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계사록: 조선의 반격(1)
이제 장강의 방비는 다시 굳건해졌고, 왜구가 뭍으로 올라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러니 강남의 병력을 불러들여 일부는 영하성으로, 일부는 조선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선 원정군의 증원을 앞두고, 날벼락 같은 황명이 떨어졌다.
“오랑캐가 남쪽으로 침입하여 보정까지 이르렀다. 도성의 방비가 위태로우니 군대를 함부로 움직일 수 없노라."
원래 신하들은 조선 정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여유가 생긴 대로 병력을 더 보내려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것도 조선 천자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선에 집착했던 황제가 갑자기 방침을 바꾸라고 명한 것이었다.
“대체 무슨 까닭으로 어심을 바꾸셨단 말인가?”
“오랑캐가 보정 인근까지 들어오지 않았나. 그것 때문인 듯한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세. 고작해야 여진 오랑캐 마적떼가 소득없이 돌아간 게 전부가 아닌가.”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 문자 그대로 태산이 시끄러운 이유가 고작 쥐새끼 하나 때문이더라.
딱 이 정도가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이번 사태를 보는 관점이었다. 요충지를 상실한 것도 아니었고, 실질적으로 발생한 피해도 미미했다.
죽고 다친 사람은 안타깝지만, 나라가 들썩일 만한 일까지는 아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황제의 뜻은 바뀌지 않았고, 그대로 오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북경 일대에 눌러앉게 되고 말았다.
“태감, 대체 어찌된 일이오?”
이부상서 심일관과 병부시랑 형개는 대전에서 물러난 뒤, 곧바로 위충현을 찾아갔다. 그러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 내관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다.
“외방의 장수들이 국경을 막지 못해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민심이 들썩이고 있다고 하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인가 합니다.”
“이 보시게, 태감. 피해는 극히 적었고, 앞으로 오랑캐가 변방을 넘어오지는 못할 걸세. 이 점을 폐하께 잘 말씀드려 주게나.”
신료들의 요청을 받은 내관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오랑캐는 장성을 넘지 못한다. 그게 대명제국의 방침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보시지요. 감히 오랑캐 따위가 직례로 들어왔습니다.”
“어허,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뜻밖에도 위충현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간 관료들에게 협조적이었던 태도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민심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적어도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직례 일대에 대군이 머물러야 할 겁니다.”
“위 태감, 단지 쥐새끼 하나가 태산을 어지럽힌 것에 불과하오. 그러니…….”
“생각해 보시게. 도성 일대에 대군이 눌러앉으면 오히려 백성들의 동요가 심해질 수도 있음이야.”
두 대신은 끝까지 내관을 설득하려 했으나, 끝내 위충현은 축객령을 내렸다.
“이 이상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할 테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관료들은 얻은 것도 없이 허탈하게 돌아가야만 했다. 방문객들이 떠난 뒤, 위충현은 자신이 들었던 고향 소식을 떠올렸다.
- 거, 오랑캐가 지나간 윗마을이 쑥밭으로 변했다고. 다행히 우리 마을은 무사했지만,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어.
다시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일이었다. 아무리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들, 뿌리가 사라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더구나 후사를 남길 수 없는 환관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더욱 소중했다.
“하, 오랑캐가 다시 오지는 않을 거라고? 말들은 잘도 하네.”
한번 일어난 일은 그 자체로 가능성을 열어 놓는 법이다. 저들이 아무리 호언장담을 한다 해도, 오랑캐가 또 오지 말란 법은 없을 터였다.
그는 고향친구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즉시 황제를 알현해, 도성의 방비를 늘려야 한다고 주청했다.
황제는 신하들을 믿지 않았지만, 내관, 그중에서도 위충현의 말이라면 제법 귀담아듣는 편이었다.
- 장수들이 제 일을 하지 않아, 감히 오랑캐 따위가 직례까지 들어왔나이다. 폐하, 도성의 방비를 단단히 해야 하옵니다.
- 윤허한다.
아무리 황제가 조선을 징치하는 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라 해도, 역시 황도가 위협받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이게 조선 원정군의 증파가 취소된 이유였다.
* * *
칙서를 받아든 송응창은 참담한 표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걸 본 조승훈이 질문을 던졌다.
“대체 어떤 명이 내려온 겁니까?”
“증원은 없을 걸세. 이 병력으로 한양을 점령하라고 하시는군.”
그 말을 들은 장수들은 서로를 돌아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요양성에서 출발한 십만 대병 중에서 지금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약 칠만. 여전히 적지 않은 숫자였지만, 지금 상태로 어명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그럼 해로라도 열렸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나.”
이여송이 다급한 목소리로 질문했지만, 역시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조선 원정군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 문제는 역시 보급 문제였다.
병장기도, 화약도 모든 게 소모품이었다. 그리고 조선은 지금 명군이 점령한 땅에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다.
병서에 이르기를 치중, 그러니까 보급품을 운반할 인원과 수레는 실제로 싸울 병력의 세 배는 넘어야 한다고 했다.
요양성에서 의주, 그리고 의주에서 다시 본영이 있는 정주까지의 거리는 매우 멀었고, 조선군과 여진족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습격해왔다.
좁아터진 땅에 산과 구릉은 또 뭐 그리 많은지. 조금 마음을 놓을 만하면 매복이 튀어나오고, 그들을 추격하다 보면 굽이굽이 돌아가 놓치기 일쑤였다.
병력의 반을 덜어내서 수레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 제대로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장수들 모두가 불만을 토로했고, 그 심경은 총지휘관인 송응창도 같았다.
“기껏 물자를 여기로 날라다 놓으면 다시 요양성에서 가져와야 하는 판이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수로 한양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경략. 다시 조정에 품신을 올려야…….”
장수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놓는 가운데, 송응창이 입을 열었다.
“이쪽의 사정을 세세히 고하면, 폐하께서 받아들이시겠나?”
다시 군막 안은 조용해졌다. 그런다고 합리적인 명을 내릴 황제였다면, 애초에 지금 원정군이 이렇게 곤경을 겪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송응창은 화포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화약은 얼마나 남았나?”
“빠듯합니다. 아마 두세 차례 싸움을 벌이면 바닥나 버리겠지요.”
화포장의 답도 신통치가 않았다.
송응창은 눈을 감고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러나 남은 병력이라도 살려서 보내려면, 그가 결단해야 했다.
“모든 책임은 본관이 진다. 철수를 준비하도록.”
모두가 바라던 결정이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조선 원정의 총책임자가 바로 송응창이었고, 실패는 곧 그의 처벌로 이어질 터였다.
게다가 지금은 퇴각을 시도한다고 해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불필요한 물자는 모두 버려라. 화포도 무겁기만 하니 깨서 묻어 버리도록. 그리고 걸을 수 없는 환자들은…….”
뒷말이 생략되었지만, 어떤 내용일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조선이 남겨진 자들에게 관대한 처우를 해주기를 바랄 밖에.
“조금의 시간이라도 벌어야 하니, 적이 알지 못하게 오늘 밤에 바로 떠날 것이다. 차질없이 준비하라.”
“예, 경략.”
* * *
명군은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애를 썼지만, 조선 땅에서 조선군의 눈을 피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이 철수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혹시 아군을 꾀어내려는 계책은 아닌가?”
비변사의 도제조, 이원익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를 꼼꼼히 읽었다.
“이제 퇴각할 때가 되기는 했습니다. 아무래도 노이합적이 제법 큰일을 해낸 것 같군요.”
부제조 곽재우도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조선도 명나라의 사정은 세세하게 전해 듣고 있었다. 조선 원정군의 증원이 취소되었다는 소식도 이미 닷새 전에 받은 것. 바다로 곧장 들어오는 소서행장의 연통과는 달리, 저들은 육지를 빙 돌아야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항상 주의를 해야 하네. 손빈과 제갈무후도 추격해 오는 적을 계책으로 격파하지 않았나.”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물론 여전히 강대한 명군을 쥐에 빗대는 것도 어불성설이었지만, 어쨌든 마무리를 망치면 중간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아무 의미가 없을 터였다.
지금도 북경에는 십만 대군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그대로 자금성을 지키는 모양이었지만, 또 황제가 변덕을 부리면 다시 쳐들어오지 말란 법은 없었다.
수나라도 고구려를 두 번 쳤고, 당나라는 세 차례의 전쟁으로 기어이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적은 죽일 수 있을 때, 최대한 죽여야 했다.
그러나 실전 지휘관들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끝낸 상태였고, 그 대표인 평안 병사가 비변사 도제조를 안심시켰다.
“적이 계략을 써서 꾀어내는 것이라 해도, 저들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지칠 겁니다.”
“이 병사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좋네, 계략에 유의해서 명군을 추격하게.”
왕에게 모든 결정을 위임받은 비변사에서 최종 결정이 떨어졌다.
평양성에서 북변으로 향하는 봉화가 올랐고, 낭림의 산줄기를 따라 추격하라는 지시가 조선군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목포는 제대로 묻었나?”
“예, 장군.”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목포만 방포하고 후퇴한다. 적은 필시 이 고개를 지날 것이니, 긴장을 늦추지 마라.”
산과 언덕이 많다는 것은 대군이 지날 길이 한정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 요해처마다 조선군이 숨어 있었다.
“부윤, 이번에는 멋있는 말씀을 준비하지 않으셨습니까?”
“닥치게.”
송상현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가 세운 공이 크기는 했지만, 어쨌든 조선군은 한 사람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삭줍기나 다름없이 공을 세울 수 있으니 빠질 수 없는 자리라고도 할 만했다.
그때 망을 보던 병사가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명군이 나타났습니다.”
“저들은 척후로군.”
“그럼 그냥 보냅니까?”
매복의 묘를 살리려면 최대한 끌어들이는 것이 상도일 터였다. 그러나 송상현의 답은 그 상도와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아니, 병사 영감께서는 적을 최대한 경계케 하라 하셨다. 그러니 지금 공격한다.”
곧바로 목포가 불을 뿜었고, 조란환이 명군의 척후를 덮쳤다.
“의주부윤 송상현이 여기 있다!”
과연 선발대는 자신들을 습격한 부대를 돌파하려고 하는 대신, 본대가 있는 방향으로 부리나케 도망갔다.
송상현은 추격하려는 부하들을 제지시킨 뒤, 다음 명령을 내렸다.
“이제 여기에서 살짝 자리를 옮겨서 저기에 목포를 묻어 두어라. 그리고 발이 날랜 병사들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다음 고개로 가면 된다.”
적은 매복을 찾다가 지칠 것이다. 그리고 지쳐서 죽을 것이다. 그게 조선군의 방침이었고, 송상현은 거기에 충실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