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고니시라니-223화 (223/225)

223화 천하를 분재하다(3)

“지령이 내려왔다.”

일곱 번째 단조의 한 마디에, 닌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럼…….”

“교주는 승천한 것으로 꾸미고, 나머지들도 바람잡이를 한 다음에 하나둘 빠지는 거다.”

거기까지 들은 닌자들 중 하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교주 역할을 맡았던 자였다.

“이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연기도 끝이군요.”

“마무리만 잘 지으면 말이지.”

그들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논의한 다음, 곧장 행동에 들어갔다.

신도들이 우글우글 모인 자리에서, 태평천국의 교주는 자신이 받은 계시라 쓰고 지령이라 읽을 만한 무언가를 선언했다.

“내 아버지, 상제께서 이르시길, 천하에 환난이 다가온다고 하셨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교주님!”

“명나라는 화덕(火德)으로 일어섰으나 이제는 그 기운이 다했고, 그 다음은 수덕(水德)으로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이미 그런 요설이 돌고 있었지만, 신도들 앞에서 교주의 입으로 직접 거론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외줄타기 연기자는 조용히 심호흡을 한 뒤, 재차 자신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그 수덕이란 물의 세례로서 새 사람이 된 너희들을 일컫는 것인 바, 이제 태평천국을 지상에 세워 천하를 태평케 하리라!”

- 와아아아아!

정말 미친 놈들이군. 닌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거병을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 날, 태평천국의 교주는 대업을 위한 기도를 하겠다면서 골방에 틀어박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째 되는 날이 되도록 아무도 그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밖을 지키던 자들 중 하나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면서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교주가 입었던 옷과 책 한 권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스, 승천이다! 천왕께서 승천하셨다!”

누가 골방에서 나온 흔적은 없었고, 시신 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태평천국의 초대 천왕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졌고, 나머지 무리들은 그 유지를 따르기 시작했다.

사천은 천하의 길지이니, 거기로 들어가서 대환난을 피하라.

명 황실이 천하의 주인으로 지내면서 타락으로 죄업을 쌓았으니, 주씨와는 결코 화친하지 마라.

북방의 오랑캐는 상제의 징벌인즉, 20년 간은 맞서지 말고 피하기만 하라.

이러한 삼개조 유훈이 태평천국의 근간이 되었다.

처음 교주의 승천을 확인했던 문지기들 중 하나가 새로운 천왕으로 등극했고, 그는 착실하게 초대 교주의 유훈을 실행으로 옮겼다.

다음의 교주는 닌자가 아닌, 순수한 한족 출신의 신도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적당히 어수룩한 면이 있어, 닌자들이 그렇게 일을 꾸며 놓은 것이었다. 그자는 주변에서 바람을 불어넣는 대로 착실하게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사천으로 진격하라! 그곳이 우리의 낙원이 될 것이다!”

이미 지방관들도 상당수가 포섭되거나 처리된 상황, 들불처럼 일어나는 태평천국의 무리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       *       *

척계광이 위충현의 저택 앞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뒤, 산해관의 책임자는 조승훈이 되었다.

황제가 총애하는 환관은 오랑캐의 침입을 걱정하면서도 정작 국경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제발 오늘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기를.”

원래 조승훈은 성격이 급하고 생각을 길게 하지 않는 편이었다.

오랑캐가 보이면 곧장 달려 나가던 요동 총병부의 선봉장. 그런 그도 이제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조정의 대신들은 장성에 배치된 부대에 어떻게든 보강을 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산해관에 물자가 넉넉하진 않아도, 주둔군이 아예 배를 곯는 경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시기에 맞춰 병력이 교대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모자란 만큼의 보충은 이루어졌다.

“그래, 자네는 어쩌다가 여기로 온 겐가?”

“투필종군이라 했습니다. 오랑캐를 막는 일에 어찌 몸을 아끼겠습니까.”

조승훈은 턱을 쓰다듬으며 부하의 답을 곱씹었다. 참 갸륵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런 변방에 두기는 아까운 장수였다.

“웅정필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장군.”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게.”

“예?”

몇 단계의 과정을 뛰어넘은 상관의 언행에, 착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장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닐세. 그저…….”

깡. 깡. 깡. 깡.

조승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오랑캐가 산해관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꽹과리 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졌다.

“싸움을 준비하라!”

슬슬 올 때가 되긴 했군. 조승훈 이하 모든 장병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머물렀던 자들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부디 막아낼 수 있기를.

하지만 그들의 희망은 이내 꺾이고 말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먼지구름이 평소보다도 훨씬 웅장했다.

전투를 몇 차례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오랑캐가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산해관도 끝인가…….”

“장군, 어서 명을 내려주십시오!”

아연해하고 있는 조승훈을 웅정필이 다그쳤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지휘관은 관문 밖의 병력과 자신의 부하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급히 붓을 놀려, 장계 하나를 작성했다.

“자네는 이걸 가지고 북경에 원군을 청한 다음, 남경의 병부에 알리도록 하게.”

“장군?”

“이게 내 명일세. 시급을 다투는 일이니, 서둘러야 할 것이네”

“아, 알겠습니다.”

장계를 받아든 웅정필은 서둘러 남쪽을 바라고 말을 달렸다.

“앞날이 창창한 친구를 길동무 삼을 수는 없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관문 밖의 오랑캐들은 곧장 공세를 펼치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화포를 앞에 내밀었다는 것이었지만.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래도 대략 한 달쯤은 가지 않겠습니까?”

지난 전쟁에 같이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장수 하나가 조승훈의 혼잣말에 대꾸했다.

“보름, 그래. 이 삼중성벽도 한 달이면 끝이란 말이지.”

天下第一關 천하제일관.

이름 그대로 천하에 오직 하나뿐인 관문을 자처하는 산해관이었지만, 그조차도 미덥지 않은 것이 지금 그들이 처한 현실이었다.

“아무리 환관 놈이 농간을 부린다고 해도, 원군 파견을 방해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해볼 만하겠네만…….”

조승훈은 기묘할 정도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평소보다도 많은 병력이 몰려와서가 아닌, 마지막에 대한 예감과도 같았다.

명군과 오랑캐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는 가운데, 백기를 든 전령이 성문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명나라의 국운도 끝이다. 순순히 항복하면 지위를 보전하고 우리와 같이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나, 끝까지 항전하겠다면 모조리 몰살시키겠다!”

“오랑캐 따위의 말을 들을까보냐.”

“후회할 것이다.”

전령은 경고를 남기고 자신이 온 곳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후로도 한동안은 오랑캐들의 진영에서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자, 오히려 산해관을 지키던 병사들은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감히 이 관문을 넘을 자신은 없는 게 아니겠나.”

“그럼 저것들은 할 짓이 없어서 우르르 몰려왔단 것인가?”

마음이 심란하기는 조승훈 이하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저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성벽 안에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원군이 오기까지 또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 것에 마음을 졸이며 시간만 보냈다.

그렇게 다시 또 이틀이 지났다.

성중의 분위기도 이제 슬슬 풀어질 무렵, 남쪽에서 먼지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원군이다!”

“조정에서 원군을 보냈다!”

“벌써?”

병사들이나 하급 군관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고위 장수들은 오히려 후방에서 접근하는 부대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다.

적이 모습을 드러낸 지 이제 겨우 나흘째. 아무리 웅정필이 밤낮없이 달렸다고는 해도, 북경에 닿는 것이 고작일 터였다.

“남문을 닫아걸어라.”

“장군?”

“어서!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원군이 온단 말이더냐. 어차피 적은 장성 밖에 있다. 남쪽에서 접근하는 자들이 아군이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문을 열어줘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오랑캐들은 장성을 넘어와서 유격전을 펼친 전례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 먼지구름이 아군일거라고 믿기도 곤란했다.

기대에 들떴던 병사들도 다시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조승훈의 명을 따랐다.

그도 자신의 판단이 빗나가기를 바랐지만, 불행히도 적중한 상태였다.

이제 산해관의 앞뒤로 모두 숙신肅愼이라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제 우린 끝이군.”

*       *       *

“아깝군요. 잘하면 그대로 산해관을 뺏을 수도 있었는데.”

“상관없다. 확실히 배가 편하긴 편하군.”

누르하치의 의동생이자 상장인 호호리(何和禮 하화례)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누르하치는 산해관에서 남문을 닫아건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금 몸소 산해관의 남쪽을 치는 별동대에 나와 있었다.

의형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선박을 제공해주었고, 덕분에 주션의 군대가 산해관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찌르는 것이 가능했다.

애초에 무혈입성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 철저히 깨부수는 것으로 저 명나라 족속들에게 주션의 공포를 새겨 주리라.

“포격을 준비하라. 이제 저 증오스러운 관문을 깨부술 것이다!”

산해관을 남북으로 에워싼 주션과 조선의 연합 부대는 한나절 내내 화포를 퍼부었다.

그리고 마침내, 문루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진격합니까?”

누르하치를 따르던 부족장들 중 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주션의 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완전히 성벽에 구멍을 좀 더 내도록.”

“하지만 그러면 성을 못 쓰게 됩니다. 다시 짓기도 상당한 노고가 들 터인데…….”

“굳이 남겨 놓아야 하나? 어차피 산해관 안이나 밖이나 모두 아국의 영토가 될 것인데, 굳이 장성으로 선을 그어 놓아야 하느냐는 말이다.”

칸의 답을 들은 부족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번 전쟁으로 중원을 차지하겠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호언장담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그들의 칸은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명나라 놈들은 천도까지 하면서 우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니 두려워하는 대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예의 아니겠나.”

“카, 칸…….”

장성을 넘어 중원의 주인이 된다.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지금의 사정을 돌이켜보면, 과연 그가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처음 질문했던 사람만이 아니라, 누르하치를 따라온 모든 족장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주션만이 아니라, 지금 그들에게 복속되어 따라온 몽골의 여러 강대한 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원…….”

“중원이다! 우린 중원으로 간다!”

그렇게 기세를 올린 유목민의 군대는 산해관을 완전히 넝마로 만들었다.

마침내 성벽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누르하치는 진격을 명했다.

“돌격하라! 저 증오스러운 관문을 완전히 지워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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