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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212화 (212/225)

212화 합구필분(3)

척계광은 바다를 보며 분루를 삼켰다. 전쟁은 제대로 끝나지도 않았건만. 오랑캐들은 요동을 자신들의 땅으로 굳혀 가고 있었고, 거기에 자신은 손을 쓸 수조차 없었다.

조선으로 나갔던 병력은 극히 일부만이 살아 돌아왔고,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가까스로 한 마디만 할 수 있었다.

“수고가… 많으셨소.”

“수고라고 할 게 무어겠소이까. 그저 면목이 없을 따름이오.”

송응창은 자결했고 지금 조선 원정군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조승훈이었다. 그러나 명목만 원정군의 귀환일 뿐, 사실상 몇몇 장수들만이 선심 쓰듯 풀려난 상태였다.

패잔병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 중 한 노인이 조승훈을 찾았다.

“정말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란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총병 어른.”

조승훈이 총병으로 참전했다고는 하지만, 원래는 부총병으로서 그 자리를 대행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공손히 ‘총병 어른’이라고 할 노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전임 요동총병 이성량. 그는 탄핵을 받아서 북경에 갇혀 있다가, 얼마 전에 겨우 자유의 몸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터전이었던 요양성 일대는 이제 조선의 차지가 되고 말았고, 그저 아들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노인 신세에 불과했다.

이제 유일한 희망은 아들들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그조차도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내 아들들은, 내 아들들은 어찌된 겐가! 내 호랑이 같은 자식들이 모두 죽었을 리는 없을 테고…….”

“누르하치, 그자가 끝까지 붙잡은 바람에 풀려나지, 총병 어른!”

그러나 조승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성량은 그대로 실신해 버리고 말았다.

한때는 요동에서 왕 노릇을 했던 그도, 아니 그랬기에 더더욱 충격을 크게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옛날, 누르하치의 조부인 기오칭가와 부친 탁시의 죽음은 그가 꾸몄던 일이었기에. 비록 겉으로는 한사코 부정했지만, 누르하치도 힘에 눌려 입을 다물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제 이성량의 아들들을 누르하치가 붙잡고 풀어주지 않았다면, 결말은 하나밖에 없을 터였다.

이성량은 그대로 혼절한 상태로 병석에 누웠다가 분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촌극이 벌어지는 중에도 살아돌아온 자들은 산해관에만 머물러야 했다.

“패군지장은 산해관에 머무르며 죄를 씻으라는 황명이 내렸소이다.”

물론 그 어명의 뒤에 누가 있는지, 척계광도 모르지 않았다. 위충현, 그 환관이 최대한 패전을 감추기 위해 손을 써 놓은 것이다.

분명 목숨만은 건졌다는 점에서, 척계광 본인이나 살아돌아온 조선 원정군의 장수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일 터였다.

그러나 명나라 전체의 차원에서는 요동의 일을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태감께 말을 좀 전해 주게. 이대로 있다가는 오랑캐들의 세만 더해질 뿐일세.”

“흠, 말씀은 드려 보지요.”

그러나 자금성에서 돌아온 답은 없었고, 그들은 장성에 조금씩 균열이 가는 것만을 봐야 했다.

“여진족이 편관(偏關)과 영무관(寧武關) 사이를 공격하고 있다 합니다!”

“영하성이 몽고족에게 넘어갔습니다, 장군!”

북경의 조정에서는 어떠한 선제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무너진 장성만 수축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척계광이 보기에, 그저 패망을 늦추는 지연책에 불과했다.

지금의 장성은 북경에 너무나도 가까웠고, 아차하는 순간에 오랑캐가 도성을 넘볼 터였다. 바로 얼마 전에도 저들이 직례를 범하지 않았던가.

요동을 탈환하지는 못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방비해야 한다고 생각한 척계광은 여러 차례 위충현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알았다고 답은 돌아와도, 달리 조치가 취해지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산해관과 요양성의 중간쯤에는 치고 들어갈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해야 한다.”

장성을 넘보는 오랑캐는 몽고나 여진이지만, 그들이 조선과 손을 잡은 것만은 확실했다. 이쪽에서 역으로 요동을 위협한다면, 저들도 멀리까지는 신경 쓰지 못하리라.

그러나 지금 척계광이나 다른 장수들의 재량권으로는 고작해야 현상유지나 가능했다. 성을 새로 짓고 대군을 일으키는 대사업은 반드시 황제의 재가를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척계광은 끝내 죽음을 각오하고 상경하겠다고 나섰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내가 직접 도성으로 올라가, 위 태감과 이야기를 해야겠네.”

“하지만 황명이…….”

“그 황명도 결국은 그가 움직인 것이지.”

그는 서민으로 변복을 한 다음, 정체를 감추고 북경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위충현의 집을 찾아갔다.

“나, 척계광일세. 태감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전해 주시게.”

불청객은 바짝 긴장했지만, 의외로 주인은 선선히 방문을 받았다. 하인은 그를 내실로 안내했다.

독한 향기가 자욱한 가운데, 환관은 이상한 기물을 입에 물고 있었다.

“아, 척 장군 아니신가.”

이제는 숫제 하대를 하고 있었지만, 척계광은 개의치 않고 본론을 꺼냈다.

“위 태감, 오랑캐의 성세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소. 서둘러 대책을…….”

“그거 장군들이 패배하면서 기세나 올려줬기 때문이 아닌가?”

“태감!”

“따로 책임을 묻진 않겠지만, 돌아가서 산해관이나 지키시게. 얘야, 손님 나가신다.”

위충현은 축객령을 내리고, 하인들을 불러서 강제로 손님을 내보냈다.

척계광이 노련한 장수라고는 하지만, 이제 그도 늙은 몸. 고작 환관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뿌리칠 힘은 없었기에, 그대로 맥없이 끌려 나가고 말았다.

한때 북로남왜를 격파하며 전장을 누볐던 장수는 이제 굳게 닫힌 권세가의 대문 앞에서 눈물만 뿌렸다.

“이제 명나라도 끝이구나! 흐으으, 으윽!”

노구에 심신이 무리한 까닭이었을까. 그는 목 놓아 울다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북경 저자에 초라한 노인의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그는 그대로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거두었다.

*       *       *

광동에서부터 통주에 이르기까지 해적들의 노략질은 유례없이 극심했다.

예전에는 왜구가 가장 무서웠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무서운 남만구가 사납게 날뛰고 있었다. 물론 그 뒤에 왜국의 집정이 있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모두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승려 하나가 광주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에 조용히 내렸다.

“이곳이 정토진종의 기원이란 말인가.”

소지(宗二). 한때는 임제종에 속했지만, 스승을 따라 일향종으로 전향했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사카이 쿠보와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겼다.

- 소에키 선사께서 돌아가셨다고……. 알겠네. 그래도 이렇게 소식을 전해 주어 다행이군. 달리 남기신 말씀은 없는가?

- 예, 쿠보.

소지의 스승이자 일향종의 개혁을 이끌었던 센 리큐는 얼마 전에 평온하게 입적했다.

비록 카가 국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고 이곳에 묻히겠다고 유언을 남겼지만, 옛 사카이 시절의 지인들에게 부고를 알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 소에키 선사께는 나도 많은 신세를 졌지. 그래서 일향종의 잔당을 따로 건드리진 않았네.

- 알고 있습니다.

- 그 교리에도 나름 관심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지나칠 정도로 급진적인 면이 없지는 않아.

일향종은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그 사상과 교리는 지배층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기에.

그리고 소에키에게 영향을 주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조차도 일향종을 두고 지켜보기만 할 뿐, 크게 도움을 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난 행보를 보면, 일향종의 확산을 경계하는 것에 가까웠다.

소지 역시도 그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스승에게 직접 영향을 받았던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언젠가는 일향종이 원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은 아닌 모양이더군.

- 저희 스승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지요.

-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 스승님의 가르침을 지켜나가기 위해 애쓸 따름입니다.

소지의 말을 들은 사카이 쿠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향종을 아주 믿을 수는 없다고 했다.

일향종을 열었던 신란(親鸞 친란)도 처음의 뜻은 어떤지 모르지만, 후대로 갈수록 다른 다이묘와 다를 바 없게 되지 않았던가.

그 부분은 소지 역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그래서 내가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하네.

- 만약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실 셈입니까?

-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걸세. 하지만 앞으로 일향종이 엇나가게 된다면…….

사카이 쿠보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먹 쥔 손에서 엄지를 아래로 폈다. 요즘 유행하는 남만 풍속 중 하나로, 죽음을 의미하는 손짓이었다.

- 쿠보,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해치시렵니까!

- 말했잖은가. 그리고 자네도 혼간지의 타락상은 보았을 텐데. 하지만 나 역시도 일향종의 가능성을 내버리고 싶진 않네.

사카이 쿠보는 그렇게 말하며, 명나라의 정토종에 관해 이야기했다. 일향종은 원래 정토종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였기에, 소지도 나름 관심이 있는 내용이었다.

- 정토종이 좀 그런 면이 있는지, 명나라 황실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고 하더군. 그들과 접촉해서 지금의 일향종처럼 바꿔놓을 수 있다면, 조금쯤은 마음을 놓을 수 있겠지.

그러면 자신은 일향종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절대 카가 국만큼은 건드리지 않겠다. 후대의 쿠보들에게도 유지로 남길 것이다.

일본의 최고 실권자는 그렇게 약속했다. 소지는 다소 억지스러운 요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해서 일향종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면 나쁠 것도 없을 터였다.

제안을 받아들인 승려에게 쿠보는 새로운 정보를 풀었다.

- 일본에도 정토종이 여럿으로 나뉘었듯이, 명나라에서도 비슷하게 된 모양일세. 그 중에서 일향종과 가장 궤적이 비슷한 종파가 있으니, 그들과 접촉하게.

쿠보는 소지가 명나라 말을 익히게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완전히 현지인처럼 언어를 구사하게 되자, 곧바로 광주에 보낸 것이다.

회상을 마친 그는 목표를 소리 내어 말하면서 되새겼다.

“백련교라……. 필시 숨어 지내고 있을 것이니, 꽤 오래 걸리겠군.”

명나라는 일본과 사정이 다르다고 했다. 그토록 탄압을 받았다면, 찾기 어려운 곳에 숨어 있을 터였다.

일단 정토종의 사찰을 찾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리라. 소지는 앞으로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를 명나라로 보낸 자는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대강의 위치는 파악해 두었습니다.”

“그렇소?”

안내역을 맡은 닌자는 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굳이 소지가 일일이 찾아다닐 필요도 없다고 했다.

“이미 그쪽과는 이야기를 모두 끝내 놓았습니다. 소지 선사께서는 정토종의 맥을 찾으러 온 학승으로 행세하시면 됩니다.”

“허어…….”

소지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고 말았다. 이미 많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다면, 하필 자신이 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래도 이왕 먼 길을 왔으니, 헛걸음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소지는 닌자의 안내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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