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천하를 분재하다(2)
나는 먼저 맏이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밝힌 뒤, 조선의 국왕에게 서신을 띄웠다.
* * *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명나라의 군주는 천명을 스스로 내던졌고, 더 이상 천자라는 이름을 짊어질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함을 드러냈습니다.
지난 전쟁으로 귀국의 국토가 피폐해진 것을 모르지는 않으나, 이제는 북소리 한 번으로 북경을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양성을 보급의 거점으로 삼고 주션의 군대를 뒷받침해 주신다면, 우리 삼국의 의가 세세토록 굳건하리라 생각합니다.
* * *
누르하치는 자신의 야망을 대륙에 표출하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고, 나는 그걸 굳이 억누르지 않았다.
아니, 적당한 선에서 조율할 수만 있다면, 저 대륙을 찢어 놓을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는 달랐다.
요즘은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개방성을 띄긴 했으나, 원래 조선은 내부지향성이 아주 강한 편이었다.
종계변무를 들어주지 않은 데 대한 앙금이 남아 있긴 하겠지만, 지난 전쟁으로 분풀이는 충분히 한 듯했다.
그러니 명나라에 원정군을 파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다만 요양성을 거점으로 잠시 빌려주는 정도라면 거절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단횡단도 모두가 같이 하면 괜찮다고 했지…….”
물론 착한 어린이는 물론이고 어른이도 무단횡단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맞지만, 어쨌든 같이 했다는 의식을 심어둘수록 삼국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질 터였다.
그래야 어느 하나가 느닷없이 폭주할 가능성도 줄어들 테고.
답신은 빠르게 되돌아왔다.
쾌속선이 오간 날짜를 따져 보면, 아마 국왕이 즉시 작성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 공방의 요청대로 하겠소이다.
내용은 짧고 간결했지만,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 * *
“이게 정말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카미나가는 그간의 기록을 보며,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암실에 보관된 각종 문서들이 정말 사실이라면, 아버님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
평소에도 부친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기록들은 그 존경심을 아예 경외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카미나가가 어떻게 반응하건, 이치로는 담담하게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암실의 주인에게 최대한의 답을 내는 것 말이다.
“그렇습니다, 작은 주인님.”
일본 내부를 상대로 한 공작들은 그럴 수 있다 쳐도, 저 바다 건너 중국에까지 모략을 걸어놓았을 줄이야.
의형제인 누르하치를 은근히 후원하고, 그로 하여금 장성을 공격하게 한 것까지는 카미나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지를 뒤로 넘길수록, 모략의 깊이를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황제와 환관을 참독에 절여 놓은 것은 물론이고, 종교 집단을 뒤에서 움직여서 명나라의 혼란을 가중시키기까지 해 놓았다.
“내가 정말로 이분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는 걸까?”
“주인님께서는 후대의 안녕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게도 그리 말씀하셨지.”
카미나가는 자신의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금 쿠보의 직속닌자가 한 말은 부친이 그에게도 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의 쿠보들은 이런 술수보다는 손에 쥔 것을 놓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일세.”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당대의 사람이 정할 일이라고 하셨겠지요.”
“그런 말씀도 하셨지.”
카미나가는 새삼 자신의 어깨가 한없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아직 그는 젊었고, 부친도 늙었다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전성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부지런히 배워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부친의 뒤를 온전히 갈음할 수 있으리라. 그것만이 카미나가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참 기록을 읽어내리던 후계자는 문득 한 대목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오향이라는 것 말일세. 얼마나 무섭기에 참독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가?”
“말로 설명해드려도 믿지 못하실 겁니다. 직접 보셔야 할 텐데……. 아, 그렇군요. 도쿠가와 나가타다를 아십니까?”
“전에 몇 번 얼굴은 본 적은 있지. 요새 지병이 심해서 일어나질 못한다더군.”
카미나가가 처음에 보았던 도쿠가와 나가타다는 인상도 훤칠하고 사내다운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안색이 파리한 것이, 마치 썩은 고목에 간신히 붙어 있는 삭정이를 떠올리게 했다.
“아직 한창 때일 것인데,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 지경이 된 것도 참독에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이치로는 놀란 소주인에게 차근차근 전말을 설명했다.
원래는 도쿠가와 가문에 포섭된 닌자들을 징치하기 위해서 오향을 조금 풀었던 것인데, 그게 어쩌다보니 나가타다에게까지 흘러갔다고.
“허어…….”
“모든 악업은 쿠보께서 지고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차후로는 참독을 쓰는 자가 나와선 안 된다고 말입니다.”
“음……. 동감일세.”
* * *
오랜만에 보는 요동은 전보다 훨씬 발전해 있었다.
곳곳에서는 조선과 숙신의 언어가 뒤섞여서 들려왔고, 일본말도 조금씩은 쓰이는 듯했다.
거리의 형상도 언어를 반영한 듯한 모양새였다.
대부분은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와나 초가가 지어져 있었고, 단촐한 지붕모양의 흙집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잘 보이는 것은 일본인들이 지은 목조건물이었다.
“꽤 추울 텐데……. 뭐, 어쩔 수 없나. 필요하면 알아서들 바꾸겠지.”
자세한 수치값은 알지 못하지만, 대강 부산이 교토랑 위도가 비슷하다고 했던가.
요동 감영이 있는 안동(원래의 단둥)쯤 되고 보면, 대충 혼슈 끝자락과 같지 않을까 싶다.
아마 혹독한 추위를 경험하고 나면, 코타츠 대신 뜨끈한 온돌을 찾게 될 수도 있겠지.
어쨌든 그런 것들은 여기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기에, 나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그렇게 삼국의 풍속이 뒤섞여 있는 거리를 지나자, 요동 감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쿠보.”
요동도 좌도사로 남아 있었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마중을 나왔다.
“오랜만일세. 요동에서 일하기는 어떤가?”
“하루하루가 새롭습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나날이 만족스러운 듯한 눈치였다.
“잘 맞는 모양이니 다행이군.”
“조선의 비변사노 카미, 아차……. 그러니까 도제조가 이미 와 있는 상태입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나는 미츠나리의 안내를 받으며 감영의 내실로 들어갔다.
과연 그가 말한 대로, 한 조선의 고관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방. 이번에 중임을 맡게 된 이항복이라 합니다.”
언뜻 보면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그가 지금의 비변사 도제조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 사람이 꽤 유들유들한 인물인 것으로 아는데, 아마 그래서 비변사를 맡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반갑구려. 도제조가 직접 여기까지 왔다면 역시……?”
“그게 실은 조정에서도 여러 논의가 있었는데, 일단 공방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구체적인 방침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이쪽에서 요구했던 것은 요양성을 거점으로 쓰게 해 달라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그저 상징적인 표시로 끝낼 생각이었고, 딱히 조선에서 그 이상을 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전쟁을 앞두고 방심은 금물이라 하지만, 승산은 넉넉하고도 남을 터였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유목민 기병과 내가 깔아놓았던 닌자들의 첩보망은 이미 한 번의 성과를 거둔 적이 있었고, 이번에는 그때보다 훨씬 대규모로 적극적 공세를 가할 예정이었다.
“이미 요양성의 사용을 허락해 주었을 것인데, 또 논의할 것이 있단 말이오?”
“저희도 약간이나마 군대를 파견하여 한 손을 보태고 싶습니다.”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이긴 싸움도 사상자가 났다는 이유로 장수를 처벌하려 했던 그 조선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전하려고 한다니.
혹시 내가 뭔가 깨워선 안 될 무언가를 깨워버린 건 아니겠지?
나는 웅장해지려는 가슴을 살살 눌러 놓으면서, 이항복의 기색을 유심히 살폈다.
“그게 정말 조선의 뜻이오?”
“예, 공방. 원래 수박서리도 같이 해야 우정이 돈독해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조선의 정승에게서 개구쟁이의 모습이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을 본 것 같았다.
“오.”
“물론 농담이긴 합니다만, 전하의 뜻도 크게 다르진 않으십니다. 결국 공방께서 요양성을 요구하신 것도 그 연장선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내 의도를 그대로 짚어낸 말이었으니까.
“바로 보았소. 조선은 인의를 중히 여기는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심계에도 능하구려.”
“원래 심계와 인의는 한 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본성을 다스려 극복하려 한다면 인의를 논하는 것이 되고, 남의 본성을 편의대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심계가 되는 법이지요.”
“허, 오늘 도제조를 만나서 견문이 트이는구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한편으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살짝 흘러내렸다.
역시 옛 사람들은 누적된 예시가 적었던 것일 뿐인 듯했다.
일전에 유성룡에게서 경험했던 것을 또 여기에서 되새기게 될 줄이야.
“이런,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본의가 아니게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니오. 역시 조선과 쌓은 우의가 헛되지 않음을 알겠소. 그럼 세부적인 내용을 논의해 봅시다.”
이제는 실무를 이야기해야 할 때였다. 조선의 도제조는 요동도 내의 주션 대표인 요동 우도사를 불러왔다.
그리고 동시에 총통위의 천총이라는 임중량도 내실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 조정의 입장에 의하면, 총통위에 속한 일개 부를 파견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오(伍)-대(隊)-기(旗)-초(哨)-사(司)-부(部)-위(衛)로 이어지는 편제에서 두 번째로 큰 단위를 보내주겠다는 이야기였다.
대충 일천에서 오천 사이쯤의 병력인 셈인데, 그 규모보다도 거론된 부대가 중요했다. 바로 그 총통위를 보내겠다고 한 것이다.
이제는 주션도 화포를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익숙한 편은 아니었다.
여차하면 내 휘하의 수군을 잠시 뭍에 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렸다.
화약 전통이 꽤 깊은 편인 조선이 한 손을 거들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대강의 이야기가 끝난 뒤, 요동 우도사가 입을 열었다.
“마침 화포야말로 주션의 군대가 가장 부족했던 부분이었는데, 아주 손쉽게 채워지겠습니다.”
“요즘 장성을 공략함에 있어서 화약과 화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물론 쿠보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위낙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물건이라 가르치기도 어렵다고 하더군요.”
이건 편견에 가까운 판단 같았지만, 역시 유목민들의 거친 성정이 섬세함을 요하는 화약과는 맞지 않는 듯했다.
아마 세월이 흐르면 좀 달라지겠지만, 당장은 그렇다는 모양이었다.
“차차 나아지겠지. 그럼 나는 수군을 마저 점검하러 가 보겠네. 아마 다음에는 자금성에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