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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206화 (206/225)

206화 계사록: 조선의 반격(4)

신립을 구한 뒤에도, 명군의 물결은 회랑을 계속해서 흘러갔다.

“좀 줄었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혼잣말 겸 질문을 던지자, 출격하고 돌아온 마사야스가 맞장구쳤다.

“그래도 대충 오륙만은 되어 보입니다.”

“저게 가볍게 후려치는 정도라…….”

진짜로 타워디펜스였다면, 진작에 라이프가 제로를 찍었을 대물량이었다. 물론 그중에서 한 일만에서 이만 정도는 여기에서 잡은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았다.

“저런 대군에 들이덤볐다는 그 자체가 일생일대의 자랑거리가 되겠군요.”

마사야스가 농담 좀 섞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툭 치고 돌아온 것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장강마냥 도도하게 흐르는 인간의 파도에 발이라도 담그고 온 게 어디냐는 이야기였다.

실제로도 까딱하면 휘말리기 딱 좋은 상황이기도 했고.

나도 농담으로 마사야스의 말을 맞받았다.

“과연 대공을 세웠군. 이 싸움이 끝나면 칸죠(感状 감장, 감사장.)이라도 발급함세.”

“일생일대의 광영이겠습니다, 쿠보.”

명색이 한 세력의 우두머리인 미요시 마사야스가 내 칸죠를 필요로 할 일은 거의 없겠지만,

포성조차도 귀에 익숙해져서 은은하게 느껴질 때쯤, 명군의 흐름도 거의 끝나갔다.

내게 쿠사리를 먹은 원균은 어느새 킷카와 모토하루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직접 눈도장을 찍기는 어려우니, 다른 사람들을 먼저 공략하겠다는 것일까 싶은 태도였다.

이쪽끼리는 또 나름대로 죽이 잘 맞는 듯했다. 근데 친해져봐야 좋을 게 없을 텐데.

“겐지(源氏)셨소?”

“나야 원(元)씨이긴 하오만…….”

“가끔 선조들의 사정에 따라서 글자는 바뀔 수도 있는 게 아니겠소이까. 어디 겐지시오?”

일본인이 조선 본토박이에게 본관이 어디냐고 묻는 건가?

물론 사대본성이 그 본관 비스무리한 역할을 하기야 하지만, 어딘가가 어긋난 느낌의 대화였다.

그 겐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괜히 끼어들었다가 골치가 아프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킷카와 모토하루가 원균이 여기 있을 동안을 떠맡아준다면야, 나쁠 것도 없겠지.

평온한 산 위와는 달리, 산 아래의 풍경은 처참했다. 여기저기에 명군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고, 부상을 입은 채로 신음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부상자들을 챙길 여유도 없다는 듯이, 적의 무리는 그대로 회랑을 빠져나갔다.

원균과 또 엮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물어볼 게 생겼다.

“선전관, 조선에서는 포로에 대한 방침이 어떻게 되는가?”

제발 이것까지 모르쇠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그럭저럭 쓸 만한 답이 나왔다.

“예, 그러니까……. 귀화를 원하면 일단 벽지에 흩어놓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노비로 잡거나 몸값을 받기로 했습니다.”

“확실한가?”

“정주성에 남기고 간 포로들은 모두 그렇게 처분되었습니다.”

뚜렷한 방침은 없는 모양이었지만, 적어도 선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알겠네.”

나는 고개를 돌린 뒤, 전장의 수습을 명했다.

“이제 적도 완전히 지나간 것 같으니, 전장을 수습하라. 중상자든 경상자든 상관없이 수용하고, 시신은 처리가 마땅치 않으니 화장해주도록.”

대충 보수적으로 잡아도, 족히 오천은 넘는 포로가 생길 터였다.

어쨌거나 살아만 있으면 상환은 받을 수 있으니까, 모처럼 노동력이 대량으로 늘어난 셈이었다. 명이 대국의 자존심을 내세워서 몸값을 내어놓는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고.

그렇게 지시하고 있는데, 회랑 너머의 연대산에서 수십 명쯤은 되는 무리가 다가왔다.

원균의 반응으로 보건데, 여러 의미로 이번 싸움의 주역인 듯했다.

“신립 장군?”

“그러니까, 지금 오는 사람이 그 신립이란 말인가?”

“아, 예, 옛, 쿠보.”

얼굴이 궁금하긴 했다. 물론 인명피해야 조선군에서 났겠지만, 일단 약속과는 어긋나게 군대를 움직인 것 자체가 문제일 터였다.

“쯧, 손님맞이도 해야겠군.”

킷카와 모토하루와 원균에게 마중나갈 것을 지시했다. 모토하루가 일본의 무사치고는 꽤 학식을 갖춘 편이라, 이런 일에 제격이었다.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신립이 진중으로 들어왔다.

중년과 노년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나이에 제법 고집 있게 생긴 얼굴이었다.

하긴 그 정도는 해야 장군 노릇을 해먹겠다마는, 고집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감상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상대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공방께서 구해주신 덕에, 이 늙은 몸이 겨우 구명을 입었습니다.”

예의를 갖추려고 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별 말씀을 다 하시오.’ 내지는 ‘당연한 일이었소.’같은 반응을 하는 게 맞겠지만, 딱히 그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보시오, 신 공. 지금이야 무사히 끝났으니 다행이오만, 아까의 돌출행동에 따로 이유가 있었소이까?”

비변사에서도 여기에서는 그저 사냥만 하라고 이야기를 들었고, 명군이 오기 전까지 어떤 협의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혹시라도 중간에 전령이 누락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빼버릴 수는 없었다. 돌다리는 두들겨볼 필요가 있는 법이니.

연락역으로 온 누구하고 다르게 염치는 있는지, 내 추궁을 들은 신립은 제깍 바른 말을 토해냈다.

“없, 었습니다. 제가 공명심에 일을 그르칠 뻔했습니다.”

“솔직해서 그나마 낫구려.”

“구명지은을 내려주신 분께 면목이 없을 따름입니다.”

그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비변사에 오늘 있었던 일을 알리는 것에 동의했다.

뭐, 이 사람도 촉망받던 장재였으니, 아주 개나발은 아니라는 것이겠지. 원균은 워낙 자기 포장질을 잘해서 드러나지 않았던 거고, 원래 역사에서도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군은 그야말로 올스타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어쨌거나 동맹이 알아서 고개를 숙인 덕에, 이번 싸움에서의 포로는 그대로 내가 독식했다. 그리고 차후에 비변사와의 논공행상에서도 꽤 유리하게 끌어올 소재일 터였다.

“다행히 조선군도 크게 상하진 않은 듯하니, 신 공도 돌아가서 다음 명을 기다리시구려.”

단순히 인사만 하러 온 것인지, 신립은 뻗대는 구석 없이 곱게 돌아갔다.

그런데 역시 눈치 없는 우리의 조선 겐지가 나름 변호랍시고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덕분에 더 많은 명군을 잡을 수 있었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신 공이 길을 막아서 더 많은 명군을 잡을 수 있었다고?”

개천에 둑을 쌓으면 물줄기를 바꿀 수 있지만, 돌멩이 하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신립의 부대가 딱 그 짝이었다.

굳이 그런 이치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슥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원균은 알아서 깨갱하고 물러났다.

대충 이곳의 일이 마무리된 뒤, 곧바로 무네요시가 있다는 쪽에 전령을 띄웠다. 슬슬 전쟁도 끝으로 가고 있으니, 굳이 여기에 오래 남을 필요는 없을 터였다.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명군의 수뇌부는 모두가 무사했다. 그 대신 끌고 온 병력의 태반을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이제부터는 얕은 구릉만 있을 뿐이다! 대군의 이동을 막을 만한 지형은 없으니, 서둘로 움직여라!”

장수들의 독촉이 아니더라도, 병사들 역시 조선이 사지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낙오자는 그대로 버려졌고, 수만 대군은 한 덩어리가 되어 후방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용천군에 들어서서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드디어 벗어난 건가?”

“아직, 아직 아니야! 압록강은 넘어야 한다!”

이제 고작해야 산지만 벗어났을 뿐, 아직도 조선 원정군은 국경을 넘지 못한 상태였다.

“조금만 더 가면 의주고, 그 앞이 압록강이다!”

모두가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누구도 만리타향에서 처참하게 죽거나 포로로 잡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선천(宣川)에서 상당히 오래 붙잡혔던 명군은 철산을 벗어난 이후부터, 불과 하루만에 의주로 들어섰다.

사람은 하루에 족히 백릿길을 걷는다 했지만, 그들은 추격을 뿌리쳐가면서 백리 거리를 돌파해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장군, 의주성에 들어갑니까?”

“자라 같은 소리 집어치워! 이미 박살나버린 성이 우릴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나?”

부장 등자룡이 이여송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오직 면박만이 되돌아왔다.

명군이 의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중간 거점으로 삼기 위해 약간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이전 같은 철옹성은 아니었다. 그런 성에 의지했다가는 되려 발목만 잡히고 말 터였다.

“쉴 틈은 없다. 도착하는 즉시 나룻배를 찾고, 뗏목을 엮어 건너야 한다.”

이미 수뇌부에서 그렇게 방침을 정했고, 그건 결코 어리석은 판단이 아니었다.

조선은 후퇴하는 명군에게 문자 그대로 지옥 같은 나라였기에, 위아래를 막론하고 모두가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했다.

물론 경황이 없는 중에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던 것도 그들의 기억에서 한몫을 단단히 차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강변에 도착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절망이었다.

“아아……!”

“우린 끝났어.”

병사들은 아주 털썩 주저앉아서 통곡했고, 정신을 차려야 할 장수들마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대체 조선군이 왜 저기에 있단 말이냐!”

“저긴 천자의 땅일 터인데…….”

조선군이 압록강 이북에 목책을 둘러놓은 상태였다. 이제 국경은 거대한 포위망이 되어 있었다.

*       *       *

명군을 마지막으로 잡으려면 어디가 적당한가. 비변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의제였다.

대군을 상대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동시에 최대한 많은 적을 잡아야 한다는 모순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선의 문무 관료들은 지형에 주목했다.

- 수공이 낫지 않겠소이까?

- 압록강은 청천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유량이 많소. 그 물을 다 막아놓고 있자는 말이오?

- 그도 그렇지만, 애초에 살수에서의 싸움에 수공을 썼다는 것부터가 민담에 불과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유자라는 이가 어찌 불씨가 엮인 전설 따위를 논하는 거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수공은 기각되었고, 그 다음으로 선정된 자리가 바로 철산군의 고갯길이었다.

그러나 이쯤에서는 아무리 명군의 힘을 빼놓는다고 해도, 아직 덜 지친 상태일 터였다. 그런 사냥감을 잡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 철산군에서 막는 것도 조금은 이르다고 생각하오. 차라리 줄창 달려오게 만든 다음, 의주에서 요격합시다.

- 하지만 날씨가 가물고 있으니, 압록강의 수위도 그다지 높지는 않을 거요. 놓치면 그대로 건너서 달아나겠지.

한창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한 젊은 군관 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 근데 꼭 압록강 안쪽에서만 잡아야 합니까?

- 당연히 영내에서 잡아야지. 그런데 자네는 누군가?

비변사는 고위직들이 머리를 맞대기 위해 편성한 임시기구였기에, 참석자 모두의 나이는 제법 많은 편이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였던 이억기가 답했다.

- 내가 데려온 아이인데, 제법 머리가 돌아가서 곁에 두고 있소이다.

사람들은 금방 관심을 끊고 다시 갑론을박을 벌이며 의논에 몰두했다. 그런 가운데, 이억기가 슬그머니 자신의 부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 이보게, 평구.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평구는 흔히 부르는 별명이었고, 그 군관의 이름은 정유연이었다. 그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냈다.

- 이미 압록강 이북에서 요양성까지는 무인지경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방어선을 형성하듯 강을 끼고 포위망을 형성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남병사는 정유연의 제안을 안건으로 올렸다.

이 과정을 거쳐, 지금 조선군은 강에 의지해 명군을 막아서고 있었다.

“저들이 돌아가면, 다시 오고야 말 것이다! 단 하나의 적도 살려 보내지 마라!”

- 와아아아아!

둥, 둥, 둥……. 이순신은 손수 북을 치며, 조선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 조선의 장수들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그리고 명군의 무리에서 사자가 하나 나와서 조선군의 목책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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