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천하를 분재하다(1)
초기의 태평천국은 폐쇄적인 객가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리저리 좋은 가르침을 뒤섞은 토착 신앙에 불과했다.
그러나 닌자들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점차 그 교세는 커지고 있었다.
“정말 머리에 물만 끼얹으면 병도 낫게 해 준다는 거요?”
“그렇지요. 우리 상제님은 신통하신 분이라…….”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병마를 물리치는 신앙으로 접근하던 태평천국은, 점차 불어난 신도들의 머릿수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현령. 너무 세금이 많은 거 아니오?”
“그게, 조정에서 내려온 명이 있는데…….”
“아,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이러지 맙시다. 중간에 해먹는 거 좀 있잖습니까.”
“어흠, 이보게.”
“조금만 편의를 봐 주시면, 우리도 현령님을 도와드릴 수 있지 않겠소?”
낮은 단계부터 지방관을 포섭하고, 그 영향력을 기반으로 또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렇게 불어난 신도들은 다시 태평천국의 영향력이 되는 순환 고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거, 일이 너무 커지지 않습니까?”
“여차하면 그대로 몸만 빼내면 될 일이 아니냐. 너는 교주 연기나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단조.”
원래 광주 일대는 습하고 더운 지방이라 각종 질병이 흔했다.
그 점을 이용해서 병을 치료해 준다는 선전은 태평천국의 교세 확장에서 가장 유효한 수단이었다.
게다가 해적들이 창궐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종교시설을 건드리지 않았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신도가 많은 태평천국이 사람들의 눈에 자주 들어왔다.
“입교하면 해적들도 피해가는 태평천국에 들어오시오!”
“나, 나도 태평천국 들어갈거야!”
그렇게 광동과 광서를 거의 손아귀에 넣다시피 한 이후, 명나라 남쪽 지방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천하가 어지러운 까닭은 화덕이 쇠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시 수덕이 천하를 다스려야 하리라.
북방의 오랑캐가 장성을 끊임없이 건드리는 판에, 대운하 복구라는 토목 공사, 그리고 해적의 창궐까지.
민심이 흔들리는 와중에 번지는 뜬소문은 사람들의 뇌리에 부드럽고도 예리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 * *
“정말로 명 왕조도 끝이란 말인가?”
“멍청한 소리는 하지도 말게.”
조정의 대신들은 헛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유목민이 장성을 넘본다고 해도, 그 숫자는 모두 합쳐 봐야 십만을 넘기지 못한다.
국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이, 섬서와 북직례만 동원해도 막아내기엔 충분했다.
토목공사도 언제고 끝날 일. 불온분자들이 훼방을 놓고 있다 해도, 순찰을 늘리면 그만이었다.
해적도 마찬가지. 왜국의 소서행장이라는 자가 분탕질을 치고 돌아갔지만, 상륙해서 깊이 들어온 자들은 모조리 도륙내 버렸다.
모든 우환거리들은 피부에 난 생채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생각하는 현실과 백성들이 소문으로 접하는 현실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거기에서 나오는 괴리야말로 독버섯이 자라기 쉬운 토양이라 할 만했다.
그들이 신경을 쓰는 위험이라고 해봐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백련교 정도였다.
“사교 놈들이 또 나타나서는, 기괴한 교리를 퍼뜨리고 있답니다.”
“태조께서 박멸한 자들이 또 나타나다니……. 뿌리를 뽑을 좋은 방법이 없겠나?”
“거, 이독제독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남방에 태평천국이라는 새로운 종교가 나타났다던데, 둘이 충돌하게 만들어 보지요.”
관료들 중에서 지방 사정에 좀 밝다 하는 사람들의 인식도 고작 이런 수준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나라가 뒤집힐 위기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적어도 현상유지만 된다면.
그러나 환관 위충현의 판단은 또 달랐다.
“오, 오랑캐가 쳐들어온다!”
“무슨 일이십니까, 태감?”
오랑캐가 고향마을을 짓밟고 자금성을 불태운 것에 놀랐던 그는, 방금 전까지 보았던 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휴우…….”
“악몽이라도 꾸신 모양이군요.”
“뭐, 그렇지. 소위 사대부란 놈들은 믿을 수가 없으니…….”
그는 떨리는 손으로 침상 옆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
밖에서는 오랑캐가 날뛰고 안에서는 조정 대신들이 으르렁거리는 판에, 오향만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불 좀 다오.”
“예, 태감.”
오랑캐가 장성을 넘고 고향마을을 불태웠다. 그리고 자금성에까지 들어와서는 자신을 죽이려 했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태감.”
“이제 가 보도록 해라.”
그는 하인에게 축객령을 내린 뒤, 깊이 연기를 들이마셨다. 불쾌한 꿈도 오향과 같이 불살라지기 시작했다.
“하, 세금이 부족해? 내탕금을 줄이자고?”
얼마 전, 조정의 대신들은 국고를 아껴야 한다면서, 불필요한 지출을 막자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불필요한 지출이란, 바로 폐하께서 도사들에게 쓰는 제수비용을 의미했다.
- 운하가 복구될 때까지만이라도, 좀 어떻게 해볼 수 없겠소이까?
조정의 대신들은 오직 돈 이야기만 했다. 북경으로 오는 세금이 줄었으니, 그만큼 아껴야 한다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들은 극성스럽게 굴어댔다.
“세금이 덜 걷힌다면, 차라리 세금이 나오는 곳으로 도읍을 옮기면 그만이 아닌가?”
위충현도 강남의 부가 명나라의 핵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북경에만 머무를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고 생각했다.
어차피 남경에도 궁실은 남아 있으니, 조정의 대신들이 그토록 외쳐대는 돈도 덜 들어가리라.
게다가 오랑캐들이 장성을 넘는다 해도 남경까지 내려오지는 못할 터, 황실과 자신의 안위도 든든해지게 된다.
거기까지 생각한 위충현은 자신이 묘안을 떠올려냈다고 생각했다.
그의 두뇌는 비록 참독에 찌들어 있었지만, 황제를 구슬릴 만한 지능은 아직 남아 있었다.
날이 밝는 대로 입궁한 환관은 황제를 구슬렸다.
“폐하, 이제 북경은 위태롭고, 지기가 쇠하여 나라에 온갖 변란이 끊이지 않사옵니다. 다시 남경으로 이어(移御)하시오면 어떠할지…….”
“경의 뜻대로 하라.”
황제가 정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어도, 북경이 위태롭다는 말은 기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총신(寵臣)만큼이나 약에 찌들어 있어, 스스로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조정의 대신들은 거세게 반발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 * *
“중국이 오랜 지병으로 쓰러지고 마는군.”
사실 지금 시점에서 아편이 중국의 병폐는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황제와 그가 총애하는 환관이 아편에 찌들어서 망국으로 이끈다면, 그것도 결국은 아편 때문에 망한 것일 테지.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얼른 알아듣지 못한 이치로가 되물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쿠보.”
“아니다. 방금 건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지도로 눈을 돌렸다.
명나라가 남경으로 천도한다면, 당장 바뀌는 것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민심은 더 들썩이게 될 것이고, 장성의 방비도 지금보단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처음 위충현 옆에 닌자를 붙여 두었던 것은, 그저 첩보나 빨리 얻고 명나라 상층부의 판단을 마비시키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런데 의외로 그 ‘고향친구’라는 존재가 환관에게는 꽤 친근했던 모양이었다.
이건 단순히 오향만 가지고는 이룰 수 없는 성과라고 봐야 했다.
“이제 명나라를 반으로 갈라놓을 시간이군.”
누르하치는 자신의 아들들 중 하나에게 주션을 맡기겠다고 했다.
다이샨이라고 했던가. 아주 우직하게 생긴 녀석이었던 만큼, 뭔가를 바꾸려고 하지는 않을 터였다.
입관한 유목민이야 중원의 왕조로 변해가고 말겠지만, 적어도 주션이 따로 존재하는 한은 완전히 동화되진 않겠지.
나는 지도에서 누르하치를 의미하는 깃발 모양 말을 북경에 꽂았다.
그가 장성을 넘기만 해도, 중국은 여러 조각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
거기까지만 하면 이 동아시아에 거대한 단일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될 터, 그거면 충분했다.
“이제 마지막 전쟁을 치러야겠군.”
이제는 스모토도 슬슬 카미나가에게 온전히 맡기고, 나도 이번만 끝나면 슬슬 은거할 생각이었다.
히사히데 말마따나 겐푸쿠 전부터 바쁘게 뛰어다녔으면, 이제는 좀 물러나도 되겠지.
* * *
카미나가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암실을 두리번거렸다.
스모토 치소의 대부분은 관료들이나 가족들에게 개방된 공간이었지만, 유일하게 이 암실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문무의 고위 관료들도 관련이 있는 경우에만 가끔 불려오는 곳이었고, 오직 보고를 하기 위한 닌자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에 카미나가가 발을 들인다는 것은 내 후계자에게 중요한 일을 넘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사실은 본인도 잘 자각하고 있는지, 내내 긴장한 기색이 겉으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여기는 내가 비밀스러운 일을 취급할 때 쓰는 장소다. 이제는 너도 여기에서 닌자들에게 보고를 받아야 할 것이다.”
카미나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암실 곳곳을 살피기만 했다.
“나는 이제 전쟁 하나를 치러야 한다. 그것만 끝나면 슬슬 은거할 생각이다.”
“아버님, 전쟁이라니 그 무슨……. 아니 그보다도, 은거는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장 쿠보직을 내놓겠다는 게 아니다. 이번 전쟁 동안 네가 쿠보직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지 보겠다는 것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벽에 걸린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는데, 무엇인지 알아보겠느냐?”
“소자는 아둔하여…….”
“그냥 편하게 말해도 좋다. 틀려도 상관은 없어.”
내 말을 들은 장남은 가만히 지도를 살펴보았다.
“혹시 큐슈 서쪽을 말씀하시는 것이십니까?”
일본 전체를 보면 스모토 일대를 중심으로, 동국은 코가 쿠보와 도쿠가와의 땅이었고, 서국은 모리와 미요시가 남북으로 갈라서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큐슈 서쪽만 직할령으로 두고 있던 것이 눈에 들어온 듯했다.
“그것도 물론 우리의 미래지. 아주 중요한. 하지만 저 지도는 그것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야.”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그렇다면 단서를 주마. 사람들은 나를 두고 천하인이라고 부를 때가 있다. 하지만 내 이전에도 그 칭호를 얻은 자는 있었지. 그들과 나의 차이점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카미나가는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전에는 오우치 일족의 요시오키가 그러했고, 그 이후로는 외조부님이신 사쿄다이후께서 천하인의 이름을 얻으셨습니다.”
“그랬지.”
“그리고 모두 칼로 천하를 움켜쥐었고…….”
이건 조금 실망인데. 그래도 아직 말이 끝나진 않은 것 같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볼까.
“모두를 자신의 발 아래에 두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어쨌든 모리와 미요시, 도쿠가와는 물론이고 동국의 무사들까지 코가 쿠보라는 이름으로 따로 놓으셨지요.”
다행히 이어지는 말은 정답에 닿아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미나가는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천하는 넓어서 한 사람이 다스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취하신 방법으로 다른 지역을 다스리지 않고도 이익을 얻어내셨으니, 그 방침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인가 합니다.”
“바로 보았다.”
“하지만 이미 천하의 판세는 결정난 것이 아닌지요?”
“천하에 오직 일본만 있는 것은 아니지.”
내 말을 들은 카미나가는 다시 지도를 흘끗 보았다.
“아.”
“조선은 우리의 우방이며, 대국이라 하나 우리를 짓밟을 정도는 되지 못한다. 주션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이 동양에서 유일하게 힘으루 우리를 압도할 수 있는 나라가 있다.”
“명나라군요. 하지만 그들은 외부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그 태도가 언제 바뀔지도 모르는 법이지. 예전에 영락이라는 황제는 환관을 시켜, 대함대를 원정보낸 적이 있었다.”
“하오면 마지막 전쟁이라고 하신 것도……?”
“그래. 저 명나라는 너무 크지. 그걸 나눠놓기 위한 전쟁이다.”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카미나가를 유심히 보았다.
“다행히 어렵진 않을 거다. 그렇지만 스모토를 저번보다도 오래 비워야되겠지. 그동안에 네가 대리를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 말을 들은 카미나가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결코 아버님께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