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명군을 막아 보세(3)
조승훈이 이끄는 명군의 선발대는 압록강을 건너온 이래, 공성전을 준비하는 동안 하루에도 여러 차례의 포격을 당해야 했다.
쾅!
“히익!”
“반격하라!”
그렇게 움츠러들었다가 폭발이 일어난 곳을 확인하면 어김없이 부서진 나무토막이 있었고, 멀리 조선의 기병대가 달아나는 먼지구름만 보였다.
일개 졸병부터 조승훈에 이르기까지, 명군은 모두 신경쇠약을 호소할 지경이었다. 단순히 소리만 요란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면, 그들도 신경을 꺼 버리면 그만일 터였다.
그러나 실제로 날아드는 포탄은 인마를 살상했다.
때로는 쇠사슬이 날아들어 이리저리 튀어다니며 진중을 휘저었고, 가끔 작약탄이 굴러다니다가 뻥 소리와 함께 많은 병사들을 해쳤다.
참다못한 조승훈은 휘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화포라는 물건은 어차피 놓을 수 있는 자리가 한정된 것이 아닌가. 초계를 배로 늘리고, 모조리 훑어내!”
그럴 만한 장소를 집중적으로 먼저 탐색하라는 지시였다. 명군 역시 화포를 운용한 역사가 길었고, 어느 나라보다도 그 이치에 밝았다.
화포란 그 자체로 막대한 무게를 지니고 쏠 때마다 반동을 견딜 만한 자리에 놓아야 하는 법. 그런 장소는 의외로 전장에서 그다지 흔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이 기습에 사용하는 화포가 그들의 상식 밖이었다는 것일 터였다.
“이미 총병께서 말씀하신 방법을 시행해 보았습니다만…….”
“그렇다면 성과가 있었을 것이 아니냐!”
장수들은 우물쭈물하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총대를 매고 입을 열었다.
“총병, 아시다시피 조선군은 지금 목제 화포를 일회성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모래톱 위에서, 때로는 산비탈에 구멍을 파고 화포를 배치한다. 한 번만 쓰고 버릴 물건인데다 목제라서 상대적으로 가볍기 때문에, 지형상의 제약이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
이러한 설명을 들은 조승훈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지휘봉을 내던졌다.
“그렇다면 이대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단 말이냐!”
“어쩔 수 없습니다, 총병.”
“좋다, 척후를 두 배가 아니라 네 배로 늘리고, 본대가 올 때까지 우리는 의주성 주변을 청소하는 일에만 주력한다.”
어차피 조선이란 작은 나라이기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조승훈은 거기에 주목하고 숫자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 * *
“병사 영감, 아무래도 명군의 진영 가까이 가기는 어렵겠습니다.”
적정을 살피고 돌아온 군관이 평안 병사에게 보고를 올렸다. 명군의 척후는 뻑뻑할 정도로 많고, 모두가 말을 탄 기병이기도 했다. 아마 이순신이 이끄는 부대보다도 명군의 선발대가 풀어놓은 척후가 더 많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모저모를 따지던 이순신은 더 이상의 기습을 시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되었다. 다행히 아군의 피해는 없고 명군은 제법 많은 수가 상했으니, 이제 다음 계책으로 넘어가도 좋겠지.”
명군을 괴롭히던 조선군 유격대는 이제 의주성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영감, 성 내의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혹시나 해서 묻겠네만, 말을 타지 못하는 자들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영감.”
의주부윤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상관에게 답했다. 전쟁을 준비한 기간만 해도 수 개월이 걸렸고, 백성들 역시 후방으로 피난시킨지 오래였다.
지금 의주성에는 계책에 필요한 인원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명군이 알아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적장이 우리가 의주성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감. 이미 그에 대한 안배도 모두 끝내 두었습니다.”
부윤은 그렇게 말하며 목판 하나를 가리켰다. 거기에 쓰인 글귀를 본 이순신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명군이 공성병기를 앞세워 의주성으로 접근해 왔다. 섣불리 포위하는 대신, 북문에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큼직한 깃발이 내걸려 있었다.
- 천조에 거스르지 말며, 마땅히 천명에 순응하라. 순응한다면 항복하고 한양으로 안내하라.
아무리 준비를 잘 갖춰놓은 상태라 해도, 공성전은 막대한 소모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천군을 자처하는 명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원정은 어디까지나 왜국 오랑캐와 붙어먹은 조선의 국왕을 징치하기 위한 것. 그러한 명분을 내세우며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다.
역시 비변사에서 논의한 대로라고 생각하며, 의주부윤 송상현은 준비해 놓았던 목판을 세우게 했다.
-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항복은 어렵다.
과연 답장을 받은 명군의 반응은 격렬했다. 먼지구름이 의주성을 뒤덮을 정도로 크게 일었고, 화포를 실은 수레가 전면으로 나왔다.
조선군 역시 그러한 광경을 손놓고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방포하라!”
양측 모두가 화약을 사용하는 이상, 공성전은 포격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벽을 기어오르고 그걸 막아내는 인간적인 치열함은 없었으나, 여장(女牆)이 깨져나가고 쇠구슬이 날아다니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기를 반나절 가량이 지난 뒤, 명군이 먼저 물러났다.
“이제 퇴각합니까?”
“아니, 고작해야 한 번 맞붙었을 뿐이니, 적어도 두세 번은 더 막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군에게 주어진 여유는 그리 길지 않았다. 부서진 성벽을 목책으로 보강할 틈도 없이, 곧바로 명군의 두 번째 공세가 이어졌다.
“차륜전을 펼치려는 것이로군. 좋다. 이번만 막아낸 뒤, 바로 남문을 열고 나간다.”
명군은 철저히 조선군을 소모시키고 힘을 빼버리겠다는 듯이, 포격으로 일관했다.
“오랑캐 놈들이 천조를 어설프게 따라하고 있잖느냐! 화포란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똑똑히 가르쳐주어라!”
성벽 위에서 포성이 한번 날 때마다, 명군의 진영에서는 그 서너 배의 폭발음이 울러 퍼졌다.
“과연 천조를 자처할 만하군.”
송상현은 약간 질린 표정으로 후퇴를 명했다.
“모두 말에 올라 남문으로 빠져나가라!”
이미 평안 병사 이순신이 퇴각을 돕기 위해 남문 바깥에 나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명군이 그걸 방해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조선군이 빠져나가고, 이제 남은 것은 의주부윤과 화포장, 그리고 화약에 능통한 몇몇 병사들뿐이었다.
지키는 병사가 없는 것을 확인한 명군도 성문을 곧바로 깨부수고 의주성 내부로 몰려들어왔다.
적당히 저항하는 시늉을 보였으니 저들도 지금 유인계를 의심하지는 않을 터, 그게 조선측의 의도한 바였다.
오만의 명나라군은 순식간에 성 내부를 가득 채우며 몰려들었고, 그걸 본 송상현은 남문루에 서서 심지를 태웠다.
“천자께 바치는 조공이외다!”
계사년 4월 열닷새, 의주성은 오랜 지병인 화약의 유폭으로 무너졌다.
* * *
조선은 성공적으로 명군에게 타격을 입히며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벽동군에 배치된 원군 역시 강계로 빠졌다가 평양으로 집결 중이라고 했다.
같이 소식을 받은 미요시 마사야스와 킷카와 모토하루도 진격을 건의해 왔다.
“쿠보, 우리도 뭔가 하기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일세.”
“하지만 역시 신중해야 할 겁니다. 쿠보께서 말씀하신 대로, 발해만은 거대한 통발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조금 더 적극적인 쪽은 마사야스였고, 모토하루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어쨌든 내가 곽재우에게 장담한 것도 있었으니, 발해만에 틀어박힌 명나라 수군을 깨부수긴 해야 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자네들은 돌아가는 게 어떻겠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쿠보?”
“혹여 저희가 방해라도 되는 것이라면…….”
킷카와 모토하루의 추측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내 직속 수군은 대부분이 드레이크에게 넘겨받은 레이스 빌트 갤리온을 기반으로 재설계한 함선이었지만, 미요시나 모리의 수군은 종래의 화선이 대다수였다.
빠르게 치고 빠지자면 그들은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돌아갈 것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방해라, 틀린 말은 아니네만, 그보다는 자네들의 배를 좀 더 잘 써먹을 방법이 있어서 그렇다네.”
“부디 고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질문에 내가 구상했던 계책을 밝혔다.
“화공을 벌이고자 하는데, 자네들의 배를 쓰고 싶네.”
화공을 위한 배를 급조하자면 따로 시간과 비용이 들 터였다. 그러나 모리와 미요시의 구식 선박을 갖다 쓰면 그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다.
“물론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닐세. 어쨌거나 자네들이 쓰고 있는 관선은 꽤 오래되지 않았나. 내 휘하의 수군이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다섯 척에 하나씩 주도록 하지.”
“저희들의 관선 다섯 척과 쿠보께서 쓰시는 신형 함선 한 척을 교환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보았네.”
그들도 내가 사용하고 있는 선박을 종종 부러워하곤 했으니, 나쁜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과연 본인이 세력의 주인인 마사야스는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았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킷카와 모토하루는 가주인 자기 조카의 대리인이었고, 일개 가신이 섣불리 결정할 만한 사안은 아닐 터였다.
그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추측했는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던 모양이었다.
“쿠보께서 쓰시는 신형 함선을 주신다 해도, 저희는 그걸 오래 쓸 방법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역시 수군 전통이 꽤 있는 편인 모리 가문은 무엇이 곤란한지 대번에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마사야스의 반응이 시원시원했다.
“아, 이보게나. 쿠보께서 그런 것도 안배하지 않으시고서 이렇게 좋은 제안을 주셨겠나.”
“과연, 시코쿠 간레이가 바로 보았네. 적당한 비용만 치르겠다면, 얼마든지 스모토의 조선소를 빌려줌세.”
“제가 쿠보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부디…….”
모토하루도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걸로 그들의 수군력에도 내가 목줄을 채운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들은 서양의 최신식 선박을 운용할 기술이 없었다. 단순히 사용하는 방법이야 선원을 고용해서 익힌다 해도, 모토하루의 말마따나 유지 보수는 별개의 이야기일 테니까.
이제 스모토의 조선소에 그들의 군선을 맡기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딴 마음을 품었다는 징후나 다름없게 될 터였다.
슬쩍 마사야스의 눈치를 보니, 그는 일찌감치 내 의도를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새 목줄을 더 넘겨주고 내 신뢰를 사겠다는 태도였으니, 조금 더 믿음이 갔다.
그렇게 구식 함선을 매입이라 쓰고 징발이라 읽는 행위를 한 뒤, 나는 몇 가지 개조를 하게 했다.
“범포를 내어줄 테니, 바람에 아주 잘 받게 달아 놓게. 그리고 화약을 가득 채운 다음, 내가 고안한 대로 기물 몇 가지를 배치해서 넘겨주었으면 하네.”
“그리 하도록 하지요.”
해륙풍의 변화를 이용하면 굳이 사람을 태워놓지 않고도 항구에 화공을 가하는 게 가능했다.
모리 수군과 미요시 수군은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선박을 개조해서 내게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