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2. 마왕 단탈리안(2)
탑으로 들어간 일행의 시야에, 눈을 깜빡이는 그 잠깐의 순간, 화려한 실내가 나타났다.
“파티…… 장?”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고풍스러운 파티장에서 의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뜻밖의 풍경에 채연이 당황했다.
다른 사람들도 말은 안 했지만 게이트에서 나타난 파티의 광경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세은은 당황하지 않고 눈앞의 파티장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더러운 취향은 여전하네.”
72마왕은 모두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세은은 특히 단탈리안을 싫어했다.
불완전하게나마 미래와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도 거슬렸지만, 가장 기분 나쁜 건 상대가 가장 좋아할 만한 환영을 보여준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탈리안의 환영에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동물의 사체나 언데드들을 환영으로 바꾼 후 사람들을 홀리게 만든 다음, 순간 환영을 깨버려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게 특기였다.
“이런 게 안 통한다는 사실은 뻔히 알 텐데 말이야.”
세은은 신성력을 끌어올려 주위를 탐색했다.
환영의 규모가 큰 것을 보니 어딘가에 환영 마법진을 유지하는 코어가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마왕이어도 교황까지 현혹할 환상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저긴가.”
기감을 집중해 주변을 살피던 세은은 유난히 흑마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을 발견했다.
천장의 중앙에 달린 커다란 샹들리에의 중앙에 박힌 보석이 근원지였다.
순식간에 세은의 손에서 신성력이 휘몰아쳤다.
파티장에서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갑작스런 세은의 행동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무슨 짓이에요?”
사람들이 패닉을 일으킨 모습에 채연이 소리쳤다.
그러나 세은은 그런 채연의 말을 무시한 채 그대로 샹들리에의 중심에 신성력을 분출했다.
콰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휘황찬란하던 파티장의 배경이 순식간에 짙은 남색으로 물들었다.
휘황찬란하던 파티장의 풍경은 밋밋하고 음산한 돌탑의 내부로 바뀌어 갔다.
마치 페인트 통을 통째로 쏟아부은 것 같은 급작스런 변화였다.
방금 전까지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은, 어느새 각양각색의 몬스터와 언데드로 변해 있었다.
“헉?”
“이, 이게?”
너무 갑작스런 변화에 일행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세은을 향해 화살이 한 대 날아왔다.
“흐음. 아직 군단을 다 복구하지는 못한 것 같은데.”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고개를 까닥여 가볍게 피해낸 세은은 몬스터와 언데드들을 보며 말했다.
“언데드가 중심이군. 몬스터가 곁다리로 끼어 있고. 몬스터는 네임드급인가?”
같은 종족인 몬스터라도 간혹 더 강하게 태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몬스터들은 보통 끝까지 살아남아 한 부족의 지배자가 되는 일이 대부분이다.
거기다 그런 몬스터들은 다른 동족과는 다르게 신체에 특별한 표식이 있던 것이다.
아마도 단탈리안이 악마 군단의 수를 채우기 위해 네임드급 몬스터들을 지배하에 둔 것 같았다.
“이 정도 전력인데 왜 밖으로 안 나왔지?”
이 정도 전력이면 세은이 본 한국의 각성자가 전부 달려들어도 막아내지 못할 정도로 보였다.
만약 어찌어찌 막아내더라도 엄청난 피해가 예상됐다.
“인간이 아닌 놈들의 생각은 도통 알 수가 없다니까.”
어차피 이들에게 대답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단탈리안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우선 정리부터 해야겠네.”
세은이 중얼거리는 사이 몇몇 몬스터와 언데드가 이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은은 그런 놈들은 안중에도 없이 좁은 공간에서 사용할 만한 마법을 떠올렸다.
“크아악!”
몬스터와 언데드가 지척으로 다가왔을 때 세은은 적당한 마법을 하나 생각해 냈다.
“선 라이트.”
세은의 시동어와 동시에 신성력이 허공에서 빛나는 구체를 구성했다.
치이익―
신성력과 상극인 언데드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몬스터들은 언데드들처럼 맥없이 녹아내리지는 않았지만, 힘겨운 신음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폭발적인 파괴력은 없지만, 주변을 신경 써야 하는 상황에서 이보다 좋은 마법은 거의 없었다.
일단, 신성력인 만큼 흑마법사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은은 빛의 검으로 나머지 몬스터를 정리해 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직도 넋이 나가 있는 일행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참 쉽죠?”
“푸훗. 뭐예요, 그게?”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에 채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뭐가 나와도 세은이 처리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상황이었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인지 모두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이런 식으로 탑을 계속 올라갑니다.”
다음 층에도 몬스터들과 언데드들이 똑같이 나왔으나, 1층에서처럼 환영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세은은 반복되는 상황에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더 높은 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은은 어지간해서는 신성력이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여신인 에일린의 이름을 사용해 신성력을 증폭시키면, 저비용 고효율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반복인데?”
계속되는 반복 사냥에 세은과 일행의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그리고 문제는 바로 방심했을 때 찾아왔다.
“이번에도 먼저 올라갈 테니 잠깐 뒤에 따라 올라오세요.”
“알겠습니다.”
“네, 오빠.”
이번에도 별다른 생각 없이 먼저 상층으로 올라간 세은은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뭐지? 흑마법인가?”
아무런 변화 없이 반복되는 상황에 방심한 탓에, 탑을 올라가서 흑마법이 발동되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제대로 발동된 흑마법은 빠르게 세은을 뒤덮었다.
세은은 신성력을 끌어올렸지만 이미 발동되어 실체화를 끝낸 흑마법을 순식간에 취소시키기는 무리였다.
흑마력의 상극이 신성력인 만큼, 신성력의 상극 역시 흑마력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은의 신성력을 이겨내고 흑마법을 사용할 정도면, 최소 최상급 악마 정도는 되어야 했다.
이 탑에서 이 정도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
“단탈리안인가?”
마치 잠깐이라도 방심한 세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흑마력이 눈앞에서 넘실거렸다.
그리고는 사방으로 퍼지며 순식간에 외부와 격리된 사각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럴 시간에 그냥 나오는 게 어때?”
푸슈슉!
그러나 허공에서는 세은의 말에 대한 대답 대신 흑마력으로 구성된 화살더미가 날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숫자에 밀려 제대로 막지도 못할 상황이지만, 세은은 대부분의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피할 필요가 있나? 막거나 부수면 되는 걸.
그것이 교황으로서 힘을 각성한 후의 세은의 전투 스타일이었다.
일견 무식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아군에게는 용기를 주고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데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다만 지금의 문제는 사방에서 쉬지 않고 날아오는 흑마법을 막느라 이 공간을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안일했어.”
제대로 된 전투가 오랜만이었던데다, 방심한 탓에 쓸데없는 함정에 걸리고 말았다.
물론 함정에 걸렸다고 세은이 피해를 받는 일은 없지만, 자신과 떨어진 채연을 비롯한 일행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이 없으면 여태까지 고생한 일까지 전부 무용지물이 된다.
퍼퍼벅.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실드 위로 끊임없이 흑마법이 쏟아졌다.
아무런 피해는 없었지만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이렇게 더럽게 나온다 이거지?”
더 이상 맞아줄 필요를 못 느낀 세은은 방금 전까지 생각한 방법을 사용했다.
“다른 마법을 캐스팅하기에는 힘들고…….”
서열은 거의 바닥이지만, 마왕이 시전 하는 마법은 세은에게도 나름 매서웠다.
제대로 상대하면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던 놈들이, 이계에서 길게 애를 먹인 이유가 이런 거였다.
어떻게든 요상한 방법을 가져와서 세은을 끊임없이 괴롭혀 댔던 것이다.
특히 단탈리안은 이런 쪽에서는 거의 수위를 다퉜다.
“에일린. 홀리 프로텍트.”
시동어와 함께 증폭된 신성력이 사방에서 날아오는 흑마법을 밀어내며 방어막을 위로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높이가 높아질수록 방어막의 두께는 조금씩 얇아졌지만, 흑마법에 뚫리지 않았다.
결국 사각의 공간 천장까지 방어막을 채우는 것에 성공한 세은은 더욱더 신성력을 밀어넣었다.
“흐음…….”
이미 완벽하게 구성된 공간을 방어 마법으로 깨부수는 건 세은에게도 조금 힘이 드는 일이었다.
아주 버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힘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심지어 마계와의 마지막 전투도 꽤나 옛날 일.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이 정도로 힘을 사용할 일도 거의 없을 만큼 평화로웠다.
그렇게 어느 정도 더 힘을 밀어넣자 쩌적거리는 소리가 세은의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마법이든지 임계점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교황이던 세은은, 보통 방어에 특화된 신성력의 특징을 잘 사용해서 임계점까지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게 특기였다.
물론 마왕급이 아닌 경우,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가뿐하게 처리할 수 있지만.
쩌저적―
마법진에 금이 가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마법진이 파괴될 것 같은 상태였다.
그때 뒤에서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세은에게 들렸다.
“이런이런.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과격하시네요.”
목소리가 들리자 세은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나타남과 동시에, 세은을 사방에서 두들기던 흑마법도 멈췄다.
“여. 오늘은 중년 남자네?”
세은의 눈앞에는 검은 중절모에 멋들어진 콧수염, 정장까지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가 한 손에 커다란 눈이 살아 깜빡이는 책을 들고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예의 바르게 생긴 신사는 살짝 허리를 숙이며 세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시엘 에일린. 여신의 개여.”
“개라니. 이왕이면 귀엽게 강아지라고 해줄래?”
“여전하시군요. 그 뻔뻔한 입은.”
단탈리안은 잘 정돈된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책을 통해 예지를 했을 때도 믿지 못했습니다만, 당신이 이곳에 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군요. 거기에 다시 젊어진 것 같습니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잘도 살아서 또 헛짓거리를 하고 있잖아.”
“마계의 정복 과업을 헛짓거리라고 하시다니, 저희를 사사건건 방해하는 여신의 개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요.”
“방해는 니들이 하고 있잖아. 왜 사람이 좀 쉬려 하면 와서 깽판을 쳐.”
세은의 말에 단탈리안은 잠시 갸웃거렸다.
“분명 여기는 오피뉴가 아닐 텐데…… 쉬고 있다니 무슨 말입니까?”
“여기가 내 고향인데?”
세은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단탈리안은 알았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아아! 그렇게 된 거였군요. 저는 또 여신이 개를 풀었다고 생각했지 뭡니까.”
단탈리안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이 시엘 당신의 고향이라면 모든 게 이해가 됩니다. 왜 안드로말리우스가 역소환되었는지도 말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저번처럼 소멸 직전까지 가기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다 마계로 꺼져.”
“글쎄요.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단탈리안은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가볍게 펼쳤다.
책의 표지에 박힌 눈이 흉물스럽게 깜박였다.
“당장 얼마 후에 또 게이트가 열리겠군요. 누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계속 열리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세은은 단탈리안의 말에 침묵했다.
혐오스럽기는 했지만, 단탈리안의 예지는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단탈리안의 말대로라면 마계에서 직접 게이트를 연 것이 아니었다.
그럼 대체 게이트가 왜 생기는 거지?
“굉장히 무엇인가가 궁금하신 표정이네요.”
단탈리안의 말에 세은은 복잡한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게이트가 또 나타나면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더 이상 단탈리안에게 휘말리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이제 장난은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