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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225화 (완결) (225/225)

225화 후일담

어쨌든 그때 죽진 않은 모양이었다.

간호사들은 곧바로 담당의를 불러왔고,

“안심하세요. 어, 자세한 건 정밀 진단에 들어가야 알 수 있겠지만, 당장은 특별한 징후는 없는 것 같고. 일단은 안정이 우선입니다.”

긴장이 턱 풀렸다. 뺨을 꼬집으니 아픈 걸 보면, 살아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다가 문득 집 생각이 났다.

“저, 집에 전화를 좀 해야겠는데요.”

내 소지품은 병원에 고이 보관된 상태였다.

하지만 쓰나미에 휩쓸렸던 만큼, 휴대폰도 멀쩡했을 리는 없었다. 좀 돈을 들여서라도 방수 러기드 케이스라도 쓸걸.

“허, 최신폰 같은데 아깝네요. 바깥에 공중전화가 있긴 할 텐데, 일단 이거라도 쓰시죠.”

나는 오랜만에(?) 익숙한 손놀림으로 번호판을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의 스피커는 없는 번호를 의미하는 소리만 냈다.

“어…….”

잘못 누른 건가 싶어서 화면을 보니, 그건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기에, 나는 재차 같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대로였다.

내 행동을 지켜보던 의사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약간의 기억상실이 있는 모양이군요. 어차피 간호사들이 보호자 분께 연락을 넣었을 테니까, 그냥 쉬도록 하시죠.”

정말로 기억상실일까. 하긴 산소가 끊기면 뇌세포가 죽는다고 하니, 그게 하필 전화번호에 관한 거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주인에게 전화기를 돌려준 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2011년의 하늘은 꿈속에서 보았던 16세기의 것 그대로였다.

다행히 의사가 말해 준 대로, 원무실을 통해 곧바로 연락이 왔다.

한참을 통곡하시던 어머니께서는 바로 병원에 오시겠다고 말씀하셨고,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그리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       *       *

한창 인생이 꽃길을 걷기 시작할 때 죽었던 것이, 그것도 타국에 여행을 떠났다가 객사한 꼴이라 아쉬움이 없진 않았는데, 이렇게 살아 있었을 줄이야.

그럼 그 80년의 세월은 다 뭐였을까. 정말로 꿈이었나?

그랬다면 꿈 치고도 무척이나 긴 꿈을 꾼 셈이었다.

“정말 너 꼼짝없이 죽는 줄만 알았어.”

“아, 지진이 그때 터질 줄 어떻게 알았나요.”

어머니께서 사과를 깎아 주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고 계시지만, 진짜로 죽었다면 매우 슬퍼하셨겠지. 아버지도 내색은 안 하셔도 마찬가지셨을 거고.

동생 녀석은 뭐, 장담은 못하겠지만 가족이니 믿어는 보자.

“근데 나 며칠이나 기절해 있던 거야?”

“한 4일쯤인가? 너 실려 왔다고 연락 온 게……. 맞네. 오늘이 5일째야.”

어머니에게 연락이 갈 정도라면, 이미 한국으로 이송되었다는 이야기일 터였다.

“그럼 일본에 있었던 기간은?”

“일본? 여기잖니.”

“그럼 담당 의사랑 간호사 분들은 다 교포분들이신가……? 한국어 되게 잘하시던데.”

내 말을 들은 어머니께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셨다.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여기 센다이야. 저기가 너 휩쓸렸다는 데고.”

“어……?”

“기억상실이 있었다고 했지. 의사 선생님이랑 이야기 좀 해 볼까?”

“아,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나는 필사적으로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려야 했다. 연락을 받고 곧바로 달려오셨던 것도, 근처에 숙소를 잡아 둔 상태라고 하셨다.

“며칠 더 지켜보다가, 못 일어날 거 같으면 한국으로 이송하려고 했지. 일본 동국 지방은 물가가 꽤 비싸잖니.”

동국? 보통 간토나 한자 그대로 읽어서 관동이라고 부르지 않나?

뭔가가 이상했지만, 여기서 더 질문했다가는 다시 중환자실로 가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병실에 계속 머무르시겠다는 어머니를 겨우겨우 돌려보낸 뒤, 텔레비전을 틀었다.

과연 틀자마자 일본말이 흘러나왔지만, 채널을 돌리면 돌릴수록 내 기억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처음 몇 개 채널은 그대로 일본어로 방송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줄곧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화면 구석에 ‘洲本MX’의 로고가 띄워진 것을 보면, 틀림없이 일본 방송일 텐데, 진행자들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아니 잠깐, 주본? MX라면 도쿄 메트로채널 아니었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       *       *

텔레비전을 통해 대강의 풍속을 파악한 나는 병원의 인터넷 카페를 찾았다.

휴대폰이라도 멀쩡했으면 그걸로 확인을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뭐부터 찾아봐야 하나……?”

일단 짚이는 것은 내가 꾸었던 꿈이었다. 만약 그게 꿈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전국시대의 고니시 유키나가로 살았던 거라면?

“그럼 역시 고니시 유키나가부터…….”

검색을 시작했다. 결과의 가장 위에 떠오르는 것은 엔젤링 위키의 ‘고니시 유키나가’ 문서였다.

클릭해 보니 ‘소서행장’이라는 문서로 다시 연결되었다.

어차피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며 무심하게 넘겼는데, 이때 뭔가가 이상함을 알았어야 했다.

“어디 보자, 목차가…….”

[소서행장(少西行長)]

일본국 역대 공방……

천하를 분재한 사나이. 지금의 동아시아를 만든 거나 다름없다.

엔젤링 위키는 가끔 문서 종류에 따라 목차 전에 소개글이나 개드립 따위가 나오곤 했다.

그런데 이 문서의 소서행장은 일단 내가 기억하는 임진왜란의 선봉장이 아니었다.

“설마 내 행보가 그대로 역사로 변한 건가?”

2. 생애

2.1. 유년기

2.2. 가톨릭 선교사와의 접촉

2.3. 일본국 공방

2.4. 덴노를 신왕으로

2.5. 명나라 습격전

2.6. 삼국 우호의 기초를 쌓다.

2.7. 은거 이후

3. 평가

……

……

생애에 관한 부분은 내가 경험한 것들이 그대로 적혀 있어서 따로 깊게 살피지는 않았다.

몇 가지는 순서가 바뀐 부분도 있긴 했는데, 그 정도는 대충 학설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는 영역이었다.

보통 역사 관련 문서는 온갖 오류와 왜곡, 그리고 작성자의 아집으로 똘똘 뭉쳐 참독 못지 않은 해악을 세상에 뿌리는데, 의외로 내용이 충실했다.

그리고 대망의 평가 파트.

과대사천왕 킬러(취소선)

사실은 유키나가 본인이 과대대마왕?(취소선)

대강 이 두 가지 정도가 현대 위키러들이 과거의 내 행적을 보는 관점인 것 같았다.

“과대사천왕 킬러라……. 뭐 많이 죽이긴 했다.”

원래도 전국 과대사천왕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은 있었다. 아마 겐신과 신겐, 다테 마사무네, 시마즈 요시히로 정도인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거론했다.

일단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은 둘이 싸우다가 조기에 공멸해 버린 것 때문에 위상이 되레 올라간 상태였고, 과대사천왕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다테 마사무네는 그의 부친이었던 테루무네로 바뀌어 있었다.

나머지 셋은 오다 노부나가, 하시바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나머지 둘이야 내가 직접 썰거나 엿을 먹였으니 뭐 그렇다 치고, 노부나가는 조금 억울하려나…….”

싶었지만 생각해 보면 온갖 잘난 척은 다해놓고 결국 부하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대로 적절한 평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좀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원래 사람이 승승장구할 때는 약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노부나가 같은 경우는 야심만만한 둘째 아들과 몇몇 가신들이 그 약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도 혼노지에서 죽은 뒤에, 히데요시가 수습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오다 세력은 콩가루가 되었을 터였다.

그걸 감안하면 역시 과대사천왕 소리가 나올 법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분기점은 확인했고. 내가 아는 이야기들을 더 파 볼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몇몇 키워드를 뽑아내서 다시 검색을 돌렸다.

일단 고니시 가문의 사카이 쿠보는 10대까지 가 있었다.

5대째에는 선출직으로 바뀌었지만, 어떻게든 그 뒤를 아슬아슬하게 이어간 듯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아예 사카이 쿠보와 관련된 기록에서 고니시라는 성씨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원정사의 종소리, 제행무상의 울림 있… 기는 개뿔!”

중간에 선출직으로 바뀐 것 자체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원래 먹고사는 욕구가 해결되면 그 윗 단계를 보게 마련이니까. 그래도 카미나가라면 잘 대응해서 가문의 번영을 이끌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어찌어찌 잇다가 끊겨 버린 모양이었다.

아마 일개 국민으로라도 잘 살고 있으면 좀 좋겠는데.

고니시 자체를 찾아보면 상당히 많은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애초에 흔한 성씨이기도 했지만, 그들 중에서 사카이 쿠보의 후예를 찾기는 어려울 터였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둘째 녀석 쪽은 좀 나으려나?”

다음은 ‘코가 쿠보’와 ‘아시카가 츠키나가’라는 키워드를 검색했다.

다행히도 코가 쿠보는 그럭저럭 둘째 아이의 후손들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딱히 실권은 없는 명예직이 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명맥이 이어져 있다는 게 반가웠다.

대충 후손들에 대한 정보를 얻은 다음에는, 어째서 일본에서 한국어가 통용되었는지를 찾아보았다.

- 4대 사카이 쿠보, 고니시 유키사다의 대에 일본은 조선의 언문, 그러니까 오늘날의 한글을 도입했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물론 한글이 편하기야 하겠는데.”

- 당시의 가나는 제대로 규칙이 정립되지 않아, 각지에서 쓰는 용법이 서로 달랐다. 그러나 이를 한 가지로 통일하기란 다른 지역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건 조금 납득할 수 있지. 나도 그 지방색 때문에 힘으로 일통하려던 생각은 접었으니까 말이다.

언어 규범을 새로 정하려고 해도, 동국의 무가들도 한 발짝씩 걸치려고 했을 터였다. 모리나 미요시도 마찬가지였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골치를 썩느니 아예 이웃나라의 언어와 글자를 들여왔던 모양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자료를 찾아 읽었다.

- 고니시 유키나가 사후, 동아시아의 최강대국은 사카이나 일본이 아닌 조선이었다.

주션은 금으로 국호를 고친 이후에도 한족들의 반란에 시달려야 했고, 주션 본국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만약 일본에 단일 세력이 등장했으면 상황은 바뀌었을지도 모르나, 동아시아에서 단독으로 조선을 능가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지금 한국어가 동아시아의 공용어 비스무리한 지위가 된 이유인 듯했다.

- 조선은 삼국 회맹을 하고 딱 백년이 지난 뒤,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스스로를 황제국이라 칭했다.

그러나 여전히 동아시아는 어느 한 세력의 우위로 정해지지는 않았고, 단지 서로의 지위를 존중하는 선에 머물렀다.

주션 황실이 다스리는 금나라가 또다른 황제국으로서 그에 비견할 만했지만, 그들은 한족의 반란을 제압하느라 국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이건 조금 빠른데……?”

그 외의 나머지 역사는 내가 기억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중국은 여전히 셋으로 나뉘어져서 투닥거리며 세월을 보냈고, 조선은 동아시아의 일인자로서, 사카이는 일인자 같은 이인자로서 자리매김 한 듯했다.

그마저도 고니시 가문이 쿠보직에서 멀어지면서, 더 이상 조선의 양보도 받지 못한 것 같았지만.

“뭐, 그렇게 됐나. 어거지로 합치려다가 황국의 육해군 대립 같은 꼬라지가 나는 것보단 낫지. 전쟁도 안 난 것 같고…….”

마침 1,2차 대전이 떠올라, 해당 부분을 찾아보았다.

일단 유럽 쪽의 역사는 그대로였다. 모두 독일이 스타트를 끊고, 미국이 마무리하고. 반면 유럽인들이 열심히 힘을 소모하는 동안, 동아시아는 평화로웠다고 했다.

- 동아시아는 전쟁을 피하면서도 모두가 풍요로워지는 길을 오래 전부터 배우고 있었다.

만약 고니시 유키나가가 아닌 무가 출신 중 하나가 일본을 제패했다면, 동아시아 역시 끊임없는 전란에 시달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 세계선(?)에서는 임진왜란이나 을사조약, 만주 사변, 태평양 전쟁 따위가 대체역사로 들어가는 듯했다.

“이건 마치 내가 무슨 높은 성의 사나이라도 된 기분인데?”

어쨌든 첫째 아이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만 빼면, 대단히 만족스러운 역사였다.

“에휴, 그래 환자는 일단 안정을 취해야지.”

나는 다시 병실로 돌아와서 TV를 켰다. 그런데 거기에는 삼촌이 나오고 있었다.

“어……? 자, 잠깐!”

살짝 머리가 아파오면서, 몇몇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느닷없는 두통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익숙한 이름이 TV에서 흘러나왔다.

- 소서대현 총리대신은…….

카미나가의 후손들은 그대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재산을 챙겨서 조선으로 건너갔고, 나는 그 후손들 중 하나였다!

철저히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추고, 재력으로 배후의 흑막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이다.

기억을 되찾은 나는 정신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하하!”

『내가 고니시라니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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