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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207화 (207/225)

207화 계사록: 조선의 반격(5)

“경략께서 조선의 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소.”

협상을 하자는 이야기였다. 장수들의 의견은 찬반으로 나뉘었다.

“영감, 이제 궁지에 몰리니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군의 뒤에서 구원군이라도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거겠지요.”

조선이 유리한 상황, 협상 따위 같잖은 소리는 들어줄 필요가 없다. 반대파의 논지는 이러했다. 그러나 찬성파 역시 나름대로 근거는 갖추고 있었다.

“옛 수나라와 당나라도 고구려 정벌을 단 한 번으로 끝내지는 않았습니다. 쳐들어왔으니 싸우되, 대화의 물꼬는 남겨놔야 하지 않을런지요.”

“아직 북경에는 다시 십만 대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요행히 아국의 피해가 덜하다고는 해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관계개선의 여지는 남겨 놓아야 한다. 이대로 조선 원정군을 몰살시킨다면 당장은 초정수를 마신 듯 속이 시원하겠지만, 명나라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역시 조정과 비변사에서 논의를 거듭하다 끝을 내지 못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다른 분석도 없지는 않았다.

“아군을 분열시키려는 술수일지도 모릅니다.”

“영감과 대화를 청한 뒤, 그대로 죽여 버리려는 수작이 아닌가 의심스럽소이다.”

혼란을 이끌어내려는 계략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역시 반대 입장이 강한 견해에 속했다.

그러나 큰 틀에서 찬성과 반대는 거의 동수를 이룬 상태였다. 양측이 나름대로 이유와 근거를 갖춘 상태에서, 결정권은 이순신에게 넘어갔다.

압록강 전선의 총지휘관은 잠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다가 방침을 정했다.

“일단 면담은 수락하겠네. 계략이 의심스럽다면, 저들을 이쪽으로 부르면 될 걸세.”

아직 저들은 대화만 요구했을 뿐,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았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도는 들어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결정이었다.

“평양에도 파발을 보내라. 최종 결정은 전하께서 하셔야 하는 것이니, 지금 내가 가타부타 정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명색이 대국의 경략이 대화를 요청했으니 받아들인다. 이순신의 태도는 딱 그 정도에서 더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은 조선의 편이었고, 명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쫓기는 신세였다. 수뇌부 간의 대화로 시간을 번다고 해도, 오히려 고통만 늘어날 뿐이었다.

이순신은 그렇게 명을 내린 뒤, 직접 순시에 나섰다.

과연 사자가 다녀갔다는 소문에 기강이 해이해진 병사들이 몇 나왔고, 그들은 장형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경략 송응창 이하 몇몇 장수들이 조선의 요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지막 자존심은 남았는지, 조선의 군막 대신 다른 장소를 지정했다.

위화도, 압록강에서 가장 유명한 하중도가 회담 장소로 정해졌다.

다만 사전 준비는 조선 측에 맡기겠다는 전언을 보내, 자신들의 처지를 어느 정도 인지했음은 드러냈다.

패군지장들의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름대로 위신을 세우려 안간힘을 썼다.

“갑옷과 무기를 모두 내려놓고 들어가라? 감히 대국을 뭘로 보고!”

“불만이시라면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러나 이미 북경의 사정까지 훤히 꿰고 있는 조선의 관점에서는 헛된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방문객들은 결국 맨몸으로 군막에 들어서야 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양측의 수뇌부는 역관을 대동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전쟁은 끝났소이다. 더 조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니, 이만 보내 주시오. 아울러 귀측이 주둔하고 있는 곳은 천자의 땅이니 속히 나오시구려.”

“아국을 침범해 놓고 곱게 보내 달라?”

“우리 또한 죽기로 퇴로를 뚫을 것인데, 양측의 피해가 커지지 않겠소이까. 그러니 하는 말이외다.”

마지막에 서로 피를 볼 것이냐, 아니면 좋은 낯으로 끝을 낼 것이냐. 명군이 부릴 수 있는 최대의 허장성세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러한 명을 받지 못했소이다. 전하께서는 오직 침략군의 격멸만을 말씀하셨으나, 특별히 경략의 격을 생각하여 대화를 허락한 것이오.”

“어허, 그러지 말고……. 잠시 주변을 좀 물려 주시구려. 내 귀공께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불가하오.”

명군의 총지휘관은 은밀한 제안을 건네려 했지만, 상대는 일말의 여지조차 남겨주지 않았다.

“하아……. 좋소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소이까?”

뇌물조차 통하지 않을 법한 상황이었기에, 송응창은 이순신을 매수하려 하는 대신 정식으로 제안을 꺼냈다.

그는 병사들을 시켜서 준비해 온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서는 찬란한 노란 빛이 가득 흘러나왔다.

“이거면 되겠소이까? 통행료를 낼 터이니, 부디 길을 열어 주시오.”

언뜻 보아도 일만 관은 되어 보이는 황금이었다. 이걸 받고 곱게 보내 달라. 대국이 이 정도까지 체면을 세워 주지 않았나. 대충 이런 식의 제안인 셈이었다.

분명 옛날 같으면 국가 차원에서도 황금 일만 관은 상당한 액수로 통했을 터였다. 그러나 명에만 교역을 의존하지 않는 지금은 그저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다.

명군의 제안을 들은 조선의 장수들은 격노부터 비웃음까지 다양한 반응을 보였고, 그 중에서도 남병사 이억기의 말이 가장 걸작이었다.

“허, 황금 일만 관이라……. 그걸 대체 누구 코에 붙이라는 말이오? 대국이라면 조금 더 통이 큰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소.”

실제로도 그는 왕실의 선파였기에, 대외 교역에도 나름대로 관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황금 일만 관 정도는 부산포나 녹둔도에서도 그다지 큰 액수라고 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모습을 본 송응창은 겉으로는 무표정하게 있었지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당혹스러움은 억누르지 못했다.

‘과연 해금령을 멋대로 깬 자들이, 다른 오랑캐들과 손을 잡고 합종연횡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수락하지는 않더라도 한번쯤은 망설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들고 온 뇌물이었지만, 이 특별한 수단은 전혀 특별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런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경략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선금일 뿐이오. 돌아가거든 다시 구만 관을 내어놓겠소이다.”

“무엇을 믿고?”

“감히 천자께서 세우신 대장의 말을 의심하는가!”

이어지는 의심과 멸시, 마침내 송응창은 격노를 참지 못했다.

“황금 일만 관이 적은 돈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를 모두 노예로 팔아도 그만한 돈은 받지 못할 것인데, 어찌 그리 과욕을 부리는가 말이다!”

“진정하시오, 경략.”

벌컥 화를 내기는 했지만, 지금은 엄연히 명군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순신이 만류하자, 송응창은 마지못한 척 자리에 앉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몸값을 받고 보내 주라는 명은 받지 못했소. 내가 수락할 수 있는 제안은 단 한 가지외다. 항복하시오.”

그러나 명군 역시 압록강을 앞에 두고 항복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기에, 첫 번째 회담은 그대로 결론 없이 끝났다.

*       *       *

이순신이 평양으로 보내는 파발이 지나갔다. 장계의 내용은 내가 열어 볼 수 없었지만, 전령은 압록강에서 벌어지는 일을 순순히 말해 주었다.

지금 명군이 대장끼리의 회담을 요구했고, 이순신은 거기에 응했다는 이야기였다.

“설마 이간계는 아니겠지?”

그렇게 중얼거리자, 내 휘하에서 누구보다 이순신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도도 다카도라가 입을 열었다.

“영감이 그런 거에 당할 분은 아니시잖습니까.”

“그건 또 모를 일이지. 조선의 건국기원을 생각해 보면, 외방에 나간 장수는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니.”

물론 지금의 국왕은 하성군이 아니긴 하지만. 정통성 면에서만 놓고 보면 선왕들의 적자이며 동생이니, 그렇게 콤플렉스가 심하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뭐, 다른 장수들도 많이 있다고 하니, 본인이 처신만 잘하면 될지도 모르겠군.”

여차하면 또 빼돌려오면 되겠지. 나는 이순신의 장래에 관한 생각을 그만두고, 진짜 중요한 일에 주목했다.

“그보다도 말이야……. 명군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

지금 나는 먼저 조선으로 보냈던 원군과 합류해서, 느긋하게 북상하고 있었다.

이미 상대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황, 후방에서 슬그머니 압박만 해도 사기가 바닥을 칠 터였다. 아니, 이미 바닥이니 이제 땅을 파고 들어갈 일만 남았겠지.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뒤를 잡으면 항복조차 못할 것들이…….”

내 말에 미요시 마사야스가 동의했고, 다른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명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그렇잖아도 민심이 술렁이는 와중에, 조선 원정군이 통째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관료들은 이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십만이라는 숫자는 그 관련된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의미와도 통했다.

북경의 저잣거리가 시끄러운 가운데, 오직 황제가 거처하는 자금성의 대전만이 조용할 따름이었다.

대신들은 다시 머리를 맞댔지만, 별 뾰족한 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이 일을 폐하께 어떻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언제까지 감추고만 있을 수는 없소.”

처음에는 누가 어떻게 참패를 아뢸 것이냐로 분분하던 의견은 어느새 위충현에 대한 규탄으로 이어졌다.

“진작에 증원을 보냈더라면, 살려서 데려올 수 있었을 겁니다!”

“그 환관 놈이 자기 고향이 불탈 뻔했다고, 천병을 껴안고 움츠러든 것이 아닙니까.”

원래 조선으로 증파할 병력을 직례 일대에 박아 버리면서, 살아 돌아올 원정군이 그대로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관료들이 보기에는 황제나 위충현의 방침이 말 그대로 청개구리의 행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최고 권력자는 누가 뭐래도 황제였다. 게다가 그 황제가 위충현에게 창구 역할을 맡기고 나오지 않는 이상, 달리 방법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규탄의 당사자 역시 귀가 닫힌 상태는 아니었기에, 조선 원정군의 패배를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소문과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 머저리 같은 병부상서는 왜 패배를 해가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책? 어차피 오랑캐들은 대국을 넘보지 못해. 그보다도 어심을 잡는 게 먼저다.”

생각을 정리한 환관은 그대로 황제를 찾아가 조선 원정군의 패배를 고했다. 과연 황제는 격노를 감추지 않았다.

“대체 송응창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대군을 헛되이 날린 병부상서의 책임도 크나, 다른 오랑캐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하옵니다.”

위충현은 누구보다도 황제의 심리에 정통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절망감을 부추겼다.

“사방의 오랑캐가 천조를 거스르려 하나이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찌, 어찌하여!”

믿었던 스승은 뒷주머니나 챙기는 모리배였고, 다른 신하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부류였다.

황제는 외정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했지만, 이제는 그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하늘의 아들, 천하의 주인, 만승의 수레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때 환관이 다시 속살거렸다. 하늘의 주인은 마땅히 하늘과의 소통에 힘써야 하는 법이니, 지상의 일은 유능한 사람에게 맡기라고.

그리고 지금 누구보다 황제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위충현 본인이었다.

“과연 태감의 말이 옳도다. 이제 국사는 그대에게 맡길 것이니,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알아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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