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계사록: 조선의 반격(2)
“분명 여기에 매복이 있었다 하지 않았나!”
“그, 그게…….”
이여송은 또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를 따라온 부장, 장세작은 척후를 이끌었던 군관에게 호통을 쳤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일이었다.
“적당히 하게. 조선군이 영악한 것에 척후가 무슨 죄를 지었겠나.”
“예, 장군.”
상관의 명으로 마지못해 참기는 하지만, 여전히 부장은 자신의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사실 이여송 스스로도 평온한 태도와는 달리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타초경사(打艸驚巳). 풀을 건드려서 뱀을 놀라게 한다는 말로, 병가(兵家)에서는 보통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표적을 놓치는 경우를 이를 때가 많았다.
매복으로 적을 공격하려고 한다면, 최대한 끌어들였다가 단번에 섬멸하는 것이 정석인 법. 그러나 지금 조선군은 척후들을 겨냥해서 변죽만 울릴 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젠장, 벌써 사흘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선천(宣川)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이다!”
장세작이 분통을 터트리며 외치는 소리는 이여송의 심경을 대신 표출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본대로 돌아오는 내내 침묵을 지켰던 그는 곧바로 조승훈을 찾아갔다.
“총병, 신중함도 좋지만 이대로는 적지에서 말라죽어버릴 겁니다. 차라리 전군이 일제히 후방으로 진격하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이여송의 계책은, 매복이 있다고 해도 대군의 질량으로 밀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흠,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군. 경략께 말씀드려보겠네.”
* * *
명군의 방침은 바뀌었다. 이여송이 건의한 대로, 조심스럽게 탐색해가면서 후퇴하는 대신 일제히 후방으로 돌격하는 식으로 변했다.
“드디어 미끼를 물었군.”
명군이 지지부진하게 움직이는 동안, 철산군 일대는 거대한 살상지대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고갯길마다 목포에 진천뢰까지 매설되어 있었고, 그 뒤를 조선군이 틀어막았다.
비록 상대는 지쳤다고 하나 그 천자의 군대요, 칠만가량의 대병력이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바짝 긴장한 채로 명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신립은 휘하 병력에게 훈시를 하면서, 스스로도 마음을 다졌다.
“무조건 여기에서 전멸시킬 필요는 없다. 적에게 생로를 보여 주며 몰아넣되, 최대한의 피해를 주어야 할 것이다.”
“예, 장군!”
“분명 내가 비변사에서 받은 명은 그렇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몸으로, 외적을 살려 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라!”
한때 병마절도사까지 올라갔던 그는 동서 당쟁에 휘말려 좌천되고 말았다. 비록 삭탈관직당하지는 않았지만, 임소를 받지 못하고 순변사라는 임시직으로 전장에 나서야 했다.
이번 싸움은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다행히도 부하들은 그의 뜻을 적극적으로 따랐다. 물론 신립이 실각해 버리면서 그들도 끈이 떨어진 신세였다는 것이 적지 않은 이유를 차지했겠지만.
신립은 멀리서 일어나는 먼지구름을 보며, 동쪽 고갯길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는 경공방이 보냈다는 원군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적의 주 진격로인 만큼, 그들이 명군의 파도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할 터였다.
“저들도 보통은 아니었지.”
벽동군에서의 싸움은 그도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단병접전으로 명군과 붙어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던가. 그런데 또 가장 위험한 자리로 갔으니, 소서행장이 이번 전쟁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도 엿보였다.
“뭐, 아국의 다른 장수들과 공을 다투는 것보다는, 저들에게 넘겨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 * *
“쿤슈호간(郡守判官 군수판관)께서는 조선군과 같이 움직이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글쎄, 내 기질이 오히려 그대들과 맞으니, 여기가 알맞을 거라고 생각하네.”
벽동군수 김시민은 소서행장의 본대도 아닌, 다른 다이묘의 군대와 같이 다니고 있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진주목의 목사였던 그는 일본군에게 관직명을 따라 모쿠소호간으로 통했는데, 지금도 그건 크게 변하지 않았다.
타치바나 무네시게는 그와 친해진 일본의 무사들 중 하나였다.
“과연, 꽃 중의 꽃은 벚꽃이요, 사람 중의 사람은 무사라 했으니, 그 이치는 나라가 달라도 통하는가 봅니다.”
“벚꽃보다는 매화나 난초가 좋지 아니한가. 어쨌든 칭찬인 듯하니 기분은 나쁘지 않구만.”
“무사된 자는 마땅히 뛰어난 무사를 존중해야 하는 법이지요. 하지만 여기는 저희들이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위험하니 쿤슈호간께서는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게 어떨지…….”
원군은 말 그대로 도와주러 온 군대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일본군이 보이는 해보는 지나칠 정도였다.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가장 위험한 자리를 자처하는 태도는 조선 측에 호감을 심어주었지만, 사실 그들에게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자는, 그에 걸맞는 포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사카이 쿠보는 공훈에 비례해서, 충분한 봉록과 칸죠(感状 감장, 감사장.)으로 보상하겠다고 했다.
물론 봉록은 토지 대신 연금이라는 것으로 주겠다고 했지만, 여러 이유로 쪼들려 있었던 무사들에게는 그조차도 아쉬웠다.
이제 질서가 완전히 굳어진 상태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기회일 터였다.
분명 김시민의 태도는 일본의 무사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었지만, 동시에 공을 다투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사들이 인정한 조선의 장수는 그들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았다.
“괜찮네. 이미 비변사에서도 방침이 정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자네들과 같이 어깨를 맞댈 수 있는 것일세.”
지금 여기에 김시민이 있는 까닭은 본인의 희망도 있었지만, 비변사의 방침을 따른 것이기도 했다.
같이 싸우고 있는 김시민조차도 일본 무사들의 마음을 모르는 판에, 조선 측에서도 그런 것을 이해할 리는 없었다.
타국까지 건너와서 열심히 싸우고 있으니,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비변사는 물론이고 그 위의 조정에서도 같은 뜻이었고, 마침 김시민이 그들과 합이 맞는 듯하니 같이 싸우라고 했던 것이다.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말한담. 무네시게는 아쉬움을 감추며 명군을 맞아 싸울 태세를 갖췄다.
* * *
“과연 대군이군.”
우우우우…….
멀리서 먼지구름이 가까워지는 만큼, 명군이 울리는 발소리도 조금씩 천지를 뒤덮어가고 있었다.
야규 무네요시도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쿠보를 따르면서 대전쟁을 자주 겪어봤지만, 칠만 대군을 앞에 놓아 본 적은 전무했다.
“마음 같아선 나도 앞으로 나가고 싶지만…….”
아무리 그가 효율을 추구하는 야규 군학의 창시자라고 해도, 무사로서의 본능이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무게를 잡고 자리를 지켜야 할 때였다.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면, 그게 최대의 공을 세우는 것이다. 절대 그 사실을 잊지 마라!”
벽동군에서의 싸움은 의외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무네요시의 입장에서는 반쯤 실패한 싸움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무사들이 멋대로 튀어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었지만, 지금도 그의 최대 근심거리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는 일본군의 총책임자로서, 전군에 재차 단도리(段取り)를 박았다.
“각 포대는 따로 명을 기다리지 말고, 적이 표시된 자리로 오면 쏴 버려라!”
“적이 도망친다 해서 쫓아가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우리의 역할은 정해진 길로 몰아넣는 것이지, 섬멸하는 게 아니다!”
다행히도 칠만이라는 숫자는 무사들의 호승심도 억누르고 있는 모양새였다.
명군이 조금씩 가까워졌고, 마침내 그들이 미리 정해 두었던 표식을 지났다.
쿵, 쿠쿵…….
의주에서 벌어졌다던 화력전은 여기에서 다시 나오지 않았다.
화포마저 버리고 도망치는 중이었던 명군은 일방적으로 고니시군의 화포에 얻어맞아야만 했다.
서로 철포를 쏘려면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명군의 숫자도 여전히 많았다.
쿵.
벌써 화포들은 다섯 번이나 불을 뿜었다. 그러나 적은 계속해서 몰려들어왔다.
“끔찍하게도 많군. 전에 싸울 때는 화포를 서너 번만 쏘아도 형세가 기울었는데, 지금도 장담을 못하겠어.”
“서너 번도 많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사람의 바다로군요.”
무네요시의 푸념을 안코쿠지 에케이가 받았다. 과연 대륙의 기상은 사람을 질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나마 저들이 화포를 포기한 게 다행이겠지.”
“동감입니다.”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명군은 더 한층 바짝 다가와 있었다.
빠악! 미리 묻어 두었던 진천뢰도 터지면서 쇳조각을 사방에 흩날렸다.
이제는 상대의 표정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이쪽이 명군의 숫자에 질려 있는 이상으로, 저쪽의 얼굴도 공포로 물든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가 철포를 맞출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모두가 요란하게 콩 볶는 소리로 가득 찼다.
“컥……”
“으윽.”
가장 앞에 있던 병사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군의 사정도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일본 측보다는 좀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모양새였다.
이쪽은 이미 엄폐물을 많이 설치해 두었지만, 명군은 허허벌판 그대로에 있었으니, 그만큼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다음 일제 사격이 끝나면 돌격기를 올려라.”
“예, 장군.”
싸움이란 원래 이랬지. 무네요시는 쿠보 밑으로 들어갔던 이래, 지금까지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싸웠는가를 새삼 떠올렸다.
애초에 화약이란 귀물이었고, 펑펑 써댔던 고니시군이 이상한 것이었다. 그렇게 싸웠던 것을 지금은 철포와 화포가 보조하는 가운데, 창과 검을 든 무사들이 전면으로 나섰다.
그가 회상을 끝마칠 무렵, 다시 콩볶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아직 명군은 재장전조차 하지 못한 상황, 적은 그대로 납탄 세례를 얻어맞았다.
펄럭. 무네요시가 미리 지시해 두었던 대로, 돌격기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그걸 신호로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상대적으로 수수한 갑주를 입은 조선군 부대도 하나 있었다.
죄다 요란하게 장식을 꾸며 놓으니, 오히려 저런 것도 돋보이는군. 무네요시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전장을 지켜보았다.
- 와아아!!
쿵, 쿵.
그러는 동안에도 화포는 후방의 적을 향해서 불을 뿜고 있었고, 명군의 파도도 끝이 없었다.
어쨌거나 화약은 소모품인 법. 안코쿠지 에케이는 우려를 표했다.
“이거야 원, 이러다가 화약이 먼저 동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차하면 조선군에게도 빌릴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그러나 무네요시는 화약을 소모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도 무네요시의 주군은 조선으로 막대한 물자를 보냈다. 거기에서 일부쯤 빌린다고 해도, 별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때, 뛰어나간 무사들이 너무 멀어지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징을 쳐라! 자칫 적에게 휘말렸다간 아군이 크게 상할 것이다.”
다행히도 무네요시가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징소리를 들은 조선군이 가장 먼저 돌아섰고, 다른 무사들이 그 뒤를 따랐던 것이다.
게다가 명군도 지친 듯, 더 달려드는 대신에 물러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