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천하경영(3)
“어이구, 어서 오시게.”
일곱 번째 단조는 사람 좋은 얼굴로 청년들을 맞아들였다. 하나는 전에 다녀갔던 이들 중 하나였고, 나머지는 그 친구들이라 했다.
“지난번에 보고 다시 동무들과 왔습니다. 상제님의 말씀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많이 울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가르침이었지요.”
“교리도 너무 좋았습니다. 진정한 상제님을 모르고 살아온 세월이 후회스럽기만 할 정도로요. 정말 천왕께서는 위대하십니다!”
웃음이 새어나올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신분을 감춘 닌자는 그조차도 반가움으로 애써 포장했다.
“고맙소, 고맙소. 청년들은 한족의 미래요! 주변 사람들을 많이많이 데리고 오시오. 우리는 다른 사이비들과 달리 돈도 받지 않소. 와서 좋은 말씀이나 듣고 가라고 하시구려.”
한 무리의 청년들을 회당으로 들여보낸 단조는 상제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아, 대장.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거 맞습니까?”
교주로 꾸민 부하가 상관을 보고 푸념했다. 그러나 단조는 이보다 더한 꼴도 많이 겪었다. 그런 점에서 부하 녀석의 걱정은 배부른 투정에 불과할 터였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이다.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 마음 놓고 연기에나 집중해라.”
“후우우……. 알겠습니다, 대장.”
교주 역할을 맡은 닌자는 때맞춰 군중 앞에 나섰다.
- 와아아아아!
- 천왕님이시다!
- 저 좀 봐 주세요, 상제의 아들이시여!
- 나, 나를 보셨어! 저도 태평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어리석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러나 그렇게 유도한 것은 다름 아닌 그와 동료들이었다.
닌자는 심호흡을 한 뒤, 대본대로 설법을 시작했다.
“여러분, 님이 무엇입니까? 님은 바로 상제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 와아아아!!!
군중들이 열광하는 뒤편에서, 단조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세금을 또 올린다고 합니다, 대장.”
“그렇겠지. 다른 소문은?”
다른 부하들이 주변에서 정보를 모아왔다.
“대운하 복구가 늦어지는 게 천벌 때문이랍니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서 복구한 구역을 다시 부숴 버린다는 소문이 파다하지요.”
“발각되진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대운하는 아주 길다. 그 모든 구역을 빈틈없이 지키려면, 역시 수백만은 필요할 터였다.
지난 전쟁 당시에 닌자들의 주인이 직접 무너뜨렸던 구간은 대강 복구가 끝났지만, 닌자들의 공작으로 다시 여러 구간이 못 쓰게 되고 있었다.
“좋군. 다음 사람.”
“예, 대장. 참언이 돌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오랫동안 천하가 합쳐져 있었으니, 다시 나눠질 운명이라고 하더군요.”
“조정이나 황실의 반응은?”
“뭐, 항상 똑같습니다. 조정은 산발적으로 억누르려고 하고, 황제는 그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지요.”
그 모든 일의 뒤편에는 그들의 주인이 보낸 닌자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만약 도시 하나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면 진작에 발각되었겠지만, 천하는 넓고 성겨서 빈틈이 너무나도 많았다.
“저 녀석에게도 조만간 말을 해 놔야겠구만. 슬슬 조정에 대한 불만을 부추기라고 말이야.”
“조금은 이르지 않겠습니까?”
부하들은 오직 일곱 번째 조만이 봉기를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조가 판단하기에는 이제부터 슬슬 박차를 가할 때였다.
“처음에는 세금에 관한 걸로 이야기를 해야지. 그리고 북경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적당히 각색하면 될 거다.”
여섯 번째 단조는 쿠보가 보낸 승려와 함께 백련교를 물들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남경과 아주 가까우니, 시선은 충분히 끌어줄 터였다.
애초에 쿠보의 계획도 그러했으니, 거기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걱정할 거 없다. 시작해.”
* * *
사부로는 상회의 대방에게 불려갔다. 예전에는 그도 상관에게 신뢰받는 행수였지만, 대방이 바뀌면서 찬밥 신세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신뢰하는 부하라고 해도, 결국 혈족을 이기기는 어려운 법. 그렇게 상단의 주인이 바뀐 뒤에는 사부로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조선에서 온 속담처럼,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니던가. 돈 나갈 일은 늘어나는데, 지금의 직장을 버리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는 불편함을 감추고 대방에게 고개를 숙였다.
“찾으셨습니까, 대방 어른.”
“자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네.”
대방은 사부로에게 문서 하나를 툭 내던졌다.
“이번에 쿠보께서 히젠에 새로 공장을 세우라고 하시더군.”
“히젠에…….”
히젠이라면 큐슈 서부의 벽지가 아니던가. 땅이 좀 기름진 편이라고는 하지만, 사부로나 그가 속한 상단은 농사와 무관했다.
굳이 이러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사부로에게 좋지 않은 징조였다.
“여러 가지로 지원을 해주신다고는 하셨지만,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듯하여 특별히 자네를 부른 것일세.”
쿠보가 요구한 일인만큼 아무나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상회에 봉직하며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이 필요하다.
일단 명목은 그러했지만, 사부로는 그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히젠은 긴키 지방에서 아주 멀지 않은가. 하여 아예 상단의 일부를 좀 나눠놓을까 하네.”
그리고 사부로가 히젠으로 분리된 상단의 총책임자를 맡으라는 제안이었다.
옛날에는 사환을 눈여겨본 상회 주인이 더러 기반을 떼 주고 독립을 시켜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미담도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행수가 받은 제안은 차라리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것에 가까웠다.
“도방 어른. 저도 부양할 가족들이 있는데, 조금만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일세. 자네도 언제까지 남 밑에서만 있을 텐가.”
남 밑이라고는 해도 다나카 상회쯤 되고 보면, 일본 전역을 주름잡는 거인이었다.
반면 벽촌의 공장에는 일할 사람도 많지 않을 터, 그런 곳에 가라는 것은 사실상 말라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그렇게 정했으니, 자네가 맡았던 일은 마모루 군에게 넘기도록 하게.”
도방이 말한 마모루는 다름 아닌 도방의 조카였다. 그리고 그에게 넘겨야 할 일이라는 것은 바로 조선과의 교역, 상회 내에서도 알짜배기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물러나야 하는구나. 결국 사부로는 도방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집은 좀 줄여야 할 것 같고, 하인 몇 사람도 좀 내보내야겠군. 상황을 받아들인 그는 상회의 마지막 지시를 수행했다.
“이건 히젠의 대관에게 지불해야 할 공장 대금일세.”
이미 공장은 지어져 있다고 했다.
사카이 쿠보가 히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다고 했던가. 보통은 상인들에게 부지나 제공하고 나머지를 알아서 하게 둘 터였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국책 사업에 끼어드는 모양새였지만, 실상은 유배를 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은자가 담긴 상자를 보며, 사부로는 분을 억지로 눌러 담았다. 이걸 들고 튀어 버릴까도 생각을 했지만, 그렇게 해서 갈 곳은 어디에 있겠는가.
하물며 그의 몫으로 받은 것도 아니고, 전달해야 할 돈이었다.
그나마 사환 몇 사람을 붙여준 것이 상회의 마지막 배려였을까.
하지만 그들 모두가 히젠 출신이라는 것을 보면, 역시 상회에서도 별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아니, 애초에 기대를 했으면 분리한다는 조치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일단 가족들에게는 단순히 출장이라고만 해두고, 사부로는 히젠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어쨌든 이사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기도 했고, 여차하면 몸만이라도 빠져나올 속셈이었던 것이다.
“나카사키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속도 모르는 선원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상인은 애써 웃으면서 답했다.
“이번에 상회에서 나카사키에 공장을 세웠다더군요. 그곳의 책임자로 갑니다.”
“오, 잘 된 일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좌천이 축하받을 일이냐고 쏴붙이고 싶었지만, 사부로는 일단 참았다.
“거긴 쿠보께서도 관심이 많으시다고 하더군요. 공장도 아주 심혈을 기울여서 지어졌다고 하니, 금방 떼돈을 버실 겁니다.”
“아, 예.”
그냥 남이니까 좋은 말이나 했을 터였다. 다나카 상회의 행수였던 상인은 그렇게 선원의 말을 흘려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나카사키의 공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후나이 도방.”
“도방이요? 아, 네, 제가 후나이 사부로입니다.”
대관은 사부로를 반갑게 맞이했다. 좌천된 사람을 홀대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은자는 알맞게 보냈군요. 영수증은 스모토의 다나카 상회로 바로 보내겠습니다. 이제 공장으로 가실까요.”
종류도 하필이면 직조공장이라고 했다. 그나마 곡물이나 해산물을 말리는 건조장이라면 또 모를까, 이건 적당히 쿠보에게 성의만 보이고 사부로를 팽하겠다는 의도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쿠보의 대관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사부로는 순순히 그를 따랐다.
우웅- 그들이 공장 가까이에 갈수록 소음이 상당히 컸다.
“사람이 꽤 많은 모양입니다?”
“글쎄요. 직공 백 명이 전부라서…….”
대체로 사람이 직접 직조기를 움직이기도 했지만, 더러는 수력이나 축력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변에 개천이 흐르기는 했어도, 공장의 동력으로 쓰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그렇다면 얼마 전에 품종을 개량했다던 소라도 쓰는 것일까.
지금처럼 소음이 웅장할 정도라면, 고작 직공 백 명 수준은 아닐 터였다.
“그럼 저 안에는 뭐가 기계를 돌립니까? 고작 백여 명으로는 턱없이 모자랄 것 같은데요.”
“일단 보시지요.”
안에는 철커덕거리며 직조기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동력을 제공하는 역부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건…….”
“음, 도방께서는 이제 이 공장의 주인이시니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여기에는 아주 특별한 것이 있지요. 사람이나 가축, 물레방아를 돌리지 않고도 기계가 돌아갑니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놀란 사부로에게 대관은 한 눈을 찡끗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쿠보께서 특별히 고안해내신 기계를 쓰거든요.”
“허어…….”
“대신에 그 기계의 관리는 저나 다른 대관들이 맡을 겁니다. 도방께서는 두 가지에만 신경 쓰시면 되구요.”
직공의 관리와 판로 확보. 도방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 사부로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나 가축을 쓰지 않고도 기계를 돌린단 말씀이십니까?”
상인이 기억하는 공장은 조금 달랐다.
힘 좋은 역부가 도르레에 달라붙어서 장치를 움직이고, 그에 맞춰서 숙련된 직공이 물건을 뽑아내는 식이었다.
이 정도면 꽤 대규모 공장이었고, 보통은 직공이 자신의 힘으로 직접 기계를 움직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카사키의 공장에서는 이 거대한 과정에서 중요한 과정이 그대로 생략되어 있었다.
“혹시 오니라도 붙잡아두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하지만 너무 관심을 갖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도방.”
히젠의 대관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목에 손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나 평생 방방곡곡을 누빈 상인에게 그런 정도의 자제력은 있었다.
이건 기회다. 사부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