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명군을 막아 보세(4)
해가 서서히 서쪽 바다로 기울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하루의 마무리를 준비할 시간이었지만, 지금 연합수군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주했다.
“서둘러라. 조금이라도 늦어졌다간 작전 자체가 실패로 돌아간다!”
장병들이 부지런히 마무리 작업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모리와 미요시가 넘겨준 구형 선박의 상태를 살폈다.
“화약과 기름, 짚단은 적당히 실었고, 불씨가 담긴 도기는 조심스럽게 두었겠지?”
“예, 쿠보. 혹시라도 먼저 폭발해버리면 모든 게 수포가 되고 말테니, 신중하게 설치했습니다.”
“좋군.”
발해만에 틀어박힌 척계광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연합 수군은 내내 발해만 내부를 휘젓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항구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고 언제든지 내뺄 수 있다는 모습을 강하게 드러내도록 했다.
처음에는 바짝 긴장하던 명나라 수군도 이제는 일상적인 초계 내지는 탐색 정도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그렇게 타성에 젖을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해가 지기 직전, 예정보다도 조금 이른 시간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좋다, 화공선을 출발시켜라.”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삼산포(三山浦) 앞바다였고, 다른 항구인 내주(萊州)에서도 별동대가 여기와 마찬가지로 화공을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어두워지는 밤바다에는 아직까지 해풍이 불고 있었다.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지만, 배가 속도를 받기에는 아직도 충분했다.
화공선으로 개조를 마친 관선에는 마지막에 기폭시킬 병사 하나만이 타고 있었고, 그 뒤를 쾌속선이 뒤따랐다.
그 모습을 본 미요시 마사야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역시 남만식 범선이 좋긴 좋군요. 노를 젓지 않고도 저렇게 빠르게 흘러가버린다니.”
“다행히 바람도 우리를 돕고 있네.”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화공선이 삼산포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명군은 뒤늦게 대응에 나서려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을 터였다.
콰콰쾅!
한밤중이었지만 삼산포가 있는 방향은 아주 밝았다. 기폭된 화공선은 몇몇이 가라앉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물에 떠서 항구와 배들을 불태웠다.
그때 뒤쪽에서도 약간 낮은 높이로 한 줄기 불꽃이 솟아올랐다. 연녹색, 내주로 간 별동대가 성공적으로 기습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쿠보, 내주의 공격도 성공적인 모양입니다.”
“나도 보았다. 우리도 어서 신호를 보내라.”
* * *
- 왜구가 어지럽히고 있으니 당장 군선을 내어 소탕하라.
그날도 척계광은 칙서를 받아야 했다. 왜구가 발해만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황상은 그에게 줄기차게 토벌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오랑캐라고 해도 섣불리 상대하기는 어려운 적이었다. 오직 지형의 유리함에 의지해 끌어들이고, 일망타진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일 터였다.
다행히도 황상의 총애를 받는 위충현이 그의 편을 들어주었고, 그는 발해만의 방비체계를 굳혀나갔다.
해안가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언제든 출격시킬 수 있게 신호를 정해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보고가 들어왔다.
“내주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척계광은 처음 보고를 받을 때만 해도, 드디어 소서행장이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했다.
“됐다! 당장 출격한다. 내주의 아군이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왜구의 뒤를 후려야 한다!”
그때 또 다른 보고가 들어왔다.
“장군, 삼산포가 공격받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 녀석들이 병력을 나누었단 말이냐?”
“그런 모양입니다.”
상관의 질문을 받은 군관은 그렇게 답했지만, 천진에 눌러앉아있던 그들이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은 없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척계광은 혀를 차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주냐 삼산포냐. 언뜻 보기에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그리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왜적들이야말로 어리석은 계책을 냈다. 한데 뭉쳐도 수적으로 부족할 판에, 굳이 나눠가면서 양공을 펼치지 않았는가. 삼산포에 머무르고 있는 진린도 재주가 모자라지 않으니, 소수의 도적떼를 상대로 시간 정도는 끌 수 있을 터였다.
판단을 마친 그는 자신의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다.
“삼산포의 진 첨사라면 능히 버틸 것이다. 그대로 내주로 향하라!”
척계광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은 호호탕탕한 기세로 밤바다를 가로질러나갔다. 그렇잖아도 숫자만큼은 압도적으로 우세인 판에, 적이 병력을 분산시키기까지 했다. 승산은 그들에게 있었다.
적어도 명나라 수군에 속한 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적과 마주하기 전까지는.
“앞에 배 그림자가 보입니다.”
“선루에 불을 환히 밝히고 북을 두드려라!”
보고를 받은 척계광은 전투 준비를 명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묘하게 적선의 숫자가 많았다. 이미 발해만을 들쑤시고 다니는 동안, 상대의 규모쯤은 파악한지 오래였다.
물론 저들이 관선이라 부르는 배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주력이라던 남만선의 숫자가 상당했다.
“설마……!”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피이이이, 펑!
대국의 전유물, 고작해야 조선 정도나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것도 저쪽에서.
화려한 조명이 명나라의 군선들을 감쌌고, 이어서 포격이 쏟아졌다.
* * *
조선군은 의주성에서 물러나서 정주성까지 내어준 뒤, 청천강을 끼고 있는 안주성에 결집했다.
약 백오십리 가량을 내어준 셈이었지만, 군의(軍議)에 참석한 장수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 근엄한 평안 병사 이순신조차도 농담을 할 정도였다.
“천자께 바치는 조공이라니, 자네가 해학에도 일가견이 있었군.”
“크흠, 병사 영감, 제발…….”
“아니, 좋지 아니한가. 작전을 성공했으면 사내가 그 정도의 패기는 있어야지.”
의주성에서 벌였던 공성계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조선군의 장병 중에서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입성한 명군은 성을 함락시킨 보람도 없이 상당한 타격을 입어야 했다.
만약 그 반대였다면 송상현은 이렇게 놀림감이 되기는커녕, 그 책임을 지고 어떤 식으로든 처벌을 받아야 했으리라.
명군의 본대, 그 중에서 선발대에 속한 이만 중에서 태반이 의주성에서 죽거나 다쳤다.
그리고 호되게 당한 그들은 이어지는 성과 요새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였다.
설마 또 공성계를 벌이지는 않았는지, 혹은 이러한 의심암귀를 이용해서 또 다른 계책을 꾸미지는 않았는지 등등을 따지느라,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다.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약올려준 덕에, 명군을 더 지연시킬 수 있지 않았나. 다, 부윤의 공일세.”
지나치게 놀렸나 싶었던 이순신은 그렇게 송상현을 달래 주었다. 실제로도 그가 허세 아닌 허세를 부려 준 덕에, 좀 더 다양한 계책으로 명군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비변사 부제조 곽재우의 솜씨가 가장 뛰어났다.
- 붉게 칠한 상자에 ‘朝貢(조공)’이라 적은 뒤, 명군의 진격로에 놓게.
의주성에서 송상현이 외쳤던 말을 기억했던 명군은 화약이 들어 있겠거니 하고, 그 상자를 멀찍이서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막상 거기에 담긴 것은 화약이 아니라 귀한 약재, 홍삼이었다. 한동안 쌉쌀한 약냄새가 명군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그 다음에 나타난 상자는 달콤한 냄새를 풍겼고, 거기에 홀린 명군은 곧바로 뚜껑을 개봉했다. 물론 꿀이 있기는 했지만, 사나운 벌들도 가득 들어있는 상자였다.
아무리 천하의 주인이라는 천자의 군대라고 해도 벌레를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적지 않은 병사들이 벌에 쏘여 한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상자. 약이 오른 명군은 거기에 모여들어서 짚을 쌓고 불을 붙여버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꿀과 벌 대신에 다른 것이 들어 있었다.
- 쾅!
이번에야말로 대폭발이 일어나, 상자를 에워싸고 있었던 명군을 집어삼켰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하지도 못하고, 계속 농락당하기만 한 명군의 사기는 바닥을 기지 않을 수 없었다.
“부제조의 계책이야말로 신통했지요.”
거기에 단초를 만든 것이 바로 송상현이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느끼는 민망함도 조금은 줄어들었다.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놓은 이순신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제 우리는 청천강을 뒤로 하고 있네. 이 뒤로는 아무 장애물이 없이 평양으로 이어지지. 그러니 아국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면, 이제는 물러나서는 안 될 것일세.”
물론 초기의 대전략은 대동강까지도 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명군에 입힌 타격을 생각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처음 명군의 규모는 본대와 별동대를 합쳐서 도합 십만. 그 중에서 본대 오만이 의주성에서 일만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별동대 역시 온전히 진격하지는 못했다.
이순신은 야규 무네요시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유생(柳生, 야규) 공의 병력이 크게 활약해준 덕에, 별동대 역시 크게 타격을 입었다고 들었소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무네요시는 자기 주군의 명을 지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속 병력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다만 철포로 무장하지 못한 다른 세력의 병력은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물론 조선이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고, 그나마 일본의 사정에 밝은 편인 이순신도 적당히 넘어갔다.
그런 이유로 조선의 장수들은 일본군이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가면서 싸움에 나서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전관으로 역시 참석하고 있었던 원균도 한 마디를 보탰다.
“벽동성에서 혈전을 벌였다고 들었소.”
“군수가 본을 보여 준 덕에, 아국의 장수들이 자극을 받았을 뿐이외다.”
무네요시는 그렇게 대꾸하며 당시의 싸움을 회상했다. 원래 그는 적당히 싸우다 물러날 생각이었다. 애초에 조선군의 방침도 그러했고, 벽동성 자체도 방어력이 높지는 않았다.
그런데 벽동군수 김시민이 먼저 달려 나가서 치열하게 싸웠고, 그걸 본 일본의 장수들이 가세한 것이 컸다.
- 조선은 모두 선비만 있다고 하더니, 벽동의 카미(守, 군수)야말로 진정한 무사다!
모리 가문 휘하의 병력으로 따라온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그 뒤를 따라서 뛰쳐나갔고, 다른 무사들도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심지어 그 서생 같던 이시다 미츠나리까지 그럴 정도였다.
결국 무네요시가 직접 나가서 그들을 구해야 했고, 일본군이 입었던 피해는 대부분 그 과정에서 생긴 것이었다.
어쨌든 주군에게 할 말이 생겼기에, 무네요시는 당시의 일을 조용히 묻어버리기로 했다.
“거, 벽동군수가 좀 혈기가 넘치긴 했소. 요행히 좋게 끝났소만, 내가 있었다면 더 나았을 거요.”
원균은 기어이 자신을 과시하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그가 주목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고 선전관이 공을 세울 기회는 있을 걸세.”
이순신이 그렇게 마무리를 지은 뒤, 지도를 가져오게 했다. 명군은 크게 상하고 지친 상태, 이제 조선이 반격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