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천하를 분재하다(4)
산해관을 지키던 병사들 중 일부는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항복했지만, 장수들은 끝까지 싸웠다.
그러나 조승훈과 부장이 거론했던 보름이란 기간도 결국은 삼중의 성벽이 하나하나 무너질 때를 상정한 것.
나흘째에 앞뒤로 포위당하고, 꼬박 하루 동안 포격에 얻어맞고, 다시 하루의 총공세까지 도합 엿새 만에 천하제일관은 그 현판을 내려야 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관문도 끝이군.”
“칸이시여, 감축드리옵니다.”
휘하 부족장들이 경하를 올리려는 것을, 누르하치는 손을 들어 막았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번 전쟁은 자금성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이니, 모두들 마음을 다잡도록 하라.”
주션의 칸은 산해관에서 가장 높은 종고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의형, 고니시 유키나가와 자금성에서 만나기로 했다.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으로서, 초원의 칸으로서 호승심이 끓었지만, 결국 먼저 도착하는 것은 유키나가 형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고니시 수군은 중간에 주션의 군대를 상륙시켜줄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던가.
그러니 조금의 여유는 부려도 될 터였다.
잠깐의 감상을 마치고 내려온 누르하치는 한 가지를 지시했다.
“화약의 양은 넉넉한 것으로 안다. 이 산해관의 동서남북 성문과 좌우 오백 보의 구간을 모조리 폭파시켜라.”
“명을 받듭니다.”
이미 성벽 곳곳이 파괴되어 제 역할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러나 초원의 칸은 산해관이라는 관문이 지닌 상징성에 주목했다.
“더 이상 장성 이남과 이북은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주션의 땅인 바, 이 산해관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그의 명령은 즉시 이행되었다. 병사들이 곳곳에 폭약을 채워 넣고 길게 심지를 뽑았다.
살아남은 포로들의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요란한 폭음과 함께 천하제일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 *
“아우님이 꽤 늦었군.”
“뒷정리를 하느라 말입니다. 근데 어차피 형님께서 먼저 입성하시는 게 당연한 수순 아니었습니까?”
내가 가볍게 장난삼아 타박하자, 누르하치도 농담으로 맞받았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공방전이 한창 벌어지는 중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아우가 할 일이 없어지고 말았군요.”
“자네는 산해관을 지워 버리고 오지 않았나. 그것도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걸세.”
“형님네 수군이 도와준 덕에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던 겁니다. 이번 전쟁의 최대 수훈자도 형님이 되시겠군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함락을 시키긴 겁니까?”
누르하치로서는 당연한 의문일 터였다. 실제로 북경의 외성은 천조국의 수도답게, 아주 견고한 성벽을 자랑했다.
내가 가져온 화포로 두들긴다고 해도, 제법 오래 버틸 만한 요새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책은 이미 준비된 상태였다.
황실이 버린 도성일지라도 닌자들은 남아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했다.
나는 그들을 이용해서 성문을 통째로 폭파시켜버린 다음, 최후통첩을 날렸다.
-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지위와 재산은 그대로 보전하게 해 주겠다. 그러나 만약 끝까지 싸울 생각이라면 그 또한 받아줄 것이다. 대신 너희가 버티지 못할 경우, 성중의 생명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목숨을 거두겠다.”
만약 단순히 항복만 요구했다면, 혹은 첫 번째 조건만 제시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성중의 백성들을 내가 인질로 잡은 격이었기에, 순순히 항복한 듯했다.
자금성은 그렇게 명나라의 손을 영영 떠났다.
“이곳이 그 천조국의 황궁이란 말이지.”
“과연 명성만은 헛되지 않은 듯합니다, 형님.”
누르하치도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자금성의 하나도 빼놓지 않고 눈에 담겠다는 듯이 훑어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도 자금성 내부의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구경했다.
봉천전(奉天殿)이라는 전각을 둘러보던 중, 문득 의동생이 입을 열었다.
“형님, 우리가 여기에 들어온 것도 결국 어느 하나가 잘나서인 것은 아닐 것인데, 여기에서 회맹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회맹이라……?”
“예, 형님. 주션과 일본, 그리고 조선이 모여서 지금의 우의를 지킬 것을 맹세하는 겁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누르하치는 곧바로 조선군 천총을 불러다가 그의 생각을 한양에 전달하게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조선의 세자가 직접 자금성에 들어왔다.
“아바마마께서는 가한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셨습니다.”
삼국의 뜻이 일치했음을 확인한 뒤로는 일사천리로 회맹 준비가 진행되었다.
텅 비어 버린 명나라의 종묘에 복희씨와 신농씨, 요순우를 비롯한 역사적 군주들을 모셔놓고, 거기에 주공과 공자도 안치했다.
“오늘 동방의 삼국은 합심하여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이에 감격하여 천하에 고하니, 천하 만민이 증인이 되어 일본과 조선, 주션의 의가 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 누르하치, 그리고 조선의 세자가 각각 자신이 쓰는 언어로 제문을 읽었다.
회맹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 자체가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마 주션의 중원 통치에는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과연 누르하치는 이를 한족들에게 봉선의식으로 알렸고, 새로운 천명에 관한 이야기를 널리 퍼뜨렸다.
거기에 나나 조선이 소외된 것도 아니었다.
누르하치는 자유로운 교역을 보장할 것이며, 지금 반포한 조치는 오직 일본국 경공방과 조선 국왕에게만 해당됨을 선언했다.
다시 말해서, 이 양쪽에게 근대의 최혜국 대우를 해 준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 * *
자금성에서의 회맹 이후로, 천하는 잠잠했다.
일본에 별다른 일은 터지지 않았다. 물론 몇 가지 변화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사카이라는 이름은 이제 기나이와 큐슈 서부 일대를 일컫는 말이 되어 갔다.
류큐도 그저 왕실의 안락함만을 누리며 조용히 사카이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마도 국왕의 권력만 보전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거기에 포모사까지 더해지면서, 최소한 동아시아의 바다는 확고하게 사카이의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사카이의 쿠보직은 미리 정해 두었던 대로 첫째 아들인 카미나가가 순조롭게 승계했다.
츠키나가도 아시카가 일족의 양자로 들어가서 코가 쿠보직을 넘겨받았고, 그럭저럭 동국의 무가들을 조율해 내면서 지내는 모양이었다.
둘째가 다스리는 동국은 여전히 무사들의 땅이었고, 나름대로 무가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 봐야 이제는 무사가 활약할 공간도 없었기에, 박제된 모형정원 같은 것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도쿠가와 가문은 쇠락을 거듭하다가, 이에야스의 장손이 승계하면서 아예 코가 쿠보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모리 가문은 가까운 조선에서 선비들을 적극 수입해다가 제도문물을 도입하는 모양새였다.
기존의 무사 출신들과 반발도 제법 있는 듯했지만, 어떻게 테루모토가 잘 조율했는지 겉으로 잡음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미 조선의 선비들도 이제는 기술이나 상업에 상당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기에, 모리의 영지도 나름대로 착실하게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미요시 쪽은 어떻다 판단을 내리기가 아주 애매했다.
잘 발전하는 듯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동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한 면모도 보였다. 가끔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고.
아마 내가 개입하지 않았을 때의 일본 풍토가 이러했을까 싶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누인들은 에미시와 에조치라는 멸칭을 거부했고, 내가 권한 대로 원래 역사에서도 사용했던 홋카이도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존의 동맹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협조적이었고, 이쪽과 서로 물산을 교역하면서 관계를 굳혀 나갔다.
역시 카미나가, 그 아이가 엄한 짓을 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친사카이 성향으로 남을 터였다.
대강 원 역사의 일본령에 속하는 땅은 이런 식으로 시간을 흘러갔다.
*
조선은 자금성에서 회맹을 한 이래로, 줄곧 외부 확장보다는 내치에 힘쓰고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내심 더 경계를 하기도 했다.
이미 유성룡이 특허에 관한 건으로 역량을 과시했고, 그와 같은 선비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을 터였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여진족을 상대로 예방전쟁까지 벌일 정도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주 평화로운 성향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유교 전통이 강해서 명분론을 중시했기에, 나는 아들들에게 절대 조선은 먼저 건드리지 말라고 유훈을 남겼다.
카미나가의 대까지는 무난할 듯했고, 그 다음은 그저 자기 후계자를 잘 가르치기만 바랄밖에.
*
주션의 누르하치는 끝내 대륙의 북부를 모조리 차지하고 북경에 도읍을 삼았다.
중원 통일 왕조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만 빼면, 나머지는 원래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산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내 조언은 잊지 않았는지, 살아있는 아들들 중에서 장남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이샨에게 원래의 영토를 떼어서 독립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북경에 도읍한 나라는 그대로 금이라고 개칭하며, 중원 왕조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그나마 기존의 삼국에 대해서는 무제한으로 문호를 열어 놓은 것이 다행이었을까.
어쨌든 다이샨에게 주션을 분봉시킨 것으로 최소한의 보험책은 들어 둔 셈이니, 숙신인이 그대로 소멸하지는 않을 듯했다.
*
그렇게 옛 명나라 영토의 삼분의 일가량은 누르하치가 차지했고, 나머지는 남경으로 천도한 명나라와 청(淸)으로 국호를 정한 태평천국의 무리들이 한 조각씩 갈랐다.
명나라는 장강에 의지해, 어떻게든 국체를 이어나갔다.
자금성에서 삼국의 회맹이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위충현이 숙청당했다고 했다. 사필귀정이요 적악여앙이라 할 만한 결과였다.
그리고 만력제 역시 강제로 상황이 되어 뒷방 노인네 신세가 되었고, 신하들은 그 장남인 주상락이 새로운 명의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다.
광동성까지는 명나라의 영토로 남았고, 나머지 지역은 청나라가 차지했다.
*
태평천국의 무리에서 닌자들이 빠진 이후로도, 그들은 교주가 남긴 유훈을 착실히 지켰다.
그러다가 세월이 좀 더 지나고 나서는 서서히 명나라와도 손을 잡곤 했다. 역시 한족이라는 정체성은 쉽게 가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은 오월동주가 명청동주로 바뀐 것일 뿐, 서로 으르렁거리기는 금나라를 상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도 나이를 먹어 가면서 모든 일을 카미나가에게 넘겼고, 유유자적하게 노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죽을 날이 되었다 싶은 시기에, 두 아들들을 불러모았다.
“고니시 가문의 성세도 영원하진 않겠지. 너희는 내가 남긴 말대로 하되, 스스로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대대손손 남기도록 해라. 그게 내 마지막 부탁이다.”
카미나가도 츠키나가도 눈물을 흘리며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해도 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꼬리나마 올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시야가 어두컴컴해지는 것이 더 먼저였다. 이게 죽음이라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 슬슬 저승 구경을 할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그런데 어렴풋이 대화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환자, 웃는데요?”
“좋은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지.”
조금 더 집중해 보니 주변에서 삐익거리는 비프음이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첫 대화가 끝나고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잠깐 웃는다고? 진짜네. 쌤 모셔와, 중환자실 환자가 의식을 찾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