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전후처리(1)
처음에 명군은 통행료를 내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일부만이라도 살려 보내달라고, 계속해서 에누리를 걸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도 허사였다.
- 降則降矣 不降則死也
(항복하려면 항복하고, 그게 아니면 죽어라.)
나는 아홉 글자를 깃발에 적어 내걸고, 그들의 후방으로 접근했다. 원래는 이게 아니긴 하지만, 뭐 동래성도 아닌데 상관없겠지.
그리고 가끔씩 병사들을 보내서 적진에 고함을 지르게 했다.
- 싸움을 계속하면, 너희는 몰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 요행히 살아난다 해도, 바다 건너에서 평생을 노예로 부리겠다!
마지막으로 사기를 꺾어 놓기 위한 밑작업이었다.
아무리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수만이 헤까닥 눈이 돌아가 버리는 사태는 무서웠으니까.
그러나 가끔은 도를 넘어서 뇌절을 치는 자들도 나왔다. 근데 그거 닌술 아니었나. 어쨌거나 무사들 중에서도 최근에 편입된 자들이 주로 그러했다.
- 네 녀석들을 몽땅 도축해 버리겠다! 명나라 돼지 놈들 고기가 그렇게 맛있다더라!
“저거 누구야? 당장 끌어내!”
모리 군 소속으로 참전한 타치바나 일족이라 했던가. 구체적인 이름은 기억할 가치도 없었다.
정작 그 우두머리인 타치바나 무네시게 본인도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순순히 그자를 내놓았다.
“송구스럽습니다, 쿠보.”
“자네는 멀쩡한 것 같은데, 일족 중에 망나니가 있었군.”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무네시게에게서 시선을 돌린 뒤, 광인에게 판결을 내렸다.
“야만의 시대는 이제 끝이다. 아무리 적에게 최대한의 공포를 심어 주라 했지만,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리다니……. 제 정신인가?”
“시, 실언했습니다, 쿠보!”
“너 같은 녀석을 죽이는 것 또한 야만이겠지. 여기는 조선이니, 조선의 방식을 쓸 것이다. 곤장 이백 대를 치고, 명군 쪽으로 추방해 버려라!”
그렇게 약간의 촌극을 수습하는 동안, 명나라 진영에서는 진짜로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미 군마들은 죄다 도축된 듯했고, 슬금슬금 병사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아무리 다리 넷 달린 건 탁자랑 의자 빼고 다 먹는다는 족속이라지만 설마 그건 아니겠지. 어차피 이쪽에서 벌이는 만행은 아니니까 상관은 없긴 하겠지만.
그러다가 마침내 경략 송응창의 명의로 이쪽에도 제안이 들어왔다.
- 뇌물을 바칠 것이니, 조선 측에 말을 좀 해주시오. 그게 아니더라도 공방께서는 배가 많다 하니, 우리를 빼돌려줄 수 있지 않겟소이까.
당연히 거절했다. 이제 와서 조선과의 신의를 저버린다? 웃기지도 않을 이야기였다. 나는 밀사에게 앞서 내걸었던 깃발을 다시 보여주고는 그대로 내쫓았다.
끝까지 몰아세우자, 명군의 반응은 신속하게 나왔다.
송응창이 직접 백기를 들고 진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조선군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저쪽에서도 그걸 보았는지, 압록강 너머에서 파발마가 달려왔다.
“공방, 병사 영감께서 공방을 청하라 하셨습니다.”
“알겠네.”
* * *
협상의 내용은 내가 이전에 들었던 것에 비해서 아주 간소해졌다.
항복 자체는 기정사실이었고, 이제 그 다음에 명군이 받을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내용이 주로 논의되었다.
물론 무장해제를 시킨 다음에는 이쪽에서 입을 싹 닦아도 할 말이야 없겠지만, 조선은 대의명분의 나라였고 나 역시 선례를 만들기 위해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하려 했다.
“포로는 바다를 건너지 않는다……. 이거 참, 일본도 사람 사는 곳인데 말입니다.”
“뭐, 항복하는 입장에서야 불안할 수도 있지 않겠소. 이해는 가오.”
고위 인사들은 몸값을 받고 풀어주되, 병사들의 처우는 그대로 종살이가 확정되었다.
그나마 일본으로 끌려가는 것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조차 거부될 경우에는 싸우다 죽겠노라며 언성을 높였다.
좌의정 겸 비변사 도제조라는 이원익이 내게 슬쩍 질문 아닌 질문을 해 왔다.
“하지만 공방께서 잡은 포로의 숫자도 적지 않잖습니까. 게다가 마지막에도 명군을 압박하셨으니, 그만큼은 받아 가셔야지요.”
명군의 요구대로 하자면, 내가 건지는 것은 거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일단 포로를 받는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꼭 일본으로만 끌고 가야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전자야 저들이 논할 바가 아니고, 후자도 나름 방법은 있으니 안심하시구려.”
그리고 내가 제안을 꺼내기도 전에, 나와 같이 있었던 누르하치가 덥썩 나섰다.
“마침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는데, 제가 전부 사들이도록 하지요.”
“여진의 땅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에는 좀 춥지 않은가?”
“광산에 밀어 넣을 생각입니다, 형님.”
그렇게 대강의 협상은 일단락되었고, 이제 당사자들끼리 확정을 지을 일만 남았다.
“명나라 조정은 요즘 어떻게 돌아간답니까?”
“황제는 칩거한 채로 정사를 내팽개쳤다더군. 그리고 모든 병력을 장성에 집중시킨다 하던데.”
“그렇다면 요동은 비었겠군요.”
이원익이 눈을 빛냈다. 조선은 이번 전쟁을 끝낸 뒤, 아예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눈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그걸 반길 리는 없었다.
“잠깐, 요동은 원래 여진의 땅이었소. 게다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세운 공을 잊진 마시구려.”
가장 많이 피를 흘린 것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조선이었지만, 북경 일대를 들쑤셔서 원군을 차단한 것은 여진이다.
그러니 그만큼의 지분은 받아갈 자격이 있다는 게 누르하치의 주장이었다.
조선의 대신과 여진의 우두머리는 서로를 노려보다, 갑자기 내 쪽으로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형님!”
“공방.”
맙소사. 내가 중재를 해야 한다고?
조선은 명실상부한 제일의 동반자였고, 누르하치는 나를 형님으로 모시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교역이라는 측면에서도 잠재성까지 모두 따지면 어느 쪽도 소홀히할 수는 없는 상대였다.
나는 일단 그들의 달아오른 머리에 찬물을 끼얹었다.
“우리는 이제 첫 번째 침공군을 격퇴했을 뿐이오. 황제가 칩거 중이라고는 하나,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모를 일이지. 그렇지 않소이까?”
아직 전쟁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주지시키자, 양쪽 모두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만 했다.
“그, 그렇지요.”
“아우의 생각이 너무 성급했습니다.”
땅에 대한 욕심이야 차고도 넘칠 터였지만, 뒷감당을 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법이다. 그게 내 평생의 지침이기도 했지만, 국가 경영의 진리이기도 했다.
“이보게, 누르하치 아우.”
“예, 형님.”
“아우가 요동을 차지했다고 하세. 그러면 명이 공격해왔을 때, 막아낼 자신이 있는가?”
내 질문을 받은 누르하치는 이리저리 재보다가 답했다.
“형님께서 교역을 끊지만 않으신다면 어떻게든 가능은 하겠지요.”
고구려처럼 청야전술이라도 벌이려는 것인지, 그는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러나 과연 그 광대한 땅에 여진족이 뿔뿔이 흩어진다면, 누르하치가 전부 통제할 수 있을까.
“지금 여진의 인구는 어찌 되기에?”
“50만을 넘지 못합니다…….”
“그들이 요동까지 전부 채울 수 있는가?”
“없지요.”
물론 나중에 가면 그 머릿수만 가지고 중원까지 정복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행운이 따라준 결과가 아니던가. 산해관도 함락시킨 게 아니라 안에서 열어준 거나 마찬가지였고.
내 말을 들은 누르하치는 풀죽은 표정을 지었다. 아쉽겠지만, 이번에는 조선에 양보를 좀 하게나, 아우님.
“일단 요동은 조선의 몫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이 전쟁은 우리 모두가 기여했으니, 그만큼의 몫은 주장할 수 있을 거라 보오만.”
“공방께서는 어떤 고견을 주시려 하십니까?”
“요동을 특별 구역으로 설정하시오.”
영유는 조선이 하되, 일본이나 여진이 같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라. 이게 내가 내놓은 해법이었다.
“나 역시 지분은 주장할 수 있을 거요. 그렇지 않소이까, 도제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멀리 바다를 건너고 조선 땅을 중간에 끼워가면서 내가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어불성설일 거요.”
이원익도, 누르하치도 모두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진은 인구가 부족하니 그 자체로 요동을 온전히 지키긴 어려울 거고, 조선 역시 명의 공격을 홀로 막아내려면 곤란한 일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하외다.”
조선이 온전히 요동을 독식하면,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나중이 문제가 될 가능성도 매우 컸다.
어쩌면 홀로 명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건 결국 고구려 멸망의 수순을 다시 밟는 꼴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요동에 삼국의 이권이 모두 걸려 있다면, 이 지역을 상실하는 것 자체가 모두의 문제겠지.”
“누구도 소홀히 할 수는 없겠군요, 형님.”
“바로 그거다.”
누르하치는 내 제안에 선뜻 찬성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원익은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제 짧은 소견으로도 공방의 주장이 합당하다 생각합니다만, 우선 전하께 아뢰어야겠기에…….”
“그러시오.”
여진은 만족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조선도 긍정적인 반응으로 물러난 가운데, 나는 군막에 홀로 앉아 지도를 보았다.
만약 내 구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굳어진다면…….
“생각해보니까, 이거 완전 만반열도 아닌가?”
* * *
극동은 오히려 소강상태에 들어간 반면, 영하성의 보바이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분명, 명나라 황제는 정사에서 손을 놓았다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찌 이렇게 대군이 몰려와서…….”
영하성 밖은 온통 명군 천지였다. 아직은 북문이 그나마 뚫려 있지만, 조만간 사방이 모두 포위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황제가 칩거했다고는 해도, 실권자가 방침을 정하면 그대로 돌아가게 마련인 법. 지금 자금성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 위충현은 장성을 굳게 닫아걸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리고 영하성 역시 장성의 일부. 게다가 여진족이 이곳으로 넘어오기도 했으니, 반드시 탈환해서 단단히 막아 두기로 한 것이다.
당황한 보바이는 일본국 쿠보가 파견한 단조라는 자를 찾았다.
“이봐, 단조! 대체 어찌된 것인가!”
“그렇잖아도 장군을 뵈려 했습니다. 아무래도 속히 몸을 빼셔야겠더군요.”
“뭐라고? 분명 쿠보는 나를 후원해 주겠다 하지 않았나!”
남쪽 것들은 간교하여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하더니, 섬나라 오랑캐도 마찬가지인가. 보바이는 덜컥 의심부터 품었다.
그러나 단조는 차근차근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금 명나라 조정이 방침을 바꾸면서, 장성만 지키기로 했답니다. 그러니 일단 영하성은 포기하시고, 후일을 도모하시지요.”
단조는 자신의 주군이 보바이를 계속 후원할 거라고 안심시키면서, 영하성을 포기하라고 제안했다.
“그게 쿠보의 전언인가?”
“그렇진 않습니다. 저희가 명나라 조정의 방침을 확인한 뒤,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지요. 하지만 후원을 끊지 않겠다는 것은 명백히 주인님의 뜻이십니다.”
“끙……. 알겠다. 일단 살고 볼 일이겠지.”
보바이는 자신의 야심을 나중으로 미루기로 정하고, 야음을 틈타 영하성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