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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201화 (201/225)

201화 명군을 막아 보세(5)

조선은 안주성을 거점 삼아 그대로 눌러앉았고,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다소 불상사가 있긴 했어도, 그동안 나름 순조롭게 진격했던 명군은 이제야 겨우 조선군의 실체와 맞서게 되었다.

경략 송응창은 전선을 살피다가 문득 이여송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강의 이름은 무엇인가?”

“압록을 지나서 곧 평양을 앞두고 있으니, 청천강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의 명군에 향도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고작해야 이씨 일족이나 그 밑에서 일하던 자들이 주워들은 것을 토대로 대강의 거리만 잡아내는 것에 불과했다.

“조선의 선비들이 일부라도 천명에 순응하기를 기대했건만…….”

총지휘관이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터였지만, 송응창은 한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조선은 압록강 이남에서 평양에 이르는 지역을 깨끗하게 비워두었고, 길잡이로 써먹을 백성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나마 군량을 넉넉히 가져와서 다행이군.”

명나라 조정에서 처음 조선 원정을 논의했을 때, 천조를 따르는 사대부들이 도우러 나서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직 대부분의 고위관료들은 제정신이었고, 낙관론은 힘을 얻지 못했다.

만약 위충현의 권세가 완숙했더라면, 또 모를 일이었다.

황제는 최대한 많은 군대를 보내라고 명했고, 군량을 적게 들일 수 있다면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런 중대사에 아부를 떨 정도로 새로운 총신의 권세가 굳건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이 온통 산이고 평야라고 할 만한 곳조차 구릉이 끼어 있으니, 소출이 얼마 나기나 했겠습니까. 의병이랍시고 끼어들어서 천군의 군량을 축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겠지요.”

“듣고 보니 또 그렇군,”

도성 인근의 평야만 해도 조선 전체의 면적을 능가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오랑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송응창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고사를 돌이켜보았다.

그러나 정작 조선과 중원은 엮여서 좋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

“옛 수나라의 양제는 백만 대군을 일으켜서 고구려를 쳤다지?”

“당나라 때에도 수십만을 동원해서 세 번이나 전쟁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고사에 밝은 편인 첨사 유정이 상관의 말을 받았다. 갑자기 송응창이 옛 일을 들춘 것이 불길했지만, 일단은 부하된 몸으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수십만을 동원했지만, 지금 우리는 고작 십만에 불과하지. 하지만 조선은 감히 군대를 내어 맞서지 못하고 있으니, 승산은 충분하지 아니한가.”

“겨, 경략의 말씀이 옳습니다.”

“옛 선현들도 이루지 못한 대공이 되겠군.”

*       *       *

조선 원정군이 안주성을 앞에 두고 있는 동안, 북경의 신하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척 장군이 패배해?”

“야습을 가하려다, 역으로 준비하고 있던 소서행장에게 당했다 합니다.”

이부의 시랑에서 상서로 승차한 심일관은 품계가 오른 것을 좋아할 사이도 없이, 충격적인 보고를 받아야 했다.

“수군이 패배했다면 다음은 천진이 아닌가. 혹시 이 일을 또 누가 알고 있나?”

“저자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어김없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허어, 알겠네. 자네는 일단 입단속하고, 조용히 업무에만 집중하도록.”

심일관은 부하에게 단도리를 박은 뒤, 곧장 병부로 향했다. 거기에는 위충현도 이미 와 있는 상태였다.

“위 태감.”

“상서께서도 들으신 모양입니다그려.”

“그렇소이다.”

간교한 꾀로 황상의 총애를 얻은 환관이라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필요한 인사였다.

“황상께서도 알고 계신가?”

“일단은 장계를 막아놓았습니다.”

심일관은 병부시랑 형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거기에 답한 것도 위충현이었다.

“아니, 태감이 왜, 아니지. 되었소이다. 급할 때는 권도를 쓸 수밖에 없으니 말이오.”

이부상서는 일개 내관이 조정의 일에 관여했다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지만, 어쨌거나 그도 장계가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지금 병부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전임 상서인 석성은 그대로 처형되었고, 그 뒤를 이은 송응창은 조선으로 가버렸다. 또 다른 시랑이었던 형개가 병부상서를 대행해서 업무를 보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알아주셔서 다행입니다.”

만약 황제의 귀에 척계광의 패사(敗死)가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비록 심일관이 군문에 밝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왜적과 천군이 서로 싸워서 완전히 이길 수 없는 상태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소서행장이 아무리 바다에서 날뛴다 해도 뭍으로 올라오지는 못할 터였다, 그리고 신하된 자로서 참람한 생각이기는 해도, 천자의 군대 역시 바다에서 왜적을 쓸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날이 성정이 괴팍해져가는 폐하라면? 당장 소탕하라는 어명이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운하를 재건하는 일도 보통 대사업이 아닌데, 상륙만 막으면 될 왜적을 발본색원하려고 든다면…….”

“내탕고로도 감당키가 어렵겠지요.”

그러한 사실은 창고지기로 내관 생활을 시작한 위충현도 잘 알고 있었다.

권력을 쥐기 전이야 무슨 짓을 벌여도 상관이 없지만, 쥔 다음에는 유지를 하는 것이 최대의 난관인 법. 지금 새로 총애를 얻은 내관의 상황이 딱 그런 경우였다.

“바다는 다시 막아버리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정말 소서행장이 천진에 상륙하지는 않겠습니까?”

“약 이만 정도라 하니, 올라와주면 오히려 다행일 겁니다.”

그 부분만큼은 형개도 자신 있게 답했다. 심일관은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전장을 물어보았다.

“좋소이다. 그런데, 영하성의 발배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이까?”

“계속 대치 중입니다. 마 포정사가 지금 백중세라 하였으니, 조금만 힘을 실어주면 될 듯한데…….”

황제는 조선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지만, 병부에서는 오히려 영하성에서 일어난 변란을 더 경계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조선은 명나라 자체에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몽골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일단은 강남으로 내려 보낸 병력을 다시 불러올리도록 하고, 척 장군은…….”

“절대 도성으로 올라와선 안 됩니다. 본인은 장계에 스스로를 묶어서 바치겠다고 써놓았지만, 그랬다가는 되려 폐하의 분노만 사고 말 겁니다.”

환관의 말을 들은 두 관료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스럽겠지만, 형 시랑이 직접 가서 설득해주시오.”

“알겠습니다.”

*       *      *

명군이 청천강까지 다가온 지금, 조선의 국왕은 평양으로 행행(行幸)을 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의 군주가 대비태세를 검열하러 나온 것이 가까웠다.

“굶겨 죽인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왕은 흥미로운 눈으로 좌의정 겸 비변사 도제조를 내려보았다.

“지금 명군이 상당히 지쳐있다고 들었는데, 조금 더 공세적으로 나갈 수는 없겠는가?”

“통촉하시옵소서, 전하. 병서에 이르기를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 최상의 계책이라 하였사오니…….”

“알고 있다. 그냥 물어본 것이니, 도제조는 마음에 두지 말라.”

비록 종친으로서의 예우는 그 부친의 대에 끝났지만, 그런 이유로 왕은 더더욱 이원익을 신임했다. 그가 직접 보고한 내용이라면, 그게 최선일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질문을 기회로 받아들인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전하, 소장에게 명을 내려주시면, 당장이라도 적의 수급을 취해오겠나이다!”

“선전관은 언제나 기개가 넘치는군. 그러나 지금은 비변사에서 그리 논했고, 과인도 다른 계책을 찾을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왕은 좋은 말로 원균을 말렸다. 그러나 사실 그도 이 겉만 요란한 장수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단지 동서 양당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일부러 승지 대우를 받는 선전관으로 삼았을 뿐, 곁에 두고 보면 볼수록 빈 수레나 마찬가지인 자였다.

어쨌든 경공방 소서행장의 서신에 의하면, 명나라는 아직도 여력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니 당장 눈앞의 십만에 온 힘을 쏟아 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원익의 말대로, 싸우지 않고도 이길 계책이야말로 조선에 절실했다.

“도제조의 계책을 윤허한다. 그대로 시행토록 하되, 이후의 일은 도제조가 평양에 남아 진두지휘하라. 일일이 과인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원래의 안은 평양까지 끌어들인 다음, 명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포위해서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호전된 지금, 굳이 초안을 유지해서 잠재적 피해를 늘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 비변사에서 의논한 결과였다.

“명군은 기병의 숫자가 아주 많다 하니, 습격함에 있어 그 부분을 특히 유의토록 하라.”

“다행히 아국의 산천이 방비에 유리하여, 그 부분을 적극 활용코자 하나이다.”

역시 비변사에서 의논했던 내용 중 하나였기에, 이원익은 거침없이 답을 내놓았다.

압록강 유역과 청천강 유역도 나름대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었지만, 병력을 숨길만한 산지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첨사 서예원과 순변사 신립이 각각 적유령과 묘향산에서 명군의 보급로를 끊으려 준비하고 있나이다. 게다가 승려들도 적극 돕겠다 하였사오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제 왕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머지는 장수들이 자기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는 것만이 남았을 뿐일 터였다.

모든 용건을 마친 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 평양은 옛 고구려의 도읍지가 아니던가.

어딘가에는 고구려의 왕궁이 자리하고 있었을 테고, 거기에서 문무관료들이 지금처럼 중원의 패자를 막아낼 방법을 논의하고 있었을 터였다.

“경치가 참으로 좋은데, 이 누각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을밀대라 하옵니다, 전하.”

평안도 관찰사 권율이 곧바로 답을 올리고, 추가로 내력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문헌에 남지는 않았사오나 촌부들의 민담에 의하면, 을지문덕 장군의 후예가 군대를 머무르게 했던 터라 하옵니다.”

“오호, 그러한가?”

요즘 왕은 고구려의 사적에 부쩍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을지문덕이라는 이름 역시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을지문덕이라면 수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명장이니, 분명 그 후예도 좋은 곳에 터를 잡은 것이 아니겠는가.”

“소신 또한 그리 생각하나이다.”

“그러고 보니 을지문덕은 살수라는 곳에서 크게 이겼다고 들었다. 이 근처일 듯한데…….”

이번에는 비변사 부제조 곽재우가 답했다. 그 역시 계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옛 기록을 많이 살폈고, 전장의 위치상 고구려의 사례를 빼놓지 않을 수 없었다.

“문헌이 소략하여 자세히는 알 수 없사오나, 대동강을 이르는 패수와 압록강을 이르는 비류수 사이에 있다 하니 청천강이 아닌가 하옵니다.”

“청천강이라, 청천강. 거기에서 대치 중이 아닌가. 참으로 길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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