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계사록: 조선의 반격(3)
“이렇게나 막대한 피해가 났는데, 뚫지도 못해!”
쾅. 분노한 송응창은 지휘봉은 탁상 위로 내던졌다.
“총병, 자네가 분명 대군으로 밀어붙이면 길이 열릴 거라고 하지 않았나?”
명군의 총사령관은 부사령관에게 힐난했다. 질량으로 뚫어 보자는 발상은 이여송이 한 것이었지만, 그걸 경략에게 들고 간 사람은 조승훈이었기에.
그러나 조승훈이라고 해서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경략께서도 승낙하신 일이 아니었습니까?”
“험…….”
자잘한 매복을 물량으로 찢어버리자는 계책에 무릎을 친 사람이 바로 송응창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관련이 없는 척하는 꼬락서니가, 장수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첫 번째 저항과 마주한 것일 뿐입니다. 다시 척후를 풀고 계책을 짜내면, 길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답이 없는 송응창을 뒤로 하고, 조승훈은 지휘부 막사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이여송이 따라붙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총병.”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빨리 길이나 찾아보도록 하게.”
그도 마음 같아서는 섬나라 오랑캐 따위 철기를 앞세워 짓밟아 버리면 그만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봉에 섰던 자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감정적으로 나가는 것은 하책이라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이여송은 자신이 직접 척후의 일원으로 나갔고, 금방 좋은 소식을 들고 돌아왔다.
“다행히도 적은 우리 정면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명군의 바로 앞에서는 적이 고갯길을 빼곡하게 채우다시피 하며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남쪽으로 난 길은 조선군이 언덕 위에 올라 있기만 한 상태였다.
이여송이 직접 그려온 배치 현황을 본 뒤, 조승훈은 다시 송응창에게 찾아갔다. 어쨌거나 그는 황상이 직접 임명한 경략이었기에,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경략, 우회로를 찾았소이다.”
“알겠소이다. 이제 세세한 사항은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좋소. 실전 지휘는 총병에게 전부 일임하리다.”
송응창은 멍한 얼굴로 모든 것을 맡기겠노라고 말했다.
독박을 씌우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포자기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건, 지금 명군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다시 경략의 막사 밖으로 나온 조승훈은 우회를 지시했다.
“기병이 앞장서고 보병이 그 뒤를 따른다. 다행히 서쪽 해안가에는 적이 그리 많지 않고 지형도 넓은 편이니, 쉬이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부상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급 군관 하나가 그렇게 질문을 던졌지만, 뻔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지만,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은 또 남겨놓아야 했다.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은 군막에서 쉬고,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는 자들은 경계를 서라.”
말이 좋아 지시였지, 사실상 버려두고 간다는 방침이나 마찬가지였다.
후퇴를 시작했을 때는 칠만이었던 병력이 이제는 다시 오륙만 가량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총병.”
* * *
명나라 본토의 경계태세는 바짝 올라간 상태였기에, 나는 조선 원정군 추격에 한 팔 거들 생각으로 철산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이미 비변사에서는 (일단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명군을 추격 중이라 했고, 겹겹이 포위망을 짜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 내가 도울 일은 없겠는가?
- 이미 충분히 도와주셨는데…….
- 엄밀히 말하면, 이건 내 전쟁이기도 하지 않은가.
- 그리 생각해 주신다면야.
고심하던 곽재우는 내게 철산군 남쪽의 산 하나를 짚었다.
- 적은 철산반도로 우회를 하려 할 것이니, 이곳 고가산에서 기다려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시점에 무네요시의 군대와 합류하기에는 애매했고, 그 다음으로 올 곳에서 요격해달라는 이야기였다.
맞은 편의 연대산에는 사수와 포수로 구성된 부대가 있다고 했고, 그들과 같이 불벼락을 퍼부어달라는 것이 조선 측의 요청이었다.
마침 고가산이라는 곳은 남쪽 해안가에 바짝 붙어 있었다. 만약 독이 오른 명군이 달려든다면, 배로 빠져나가기도 좋은 위치였다.
나는 선선히 곽재우의 제안을 수락했고, 지금 고가산에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워디펜스로군.”
무심코 감상을 입 밖에 내자, 옆에 있던 모토하루가 궁금해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혼잣말일세.”
적의 최우선 목표는 무사히 후퇴하는 것이니, 길을 틀어막고 있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지나갈 터였다. 그런 점에서는 타워디펜스야말로 지금의 상황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말이지만.
유독 길 너머에서 마주하고 있는 산의 조선군이 신경 쓰였다.
“그보다도 저 건너편에 있는 장수의 이름이 신립이라 했던가.”
내 질문에 답한 사람은 비변사에서 내게 붙여준 혹덩어리, 원균이었다.
“그렇습죠, 쿠보. 용맹한 장수니, 도망치는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겁니다.”
그 평에는 나도 동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말한 사람이 하필 그 균이라는 점에서,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연락역이 필요하다는 것은 나도 동의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그게 왜 하필 이자란 말인가.
설마 평양의 비변사에서도 마지못해 던져버린 건 아니겠지. 원래의 역사에서도 원균의 볼기짝에 불을 냈던 권율이 평안 감사로 있었으니, 또 모를 일이긴 했다.
그러나 조선의 국왕이 신임하는 자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전장에서 뭔가를 시킬 일도 없었기에 그냥저냥 받아들였다. 지금은 후회막급이지만 말이다.
“원래는 이일 장군과 더불어 북변의 쌍벽 중 하나였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적을 앞두고 있으니, 불필요한 말은 삼가도록.”
“예, 쿠보.”
보통 조선 사람들은 내게 공방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균은 내 비위를 맞춰보겠다고, 일본식 발음까지 배워서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내게 한 마디라도 말을 붙여 보려는 모양새였지만, 굳이 그걸 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말문을 싹둑 잘라낸 게 불편할 법도 했지만, 강약약강의 표본답게 원균은 여전히 헤헤거리고 있었다.
연락역이라 난전 중에 격전지로 보낼 수 도 없고, 아직까지는 물어뜯어버릴 만한 구석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만 넘기면 엮일 일은 없을 테니, 조선이 알아서 처리하라지.
그렇게 생각하며 먼지구름이 이는 방향을 지켜보자니, 명군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의 예상 진격로에는 신자에몬(新左衛門 신좌위문, 야규 무네요시의 통칭.)이 있다고 했던가?”
“예, 쿠보.”
무네요시는 아주 착실하게 내 요구대로 움직인 듯했다. 곽재우도 나와 만난 자리에서 일본 무사들의 창친을 아끼지 않았다.
- 적일 때는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아군이니 또 이렇게 믿음직한 군대가 없더군요.
무사들에게 마지막 공을 세울 기회를 주기도 했으니, 그들도 머리가 있다면 목숨을 내걸 자리이기는 했다.
“적이 화포의 사정권 내로 들어올 겁니다!”
견시를 보던 병사의 보고가 나를 상념에서 깨웠다.
“포격을 준비하고, 혹시 모르니 철포수와 창병들 역시 경계를 늦추지 마라.”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기에,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면, 역시 방심한 자는 없었다.
쿠웅. 길 너머 연대산에서 화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거리상으로는 그들이 가까웠으니, 먼저 쏘는 게 당연할 터였다.
동맹의 움직임을 신호삼아, 내 휘하의 병력들 역시 적을 겨냥하고 있었다.
쾅!
거리가 약 8,9리 정도 될까 싶은 회랑 내부에서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역시 명군은 아군을 공격하려 드는 대신, 필사적으로 길을 뚫기에 바빴다.
일방적으로 두들기는 싸움만큼 쉬운 것은 없을 터, 이대로만 가면 명군은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대산의 동맹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조선군이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니, 왜?”
마속은 산 위에 올라가서 망했다지만, 때로는 산 위를 지키고 있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그런데 왜 그 명장이라던 신립이 산 아래로 내려온단 말인가.
“역시 신립 장군은 용맹하군요!”
원균만이 눈치 없이 감탄사를 내지르고 있었다.
“비변사에서는 이쪽 길목을 막지 않겠다고 들었는데?”
“전장에 나온 장수는 때로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을 펼치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이딴 게 연락역이라니……. 그러나 대충 신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이 갔다.
이일이 실각해버리면서 그도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여기에서 자신의 입지를 만회하겠다면, 납득하지 못할 행동은 또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신립의 움직임은 자충수에 지나지 않았다. 어쩐지 찜찜하더라니. 조령 대신 탄금대라는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다른 방향으로 일을 그르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휘하 병력이 동맹군처럼 길가로 내려가지 못하게 단속했다.
“우리는 위치를 지킨다.”
“쿠보?”
다른 이들은 조용한 가운데, 원균만이 눈치 없이 굴 뿐이었다.
“나는 비변사로부터 다른 이야기는 듣지 못했고, 저기 신립 장군으로부터도 달리 언질을 받은 게 없다. 그러니 원래의 계획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윽박지른 뒤, 전장을 계속해서 살폈다.
명군은 파도처럼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고, 그 앞에 선 신립은 모래성만도 못한 형국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또 버티기는 버텨냈다.
본인도 자신이 있어서 산을 내려온 듯한 태도였다.
다만, 적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을 간과한 듯했다.
여전히 신립의 부대는 대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보기에도 지친 기색이 눈에 띌 정도였다.
“하, 확실히 명장은 명장인데,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한 것이 아닌가.”
“쿠, 쿠보, 제발 신립 장군을 구해주십시오.”
아무리 내 눈치를 본다고 해도, 역시 자기 파벌 사람이라는 것일까. 원균이 내게 애걸해왔다.
“자네는 정말 신립 장군으로부터 아무 말도 듣지 못했나?”
“그, 그렇습니다, 쿠보.”
그러면서도 내 질문에는 곧이곧대로 답했다. 자기가 책임질 자리는 또 귀신같이 빠져나가는 태도였다.
“그럼 자네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건가? 연락역이라면 나와 조선군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말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말일세.”
“송구스럽습니다.”
“송구스러우면 자네 처소에서 근신이나 하고 있도록.”
원균을 윽박질러서 침묵시킨 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 길목은 문자 그대로 급류가 흐르고 있었기에, 섣불리 달려들었다가는 같이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하, 어쩔 수 없지. 전위 부대는 출격하라. 빠르게 적을 찌르되, 깊게 들어가지 말고 그대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예, 쿠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약간의 빈틈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전적으로 신립에게 달려 있었다.
마사야스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갔다. 과연 그는 내가 지시한 내용을 충실하게 지켰다.
명군도 이쪽에서 공격해올 것은 생각하지 못했는지, 갑자기 혼란에 빠진 듯했다.
“조선군이 후퇴합니다.”
가끔씩 헛발질을 해도 명장은 명장이라는 것인지, 신립도 기회는 놓치지 않았다.
“이 빚은 단단히 받아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