보기에 세은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질 줄 알았다.
그런 세은의 모습이 점점 더 멋있게 느껴졌다.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하려고 하지?’
그러나 순수하게 감탄하던 채연과는 달리, 소진은 앞으로의 일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미국에서 어떻게든 다시 행동을 취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세은이 누군가에게 당할 것 같지는 않지만, 세상에 정공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채연과 소진이 각각 같은 장면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세은 역시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흐음.”
가볍게 손가락으로 보닛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세은이 스미스에게 물었다.
“뭐 할 말 있어?”
“어, 없다.”
“그리고 보니까 네 명 다 한국인인 거 같은데 말이야.”
“웃기지 마라. 나는 미국인이다.”
한국인인 것 같다는 말에 스미스가 발끈했다.
재미 교포 3세인 스미스는 사상은 온연히 미국인이었다.
“하긴 발음이 좀 이상하긴 하네.”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린 세은이 어차피 상관없다는 듯 스미스에게 통보했다.
“하여튼, 다시 오는 건 상관없는데. 그때는 좀 사람 없는 데서 와. 그래야 제대로 한바탕 하지. 알았어?”
“뭐, 뭣?”
“왜? 뭘 그렇게 놀라?”
자신의 말에 놀란 스미스를 보며 세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네 명 당했다고 너희가 정중하게 오겠어? 올 거면 와도 돼. 대신 사람들 없는 데서 들어와.”
‘지, 진심이야.’
세은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싸늘하게 식어서 냉정하게 스미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귀찮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짜증과 분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세은의 눈을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던 스미스는 그의 말이 허세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심이란 사실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자, 일 끝났으면 꺼져. 소화시키러 가야 하니까.”
세은의 말에 스미스가 조심스럽게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들은 부러지거나 금이 간 팔을 부여잡은 채 타고 온 다른 차에 탑승했다.
힐끔.
팔이 멀쩡한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에 스미스는 운전석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차에 타기 전 무엇인가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세은을 바라보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해보라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잠깐 입술을 달싹거리던 스미스는 결국 포기하고 차를 몰아 현장에서 벗어났다.
“흠…… 차에 괜히 구멍을 냈나. 하는 짓 보니 괜히 짜증나서…….”
세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돌려서 자신을 기다리던 채연과 소진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