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명군을 막아 보세(6)
“하내(河內)의 민심이 수상하다?”
“예, 쿠보.”
척계광의 수군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당장의 어떠한 계기가 될 만한 일은 없었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풀어놓았던 닌자들을 통해서 명나라 내부의 사정을 살피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어왔다.
“카와치(河內, 하내)에 무슨 변란이라도 생겼습니까?”
마사야스가 잠시 한 눈을 팔았는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명나라의 이야기일세.”
어쨌거나 한자는 같은 글자인데다 읽을 방법도 결국 한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으니, 집중하지 않으면 헷갈릴 여지는 충분했다.
어떤 몰지각한 사람들은 같은 문자를 두고 원래 우리 땅이었네 어쩌네 하면서 역사 속 음모론을 펼치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하천(河) 안쪽(內)의 땅을 또 뭐라고 부르란 말인가.
“아, 그랬지요.”
마사야스는 다시 입을 닫았고, 나는 첩보를 가져온 닌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금을 미리 걷었다고? 그 외에 다른 일은 없었나?”
“아직은 그렇습니다.”
“알았다.”
아무래도 명이 슬슬 망국 드라이브를 밟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자성이 발호했던 지역도 낙양 일대였던가.
강남으로 이어지는 대운하를 끊어놨으니, 쥐어짤 지역도 결국은 그쪽밖에 남지 않았을 터였다. 영제거는 내륙에 있어서 건드릴 수가 없었으니까.
“보바이는 여전히 영하성에서 버티고 있다고 했는데, 거기에 누르하치가 대명 전쟁에 끼어들었다고…….”
이건 조금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낸 편지를 읽은 뒤에는 다소 납득이 갈 만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외부의 적을 겨냥하여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것은 꽤 흔한 통치기술이 아니던가.
턱을 쓰다듬으며 지도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과연 어떤 식으로 지금의 상황을 더 유리하게 끌어낼 수 있을까.
지금 조선은 청야작전으로 원정군을 말려죽이고 있다고 했다. 명나라는 강남에 내려보냈던 병력 중 일부를 영하성으로, 나머지는 천진에 박아둔 상태였다.
“조선의 국왕이 살수를 언급했다고 했지.”
“그게 뭡니까?”
이번에는 킷카와 모토하루가 내 혼잣말에 질문을 던졌다.
“조선 이전의 왕조가 고려라는 것은 알고 있을 걸세.”
“그렇지요.”
“그리고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했지. 그 고구려가 당시 중원의 지배자였던 수나라를 격파한 곳의 지명이 살수라네.”
곱씹을수록 재밌는 이름이었다. 한자도 다르고 수도 수나라를 의미하는 隋가 아니라 강을 뜻하는 水지만, 말장난을 좀 쳐보자면 문자 그대로 수를 죽인다는 뜻도 되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더 이전의 역사를 곱씹다가, 문득 고수 전쟁의 양상이 생각났다. 고구려의 태자가 먼저 탁군, 그러니까 지금의 북경까지 치고 들어가서 도발했다던가.
“될지도 모르겠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에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마사야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모토하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계책이 떠올랐네.”
그러고 보니, 그 여진족이 조선을 유린해버린 방법도 기동전이 아니었던가. 누르하치라면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 * *
영하성에서 꾸준히 명군을 괴롭히고 있었던 보바이는, 일본국 쿠보가 보내는 정기적인 물자를 받으면서 동시에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여진의 버일러가 여긴 어쩐 일로 왔는가?”
“물자를 전해주러 온 것도 있고, 우리 형님께서 꽤 좋은 계책을 알려주셔서 말이오.”
버일러. 조금 세력이 큰 족장을 부르는 말이다. 왕이나 칸이라고 불러주지는 않더라도, 어쨌든 여진족 전부를 아우른 사람에게는 다소 실례되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굳이 보바이가 부르는 자신의 칭호를 고치지 않았다.
여진의 칸을 자처하는 것도 아직은 내부적인 것에 불과했고, 무엇보다도 몽골을 상대로 신경전이나 벌이고 있기에는 아직도 명나라는 강대했다.
“좋은 계책이라? 나와도 관련된 일인가?”
“보바이 공이 따로 할 건 없소. 장성만 넘게 도와주시오.”
여진의 지배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몽골인은 그 이야기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뭐, 장성을 넘어?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몽골이나 여진이나 모두 북방의 유목민족이다. 그들은 초원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장성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장성은 단순히 경계나 거점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외적의 침입을 막는 벽인 동시에, 그 자체로 기어들어온 유목민의 도주를 막는 포위망이기도 했다.
보바이 본인조차도 지금 영하성에 눌러앉아서 포정사 마귀와 대치하는 게 고작인데, 겨우 여진족 따위가 장성을 넘겠다고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장성을 넘어가면 무조건 죽어. 그대로 명군의 바다에 익사해버린단 말이다. 차하르 부의 칸도 못할 일을 고작 그 졸개의 말예 따위가 하겠다고?”
몽골 사람은 누르하치의 출신까지 들먹여가면서 뜯어말리려 했다. 누르하치의 선조들은 이성량이 대두하기 이전의 시대에 차하르 부를 따랐던 것을 빗댄 이야기였다.
물론 상대에게는 모욕적일 터였지만, 보바이로서는 나름대로 선의를 베푼 것이었다.
“거 말이 심하시군.”
“네 녀석의 말이 더 심하다는 건 모르나? 동쪽 촌구석에만 박혀 있어서 명나라 무서운 줄 모르는데, 내 충고를 듣는 게 좋을 거야.”
“어차피 그대에겐 관련이 없는 일일 텐데?”
“목숨을 재촉하는군. 뭐, 이 영하성도 장성의 일부지. 여기서 남쪽으로 곧장 내려가기만 하면 바로 장성 이남이야.”
가볍게 무장한 기병 오천이면 적어도 추격하는 명군으로부터 도망다니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그게 전부일 터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보바이가 누르하치의 사정을 깊게 헤아려줄 의리도 없었다.
적당히 생각을 끊은 그는 상대에게 전선의 빈틈을 말했다.
“지금 명군은 남문과 동문에 주로 몰려 있지. 북문으로 나가서 서쪽으로 조금 돌면 추격 정도는 뿌리칠 수 있을 거다.”
“고맙소.”
* * *
과연 보바이의 말대로였다. 영하성을 공격하는 명군은 누르하치를 뒤쫓지 못했다. 대신 밤마다 사방의 멀리서 화광이 충천한 것을 보면, 봉화로 이쪽의 위치를 전파하는 모양새였다.
“진짜 무시무시하군.”
“이거, 실수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연 사람은 호호리(何和礼 하화례)라고 하는, 일찍부터 누르하치에게 귀부했던 건주 여진의 한 족장이었다.
그런 호호리에게 다른 장수 하나가 대꾸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누르하치 밑으로 들어온 어이두(额亦都 액역도)라는 자였다.
“뭐, 칸께서 정하신 일이니 따르기만 하면 그만이 아니겠소, 형님.”
“나도 우리 형님의 말씀만 아니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누르하치가 의형제들의 말에 답했다. 그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형님으로 모시는 것처럼, 호호리와 어이두 역시 누르하치의 의동생들이었다.
“하지만 형님은 충분히 뒤를 받쳐주실 만한 분이니, 믿어도 좋다.”
“그 분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물론이지. 너희도 보지 않았나.”
“멀리서 보는 거하고 형님처럼 바로 옆에서 보는 거하곤 조금 다르지 않겠습니까.”
의형인 동시에 주군인 누르하치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그들도 믿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역시 장성을 넘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미친 짓일 터였다. 그것도 고작 오천의 기병만 가지고 말이다.
이 위험천만한 일을 서신 한 통으로 감행하러 나선 누르하치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조금 더 행군 속도를 높이도록. 식사도, 잠도 모두 말 위에서 한다.”
아무리 명군의 추적이 하늘을 뒤덮는 그물과 같다 해도, 단순히 말을 달리는 일이라면 여진족이 훨씬 나았다.
누르하치는 그 간극을 노리려 했다. 성과 마주하면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명군이 나타나도 싸우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을이 보이면 그대로 불태워버리고, 쑥대밭으로 만들어 명나라를 자극했다.
그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진격 속도로 북경을 향해 접근해 들어갔다.
그리고 가까울수록 명군의 포위망도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했습니다그려!”
“북경이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힘내라!”
보급이라고는 말의 다리에 매달아놓은 육포가 전부였다. 가히 옛 칭기즈칸이 이끌었던 몽골제국의 행군 속도를 능가하는 쾌진격이었다.
원래 군사작전이란 점령과 보급을 전제로 하는 법이었지만, 지금의 누르하치와 여진 기병들에게는 그 이치가 통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깊이 들어가서 뭘 하는 겁니까?”
“황제를 놀라게 해주라고 하시더라.”
“그게 끝입니까? 그 다음은요?”
“잘 도망쳐야지.”
누르하치의 말을 들은 여진의 장수들은 벙찐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빠져나올 길이 없지 않습니까?”
“왜 진작 말씀해주시지 않은 겁니까?”
“그랬다면 따라오지도 않았을 녀석들이……. 걱정 마라.”
여진 기병대가 북경의 남쪽 관문 역할을 하는 보정이라는 도시를 앞두었을 때, 한 사내가 그들과 합류했다.
“쿠보의 명을 받아서 길안내를 하러 왔습니다. 단조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래, 어디로 가면 되겠나?”
“지금 북경은 명군이 바짝 대비하고 있으니, 들이치실 수는 없을 겁니다. 대신 상주(常州)로 돌아서 발해만으로 가시지요.”
거기에서 연합수군과 합류하라는 이야기였다.
“지금 자금성이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조선으로 증원하려던 병력도 전부 북경으로 불러들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모두 누르하치 님의 공입니다.”
“그거야 살아서 돌아갈 때의 이야기지.”
닌자의 말에 대꾸한 누르하치는 부하들에게 다시 명을 내렸다.
“이제 마지막이다! 모두들 마음 놓지 말고, 살아서 돌아갈 생각만 해라!”
과연 길잡이의 말대로, 여진 기병의 앞에는 명군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발해만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마을을 불태우며 진격했다.
* * *
바닷가에서 불꽃이 솟아올랐다. 명나라에 미리 투입해두었던 닌자가 보내는 신호였다.
“저기로 배를 대라.”
이미 명나라 수군은 궤멸된 상태. 명나라 조정의 방침도 단순히 상륙을 막는 것으로 그친다 했으니, 지금 연합수군을 막아낼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역시 누르하치가 해냈군. 서둘러 수용하고 빨리 뜨도록 하지.”
여진 기병을 태우기 위해 작은 배들이 내려졌고, 다행히 그들을 수용하는 동안 방해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누르하치가 무사한 것을 확인했다.
“고생 많았네!”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형님!”
그도 십년감수, 아니 그 배는 수명이 줄어들 만한 일을 감수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불과 보름 만에 약 이백오십 리, 그러니까 1,000km 가량을 쉬지 않고 달린 셈이었다.
거지꼴도 이런 상거지가 없었지만, 나는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동생을 와락 끌어안았다.
“자네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네만, 과연 해냈군.”
병자호란 당시에 청군은 불과 사흘 만에 개성까지 들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누르하치는 그보다 더 큰 위업을 세우고 말았다.
“이제 이 전쟁도 곧 끝이 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