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8. 그럴 생각이 없는데(1)
안보원의 분위기는 의외로 좋았다.
아무리 안드라스의 권능 때문이라지만 서로가 죽였다는 사실을 보고서로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이트 레이드에 참여했던 일행들의 동의하에 모든 책임을 안드라스에게 돌렸다.
“드, 드디어!”
안보원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마나 링을 생성하게 된 마법사가 환희로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세은은 한라산 게이트 사태 이후로 안보원에서 마법사들과 오러 사용자들의 마나 링과 오러 홀 생성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도와줄 수는 없었지만 이지호에게 부탁해서 한국의 모든 각성자들에게 생성 방법을 알리도록 부탁도 했다.
게이트의 수준은 천차만별.
허나 적어도 현재의 능력자들로서는 가장 간단한 리치의 게이트조차 해결하지 못할 것이었다.
“세은 씨! 오늘도 반가워요!”
“오빠! 저 왔어요!”
안보원의 수련장에 두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화사한 공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반사적으로 수련을 하던 모든 남자들의 고개가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남자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서채연과 김소진이 있었다.
“어휴…….”
두 여자의 모습을 봤던 세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알게 모르게 두 여자의 사이에 껴서 벌써 며칠을 시달리다 보니 반사적으로 나오는 한숨이었다.
그러나 그런 한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채연과 소진은 단숨에 세은의 앞으로 다가왔다.
“세은 씨 덕분에 우리 길드원들도 많은 발전을 보이고 있어요. 감사해요.”
“오빠! 어제 오빠가 알려주신 오러 운용법 말인데요. 살짝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신의 얘기를 하는 둘의 모습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각성자들의 두 눈에 부러움이 깃들었다.
그러나 이지호에게 단단히 사전 교육을 받은 덕분에 부러움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세은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자인지 어렴풋이 알고들 있었다.
‘역시 남자는 능력이 있고 봐야…….’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에 세은이 둘에게 말했다.
“마침 일이 끝났으니 이동해서 얘기해요. 채연이 너도.”
“네네. 커피 마시러 갈까요?”
“세은 씨가 편한 대로 하세요.”
세은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채연과 소진을 데리고 안보원 내에 있는 카페로 이동했다.
“오빠! 아이스 아메리카노죠?”
채연이 먼저 카운터로 가서 자신이 마실 카페모카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카페 라테도 한 잔 주세요.”
선수를 빼앗긴 소진이 자신의 음료를 따로 주문한 뒤 테이블에 앉았다.
지금은 국가안보원 전체 수련 시간이라 카페는 한산했다.
세은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채연과 소진은 그런 세은을 둔 채 서로 기세 싸움을 하고 있었다.
“주문하신 음료 세 잔 나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음료가 나오고서야 세은의 시선이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오빠, 많이 피곤해 보여요.”
“그래?”
“일이 너무 과중한 거 아니에요?”
“그런가?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러게요. 세은 씨 처음 봤을 때 보다 조금 홀쭉해진 거 같아요.”
채연과 세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진이 타이밍 좋게 대화에 난입했다.
“다른 사람들 도와주시는 것도 좋지만, 건강도 챙겨가면서 하셔야죠. 전에 약속한 고기 오늘 사드릴게요. 오늘 시간 어때요?”
세은은 담담히 대답했다.
“딱히 약속은 없는데요.”
“어머. 잘됐네요. 그럼 오늘 저녁에 제가 잘 아는 곳으로 가요.”
“고기요? 약속이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채연이 물었다.
“대체 언제 그런 약속을 잡았어요?”
“흐응…… 글쎄? 언제 잡았을까?”
가벼운 승리감에 소진의 눈가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물론 채연이 보기에 소진의 웃음은 여우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게이트에서 지하에 빠졌을 때. 미안하다고 사주기로 했어.”
세은의 말에 데이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살짝 안도한 채연이 말했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저도 고기 좋아해요.”
“우리 둘 약속이라서 조금 곤란한데?”
소진이 채연을 살살 약 올리며 말했다.
“오빠가 된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세은 씨야 착하니까 안 된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럼 된 거죠. 뭐.”
세은은 그런 둘의 대화를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둘이서 알아서 하겠지.’
여기서 세은이 누구의 편을 들어봤자 나중에 더 귀찮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적당히 개입할 순간이 오기 전까지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둘의 대화는 갑자기 세은을 찾아서 나타난 이지호 덕분에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중단되었다.
“세은 씨! 여기 계셨군요.”
이지호는 꽤 급하게 세은을 찾아왔는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후우.”
잠시 숨을 고르고 땀을 가볍게 훔쳐낸 이지호는 세은에게 말했다.
“혹시 전에 드렸던 말 기억하십니까?”
“무슨 말이요?”
“미국에서 세은 씨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 말입니다.”
“아, 그거요?”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 때문에 지금 위에서 세은 씨를 뵙고자 합니다.”
“왜요?”
이지호의 말에 세은의 두 눈에 귀찮음이 가득 깃들었다.
꽤 오랫동안 세은을 상대한 이지호는 이것이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세은 씨가 위의 답답한 놈들보다는 말은 통하니까…….’
잠시 세은과 정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말이 잘 통하고 융통성이 있을지 저울질한 이지호는, 세은을 설득하는 방향을 택했다.
그리고 한라산 이후로 세은의 태도가 더 협조적으로 변한 것도 이런 이지호의 태도에 힘을 실어주었다.
“미국에서 정식으로 세은 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정부에 공식으로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요?”
“그것 때문에 위에서 세은 씨를 우선 만나고 싶어 합니다.”
“거절한다고 전해주세요.”
“그, 그게…….”
예상은 했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단박에 자르는 세은의 대답에 이지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사실 윗선에서 세은 씨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은 꽤 됐습니다. 마나 링과 오러 홀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세은 씨라고 하니 당연히 관심을 갖더군요.”
“저라고 밝혔습니까?”
이지호의 말에 세은이 물었다. 그의 말투에는 짜증이 가득 서려 있었다.
꿀꺽.
이지호의 목젖이 크게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세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지호가 황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어, 어차피 제가 발견했다고 해도 믿지 않았을 겁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잠시 이지호를 바라보던 세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우…….”
한숨을 크게 내쉰 세은은 이지호에게 말했다.
“만날 생각 없으니 잘 처리해 주세요. 당장 우리나라 각성자들조차 수련이 제대로 안 되는데, 외국에 알려준다 해봤자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각성자들이 숙련이 되면 조교 형식으로 파견하겠다고 해요.”
어느 분야나 처음 입문 할 때는 바르게 이끌어주는 길잡이나 스승의 역할이 제일 중요했다.
세은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이었다.
지금 딸랑 방법만 외국에 전수한다고 한들, 제대로 마나 링이나 오러 홀을 생성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재능이 뛰어난 몇 사람뿐일 게 자명했다.
그리고 막상 생성한다고 해도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거기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나마 직접 나서면 안보원 인원 정도는 챙길 수 있었다.
“그게…… 미국에서 수련법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예상치 못한 이지호의 말에 세은이 다시 되물었다.
“미국에서는 그냥 세은 씨 자체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이죠?”
“그러니까 세은 씨를 임대하고 싶어 합니다.”
“아, 저를 물건 취급하는 건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어이가 없는지 세은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세은이 웃는 것이 웃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이지호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뉴스 같은 걸 봐서는 미국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고……. 사양하겠습니다.”
“그, 그래도 한 번만 만나주시면…….”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상시가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국익을 위해서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세은 씨가 계속 거부하셔도 위에서 난리를 칠 텐데…… 그럼 아마 더 귀찮으실 겁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긍정을 표하는 세은의 말에 자신의 설득이 조금은 먹히는 것 같아 이지호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세은의 말은 그런 이지호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트렸다.
“오라고 하세요. 당장 안보원 소속 가르치기도 바쁩니다. 데려갈 수 있으면 데려가라고 하세요. 미국에다가.”
“…….”
할 말이 없어진 이지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에다가 이렇게 보고 하면 필시 윗선은 미국 측에다가 알아서 데려가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그러나 윗선과 미국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건 바로 세은의 능력.
이지호는 절대로 미국이 세은을 데려갈 수 없을 거라는 것에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 앞으로 벌 월급과 연금까지 걸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 세은을 더 설득하는 게 힘들어 보였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세은 씨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보고 하겠습니다.”
“중간에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고양이가 쥐를 생각해 주는 것 같았다.
세은의 말에 이지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좀 도와주지 그래.’
그러나 속마음과는 달리 이지호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하하,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죠. 이미 충분한 도움을 주고 계신데요.”
사실 세은이 국가에 엄청난 도움을 준 건 맞다. 그 때문에 기실 아예 마음에 없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 능력을 완전히 공개한 뒤, 적극적으로 국가의 이익을 위해 나서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은 남았다.
‘국제 각성자 협회가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에 도와주면 좋을 텐데.’
전 세계적으로 각성자를 관리감독하기 위한 국제기구인 국제 각성자 협회가 슬슬 각성자들의 능력에 기준을 제정하고, 각 국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게이트에 대한 등급까지 기준을 만들고 있었다.
각성자들과 게이트의 분류를 통해 더 효율적인 대처를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한국의 각성자들 수준은 여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적인 숫자에서 밀려서 크게 힘을 쓰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거기다 정부에서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눈치를 보며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느라 초창기에 참가를 하지 못했기에, 그만큼 지분이 적었다.
“그럼, 결과가 나오면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용무를 마친 이지호가 위에 보고를 하기 위해 떠나가자,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채연과 소진이 세은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미국에서 오빠를 찾아요? 그런데 왜 안 만나는 거예요?”
“역시 세은 씨 같은 사람이면 어디서나 알아보네요. 미국과 알고 지내면 좋을 거예요.”
‘귀찮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두 여자의 질문 공세에 정신이 없어졌다.
세은은 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좀 이르지만 저녁 먹으러 갈까요? 잘 아는 가게가 어디예요?”
소진이 질문을 멈춘 채 재빨리 대답했다.
“아! 가로수길에 있어요. 제 차 타고 같이 가요.”
“오빠! 저는요?”
“어차피 밥 먹는 건데 같이 가. 밥은 다 같이 먹어야 맛있지.”
“그렇죠? 헤헤.”
채연의 표정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반대로 소진의 표정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일단 일어나죠.”
채연이 아직 반도 마시지 못한 음료를 들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세은이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채연과 세은은 틈을 타서 다시 기 싸움을 시작했다.
“어머. 다른 사람의 약속에 끼어들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요?”
“보니까 데이트도 아니던데요. 뭐 어때요?”
“남녀 둘이서 만나면 데이트죠. 그 정도 눈치도 없어요?”
“데이트면 같이 가자고 하지도 않았겠죠.”
세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언쟁을 주고받던 둘은 세은이 정리를 끝내고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에 미소를 씩 지었다.
“그럼 가죠.”
세은의 말에 소진과 채연이 가로수길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