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2. 마왕 단탈리안(3)
단탈리안의 등장과 동시에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던 흑마법이 멈춘 상황이었기에, 세은은 바로 공격 마법을 캐스팅 할 수가 있었다.
“에일린.”
자신을 처음으로 이계로 소환하고, 신성력을 주었던 여신의 이름을 읊었다.
믿음에서 기반하는 신성력은, 실제로 그녀를 만나본 적 있는 세은에게 있어 완벽한 힘이었다.
에일린이 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는다면, 누구나 그녀의 신성력을 사용할 수가 있으니까.
특히, 존재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으므로써 의식의 바깥까지 이름을 각인할수록 더 강한 신성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삼세 번은 없는 거 알지? 다시는 보지 말자.”
세은의 주변에서 막대한 신성력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신의 심판이군요.”
단탈리안은 세은이 준비하는 마법이 전에 자신을 소멸 직전까지 몰고 갔던 신의 심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단탈리안의 표정에는 긴장한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괜히 세은이 오는 것을 예상해, 손님 맞이할 준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자, 그전에 이걸 보시죠.”
너무 태연한 단탈리안의 말에 자연스럽게 세은의 시선이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이런, 거기서 뭐해?”
세은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들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흑마법에 갇히느라 떨어졌던 일행들이 결계 바깥에 잡혀 있었다.
일행은 계속 뭔가를 외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갇혀 있는 흑색 반구체의 효과인 거 같았다.
“어떠십니까? 일행인 것 같은데요.”
단탈리안의 입이 음흉하게 치켜 올라갔다.
이래서 이 새끼가 제일 혐오스럽다니까.
하지만 세은은 이내 다시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너한테 끌려 다니다가 다 같이 죽는 것보다, 네가 먼저 죽는지 저들이 먼저 죽는지 시험해 보는 게 더 나은 선택지네.”
세은의 말이 밖까지 들리는지 단탈리안보다 오히려 채연을 비롯한 일행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단탈리온은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얼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끄는 시간은 제게 유리합니다.”
“그게 무슨 개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단탈리안의 말에 대답하던 세은의 말이 중간에 뚝 끊겼다.
결계의 사방에서 흑마력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또 다시 방심.
단탈리온이 고작 흑마법을 몇 번 쏟아내기 위해 이런 결계를 설치했을 리가 없었는데.
“당신의 표정이 가장 황홀했던 시절로 돌아가 볼까요?”
단탈리안의 말을 시작으로 세은을 가두고 있던 결계가 순식간에 뒤바뀌기 시작했다.
잠시 일그러져서 일렁이던 흑마력은 점차 형태를 이루어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냈다.
맑다 못해 청명한 하늘, 상쾌한 공기, 지구와는 살짝 다른 식물들.
그리고…….
“성하…….”
“드빈?”
세은의 발밑에서 한 남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꼭…… 여신의 뜻을…….”
드빈의 입가에 새빨간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드빈의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덩그러니 뚫려 있었다.
이계에서 교황으로 있을 때 마계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된 이후 얼마 안 돼 벌어진 일이었다.
“하아. 지금 생각해도 추기경의 피 맛은 각별했습니다.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어느새 다시 허공에 나타난 단탈리안이 말했다.
“이때가 제일 슬프셨나 보군요? 제 환영이 당신을 이리로 인도한 것을 보니까.”
환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세은은 무릎을 꿇어 드빈의 옆에 앉았다.
“드빈…….”
마지막으로 세은에게 뻗어오던 드빈의 덜덜 떨리던 손은,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중간에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완전히 감기지 못한 드빈의 두 눈을 세은은 손을 뻗어 닫아주었다.
세은을 가장 열심히 보좌하고, 그가 교황으로서 책무를 다할 수 있게 만들어준 유일한 사람이, 그렇게 또다시 눈앞에서 사그라져 갔다.
단탈리안의 환영은 촉감과 후각 모두 실제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똑같았다.
“그때 이후로 제 목표가 교황의 피 맛을 보는 거였죠. 추기경이 그 정도였는데 교황은 얼마나 맛있을까?”
“…….”
피웅―
순간 단탈리안을 노리고 세은의 손에서 신성력이 발사됐다.
그러나 단탈리안의 환영은 그대로 신성력을 맞아 반으로 절단되고도 다시 스르르 복구를 하며 계속 말했다.
“당신에게 패배해서 마계로 역소환된 후에 많은 고민을 했죠. 이 책의 도움도 받고요. 그리고 당신에 대해 드디어 알 수 있었습니다.”
“죽는다.”
언제나 무심하던 세은의 검은 눈이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그런 세은의 눈을 무시하고 계속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은 너무 인간적이죠. 보통의 인간들보다 훨씬 더 말입니다. 그래서 에일린, 그년이 당신을 선택했을지도 모르지만요.”
크지는 않았으나, 단탈리안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 내게 잡힌 인간들이 죽든지 말든지 저부터 죽이고 본다고요?”
피처럼 새빨간 단탈리안의 입술이 잔인하게 휘어들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당신의 허세. 잘 봤습니다.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군요. 역시 여신의 개답습니다.”
“미친 새끼.”
아무리 봐도 마왕 중에서 단탈리안이 제일 미친놈이 분명했다.
딱히 일행이 소중하지는 않았다.
그저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정도로 목숨을 경시하지는 않을 뿐이었다.
“한 가지 더 알려드릴까요? 게이트라는 것이 앞으로 더 많이 생겨날 것 같군요. 72마왕들의 영지를 제외하고도 여기저기 게이트가 무작위로 열릴 것 같아요.”
어때요. 걱정되지 않으신가요?
단탈리안의 입술이 더욱 선명하게 호를 그렸다.
“심지어 이 세계의 인간들은 허약하기 그지없더군요. 파괴, 죽음, 공포. 우리에게 아주 좋은 자양분입니다. 하하. 마치 마계의 정복 과업을 위해 만들어진 곳 같습니다.”
흐음.
단탈리안이 공기를 즐기는 것 같은 행동을 취했다.
“거기에 이 공간 자체가 차원의 벽이 비틀어져서 생긴 여유 공간 같은 곳이기에, 익숙해지면 공간의 밖에서도 본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게이트 안에 쥐새끼처럼 처박혀 있었어? 그냥 나오면 나한테 뒈질 것 같아서?”
“쥐새끼라니요?”
단탈리안이 어깨를 으쓱함과 동시에 순식간에 청명하던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구름에서는 강력한 뇌전이 쉴 새 없이 빠직거리고 있었다.
흑마력으로 인해 검은색을 띄고 있는 뇌전은 보기에도 무시무시해 보였다.
“훌륭한 사냥꾼은 기다릴 줄을 아는 법이죠. 다른 무식한 놈들과 저를 비교하시면 곤란합니다.”
세은은 단탈리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환영을 아무리 공격해 봤자 소용이 없다.
환상 마법의 코어를 찾아 파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다만 뇌전의 방해를 이겨내야 했다.
거기에 단탈리안이 다른 수작을 부리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도 세은의 얼굴에는 긴장이라고는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물리쳐 본 상대에게 두려움을 갖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아직 덜 맞았지? 이 마조히스트 새끼야.”
세은은 또다시 시동어를 내뱉었다.
애초에 얌전히 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기억 깊숙이 묻혀 있던 안 좋은 추억까지 꺼내 보인 이상, 쉽게쉽게 끝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도발하려는 것이 목표였다면 단탈리안은 더할 나위 없이 성공했다.
다만, 그 결과는 온전히 단탈리안이 책임져야 할 일.
그러나 확실히 마왕이 만든 결계라 바로 코어를 찾는 것은 무리였다.
세은은 단순하게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은이 손을 내밀었다. 신성력이 손바닥 위에서 화려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세은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신성력이 그를 보호하듯이 주변을 맴돌았다.
콰앙! 콰앙!
마법이 완성되기 전을 노려 뇌전이 세은을 향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귀를 찢는 굉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깊게 파인 구덩이에서는 흙먼지가 잔뜩 피어올랐다.
“에일린. 신의 심판.”
뿌옇게 일어난 먼지로 인해 잘 보이지도 않는 구덩이 안에서 세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성력의 배치가 끝나고 발동을 시작하자 갑자기 하늘이 반으로 갈라졌다.
아니, 하늘을 가리고 있던 뇌전의 구름이 갈라지며, 그 위의 청명한 하늘이 다시 드러났다.
동시에 태양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와 세은의 손에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아마 사람이 있었다면 바로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을 정도의 열기였다.
이윽고, 세은의 손에 붉은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쥐어졌다.
여태까지 세은이 사용하던 빛의 검과는 전혀 다른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천벌.”
세은이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아무런 힘이 실려 있지 않은 간단한 행위였지만, 검끝이 땅을 향함과 동시에 연쇄적으로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미 단탈리안이 만들어낸 먹구름은 모두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세은의 시야가 닿는 모든 공간에 번개가 떨어졌다.
쾅, 쾅, 콰앙!
어딘가의 문헌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 세은의 손에 의해 구현되었다.
뇌전이 내려치고,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한 번 파인 구덩이는 더 깊게 파였다.
세은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멀쩡한 대지가 보이지를 않았다.
“땅은 아닌가?”
어차피 결계 안에서는 단탈리안을 잡을 수가 없다.
우선은 코어를 파괴하는 것이 우선 순위였다.
땅에는 코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세은은 다시 손에 쥔 검을 허공에서 빙빙 돌렸다.
이번에는 검을 따라 끝에서 신성력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회오리는 세은이 검을 돌릴수록 점점 강맹하게 세력을 키워 나갔다.
어느 정도 회오리가 크기를 갖추자 세은은 그곳에 성화를 부여했다.
“홀리 파이어.”
허리케인을 타고 불은, 점차 자신의 세를 부풀렸다.
불을 품은 허리케인은 마치 지옥에서나 볼 법한 모습을 하고 허공을 위협하고 있었다.
불이 완전히 허리케인을 삼키자, 허리케인을 중심으로 불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허리케인이 허공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땅이 아니면 허공에 코어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랜만에 전력을 다하려니 살짝 피곤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감히 자신을 농락한 단탈리안을 잡아서 소멸시켜야, 마음 편히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을 거 같았다.
‘설마 하늘도 아닌가?’
허리케인이 빈틈없이 하늘을 쓸고 지나갔지만, 이번에도 결계가 파괴되지 않았다.
세은은 고개를 돌려 코어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나름대로 조절은 했지만 신의 심판은 상당히 많은 신성력을 요하는 마법.
상대가 마왕이 아니면 사용할 필요가 없는 마법이기도 했다.
나가서 단탈리안을 순식간에 잡아서 농락하려면 최대한 많은 신성력이 있을수록 좋았다.
그때, 세은의 눈에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태양이 들어왔다.
세은은 속으로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남은 곳은 태양밖에 없었다.
그는 검을 휘둘러 태양을 향해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화염을 쏘아 보냈다.
어느새 허리케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쾅!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화염이 태양과 부딪히자 폭발음과 함께 세상이 천천히 지워지는 것이 보였다.
역시 태양이 코어였군.
결계에서 벗어난 세은의 손에서 비로소 검이 사라졌다.
신성력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취소한 것이었다.
단탈리안은 일신의 무력보다는 이런 결계를 이용한 마법이 주력인 마왕. 결계를 무산시킨 이상 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여전히 효율적이시군요.”
결계가 사라져 다시 탑으로 돌아온 세은의 귀에 단탈리안의 말이 들렸다.
준비한 결계가 파괴된 상황에서도 단탈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다만, 게이트라는 공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신 것 같습니다.”
단탈리안은 길게 말을 늘어놓았다.
“오피뉴도, 마계도 아닌 이 공간에는 차원의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무엇과도 잘 어울리죠.”
“또 무슨 개소리야?”
자신에게 달려들려 하는 세은의 모습에 단탈리안이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세은과 함께 게이트로 들어온 일행이 천천히 단탈리안의 흑마력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방금 전 환영에서 다시 마주했던 드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세은은 흠칫했다.
“이래서 당신이 안 된다는 겁니다.”
퍼엉.
잠시 세은이 흠칫한 그 틈을 타, 그의 머리 위에서 강렬한 마력이 폭사되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단탈리안의 마력에 세은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하! 이 새끼,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신 못 차렸네.”
동시에, 세은의 몸이 단탈리안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