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후계자 결정(1)
명나라를 안에서부터 쪼개는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동시에 우리 편이라고 할 만한 세력들을 다독이는 것 역시 특별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류큐 왕국은 왕실이 보전된 것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한 번쯤은 반발하지 않을까 싶었던 아이누도 잠잠했다.
예전에 히데요시를 따랐던 자들을 노예로 삼았던 일 때문에 악감정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은 희박한 모양이었다.
백련교는 자기네 뿌리인 정토종의 그늘 아래에 숨어서 조용히 교세를 불려나갔다. 그리고 태평천국(…)은 뜻밖의 잭팟이 터진 덕에, 꼭두각시로 부리는 중이다.
지금처럼 위충현에 대한 공작과 잘 조율하기만 하면, 적어도 광동 일대는 떨어져나가게 만들 수 있겠지.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외국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솔빈으로 간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마츠나가 공. 이번 회의는 주션이 주최하기로 했고, 거기에 삼국의 대표가 모일 참이지요.”
어쨌거나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마츠나가 히사히데만큼 공백을 잘 메워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전장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긴급한 상황에서의 판단만 요구하는 것이 전부일 터, 히사히데가 아무리 늙었더라도 그 정도는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또 다른 듯했다.
“쿠보.”
“말씀하시지요, 마츠나가 공.”
운을 떼고도 잠시 생각하던 히사히데는 자신의 마음을 정리한 듯, 과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니, 직함 다 떼고 말하겠소이다, 동서. 지금 나는 사카이 쿠보의 장수가 아니라, 고니시 가문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말하는 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작심하고 말하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오랫동안 충실하게 따라준 히사히데였기에, 나도 자세를 고치고 정중하게 듣기로 했다.
어쨌거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를 맡기려는 것 역시 히사히데가 나와 가족적으로 연결된 측면이 없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노장이 단단히 각오하고 말하는 거라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흠, 경청하겠습니다.”
“지금 고니시 공은 한창 때요. 아직은 나도 있고, 다른 장수들도 믿을 만하지. 게다가 관료들을 부리는 솜씨는 그 어떤 천하인보다 훌륭하오.”
갑자기 좋은 말을 들으니 오히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소이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내가 공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 거요. 하지만 그 다음은?”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라면 야규 무네요시나 혼다 마사노부도 나쁘지는 않다. 시정봉행도 그럭저럭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관료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을 생각하면 어딘가가 허전했다. 그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히사히데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다른 장수나 관료들 중에 있을 거 같소?”
“체계만 잘 짜놓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내 답을 들은 히사히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지금 내게 빈자리를 맡겨두려는 이유는 대체 뭐요?”
“그야,”
전국 3효웅 중 하나라 불릴 만큼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면서도, 주가(主家)를 충직하게 섬긴 장수라서? 그리고 동서지간이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작게나마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아.”
“나는 고니시 공과 혼맥으로 이어진 사람이라, 공의 권위를 끌어오기도 쉬운 거요. 스스로도 인지하진 못해도 그런 느낌이 없진 않을 거라 생각하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말이었다.
관료제를 정비하고 철두철미하게 인선을 짜놓았다고 해도, 역시 가족만큼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도 힘드니까.
아주 은퇴한 뒤라면 또 모를까, 내가 현직의 사카이 쿠보인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를 세우라는 것인지는 여전히 종잡을 수 없었다.
아내? 히사히데를 제외하면 최적의 인선일 터였다.
스스로가 변장해 가면서 미요시 가문의 후계자 노릇을 한 적도 있었으니, 그 능력만큼은 확실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정체를 드러낸 뒤에는 철저히 내실에만 머무르며 집안일과 아이들의 양육 외에는 따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작해야 의지할 곳이 없었던 친척들의 뒷배를 봐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조차도 미요시 마사야스가 시코쿠의 주인이 된 다음에는 관심을 끊었다던가.
본인이 직접 말한 것도 아니고 닌자들이 수집한 정보였으니, 거짓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 아내에게 갑자기 내 대리를 맡긴다? 남편으로서 못할 짓이 될 터였다.
다음 후보는 형제이기는 한데, 역시 마땅한 인선이 없었다.
형이라는 인간은 나를 따라잡아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다가 최후를 맞았고, 동생들은 철저히 상인으로서만 살아왔다.
만약 빈자리를 맡겨놓는다면, 이때다 하고 옛 에고슈의 다른 거상들과 짝짜꿍해서 해쳐먹기 바쁘겠지.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히사히데가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이제 공의 아들들도 장성하지 않았소이까?”
“에이, 마츠나가 공,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직 어린 아이들인데.”
내 말을 들은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큰 아이가 스물다섯에, 작은 아이도 스물셋 밖에 되지 않았다.
어디 견습으로 돌리면 몰라도, 뭔가 일을 맡기기에는 아직 어리지 않은가?
현대로 치면 이제 대학을 졸업할까 말까한 나이대기도 하고, 그때 나는 뭘 했더라. 아, 시험 준비하느라 정신없을 때였구나.
합격해 놓고 홀라당 전국시대로 왔으니, 아쉽지는…… 않군. 공무원이 아니라 공무원들을 턱끝으로 부리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내 생각의 방향이 한없이 넓어지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히사히데가 재차 입을 열었다.
“고니시 공.”
“아, 잠시 예전 생각을 하느라. 그래도 지금 제 공백을 맡기기에는 조금…….”
“나이가 걸리십니까?”
“아무래도 그렇지요.”
당연한 질문에 당연하게 대답했지만, 히사히데의 얼굴은 서서히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제가 아는 누구는 겐푸쿠(元服 원복, 일본의 성인식에 해당하는 의례)를 치르기도 전에 천하를 움켜쥔 사람과 담판을 짓고, 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서 관직까지 받았는데 혹시 기억하시오?”
“글쎄요? 뭔가 익숙한 이야기이기는 한데, 얼른 떠오르질 않는군요. 잠시만 기다려보시지요.”
“농담이나 하자는 게 아니외다.”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럽니다.”
“하아,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만. 이거 다 고니시 공 이야깁니다.”
그랬던가? 어디 보자……. 맞긴 맞는데, 근데 내가 그렇게 어렸을 때의 일이던가?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쳤을 뿐인데.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고니시 공 같지는 않을 거요. 자제분들도 그때의 공을 넘어서긴 어렵겠고…….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슬슬 앞으로의 일을 준비할 때라고 생각하외다.”
경험이 일천하니 부족함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들들 역시 내 권위에 기댈 수 있는 존재인 만큼, 사람을 붙여서 일을 맡겨보자. 히사히데의 주장은 그러했다.
“사실 스물다섯이면 너무 늦은 거 아니오이까. 모두가 고니시 공 같을 수는 없지만, 나도 열여섯 무렵에는 전장에 섰소.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고.”
“알겠습니다.”
히사히데를 돌려보낸 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스물다섯과 스물셋.
확실히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아 보이는 나이였지만, 이 시대의 기준으로는 아니긴 했다.
아마 내 자식들이라서 색안경을 끼고 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에게만 양육을 맡겨놓은 감도 없지는 않았다.
“이거 조금 찔리는데.”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찔린다. 그나마 히사히데가 말해 준 덕에 더 늦지 않은 게 다행일 터였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떤 일을 맡긴단 말인가. 물론 장자승계의 원칙에 의하면 당연히 첫째에게 맡겨야겠지만, 무작정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부친으로서는 실격이로군.”
누가 어떤 자질을 지녔는지도 모르고 머리나 싸매는 꼴이라니.
나는 고민 끝에 다시 히사히데를 불러들였다.
“마츠나가 공의 말을 듣고 계속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당장 아들들에게 덥석 중임을 맡기기는 어려워서 말입니다. 일단 이번까지는 마츠나가 공이 좀 도와주시지요.”
“그건 어쩔 수 없겠구려. 알겠소만…….”
“대신 아이들 중 하나를 보좌해 주는 형식으로 부탁드립니다.”
내 말을 들은 히사히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거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란 없는 법이잖소이까.”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가까운 친족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입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답을 드리겠소.”
좀 찔리는 게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히사히데는 부친의 시선이 아니라 좀 더 객관적으로 아이들을 보았을 터였다. 그의 판단은 어떨까.
“누가 제 뒤를 이을 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내가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오.”
질문을 받은 동서는 딱 선을 그었다.
“오직 고니시 공만이 정할 수 있는 일이외다.”
“일 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관점이 필요하니, 마츠나가 공이 본 성향이라도 좀 이야기해 주시지요.”
이것까지 뿌리칠 수 없었는지, 히사히데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글자를 적었다.
“武(무)와 文(문)?”
“그렇소. 장남은 무에 능하고 차남은 문에 능하니, 나머지는 공이 판단할 몫이오.”
꽤 까다로운 이야기였다.
두 아이 중 하나가 야심이 없는 상태라면 또 모를까, 문과 무는 모두 권력을 쥔 사람에게 필요한 소양이었다.
“흐음, 알겠습니다.”
이미 밤은 깊어서 또 누군가를 부르긴 곤란했다. 히사히데를 돌려보내고, 나도 일단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두 아들들을 호출했다.
첫째인 카미나가(伯長 백장), 그리고 둘째 츠키나가(次長 차장)는 금방 내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어서들 오거라.”
천천히 뜯어보니, 과연 아이들의 인상은 히사히데가 말한 대로였다. 그냥 어리게만 봤는데, 자세히 볼수록 특징적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첫째는 체격부터가 무사에 가까웠고, 둘째는 선비의 풍모가 있었다.
아명은 벤텐마루(弁天丸)와 지자이마루(自在丸). 각각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변재천과 무력의 최고봉이라는 대자재천에서 따온 것인데, 성장한 결과는 서로 반대 방향인 듯했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까닭은, 이제 슬슬 후사를 정할 때가 되었다 싶어서다.”
정확히는 자리를 비울 동안의 대리인으로 누굴 세울 것인가를 정하기 위해서지만, 달리 말하면 그게 곧 후계자가 아니던가.
내 말을 들은 아들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확실히 둘 다 야심은 있는 듯했다. 내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지금 이 말을 듣고 한 발짝 물러섰으리라.
“그 전에 너희들의 생각을 듣고 싶구나. 본래 장자승계가 원칙이기는 하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달리도 정할 수 있는 법이니.”
내 말을 들은 아들들은 눈을 빛냈다. 특히 차남에게서 강렬한 열망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