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명군을 막아 보세(1)
끝내 송응창은 출병하라는 어명을 받아야 했다.
“정녕 폐하의 뜻인가?”
“그렇습니다, 경략.”
칙서를 전달한 내관이 돌아간 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이 자금성을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지금 급한 일은 가만히 있는 조선을 정벌하는 것이 아닐 터였다.
분명 조선을 크게 징치해야 할 이유는 있었다. 감히 천조를 저버리고 섬나라 오랑캐 따위의 편을 선 그 자체가 대역무도한 행위가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여전히 발배는 영하성에서 크게 날뛰고 있었고, 강남에서는 왜적이 운하마저 끊어버렸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국력을 크게 소모할 원정을 벌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같이 칙서를 받았던 행요동총병 조승훈도 송응창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여진이나 몽골이라면 아주 익숙한 상대입니다. 차라리 그들을 치라고 하신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어명을 받들겠지요. 하지만 조선은…….”
“어쩌겠나.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지만, 이렇게 군량까지 모아서 보내셨으니……. 성지를 받들지 않는 것 또한 불충이겠지.”
“난감하군요.”
황제가 친정을 취소하면서 조선원정군의 실전 총사령관이 된 송응창은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잡으려 했다.
“그간 조선이 천조의 제일번국이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역시 동쪽 오랑캐의 일부가 아니겠나.”
천하의 중심은 대명제국이고, 나머지는 전부 오랑캐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나라 사람들의 통념이었다.
조승훈을 비롯한 요동 출신 장수들도 거기에 동의하고 싶었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나마 차하르부의 칸이 오늘내일 하고 있는 게 다행이군.”
“소장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원래 요동총병부는 몽골과 여진을 상대하기 위해 세워진 기구였다. 그러니 조선 원정으로 전력이 크게 비게 되어 버리면, 살판 날 자들 역시 몽골과 여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성길사한(成吉思汗, 칭기즈칸)의 직계로 초원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몽골의 우두머리, 자삭투 칸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었기에, 명나라 장수들은 요양성 주변의 몽골족에 대해서만큼은 한시름을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역시 조선과 몽골은 별개의 영역. 그들이 움직이기 어려울 거라고 해서, 조선군이 명나라 군대에게 순순히 당해 줄 거라고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간 요동총병부는 몽골과 여진을 상대해 왔습니다만, 조선과는 싸울 일 자체가 없었습니다. 저들에 대한 정보도 그리 많지가 않지요.”
그때 이여송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번에 여진족들을 끌어들이기로 했으니, 그들에게 도움을 받도록 하지요.”
“여진?”
“예, 경략. 그들은 아국과 조선 사이에서 이익을 따라 움직이던 자들이니, 약간이나마 조선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송응창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과연 그가 생각하기에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총사령관의 태도를 긍정으로 받아들인 이여송은 곧바로 여진족의 추장 하나를 불러왔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그 호칭은 그만두게. 지금 나는 대명제국의 도독동지이니 그렇게 부르면 되네.”
“예, 도독동지.”
천조의 군대가 한갓 동쪽 오랑캐 일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탐탁찮았지만, 송응창도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이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쾌감은 감추지 않은 상태로 여진족 추장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소인, 노이합적이라 합니다.”
“그래, 네가 조선의 사정에 밝다고 들었으니, 아는 대로 말해 보아라.”
* * *
누르하치는 요양성을 나온 명나라 군대를 먼발치에서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부친과 조부, 그리고 그 이전부터 명나라의 핍박을 받아 왔던 선조들의 원수를 갚을 때도 머지않았다.
지금쯤이면 명군의 지휘부는 누르하치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겠지만, 이미 황명이 떨어졌다고 했으니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을 터였다.
앞으로의 일을 구상하는 누르하치에게 동복동생 슈르하치가 다가왔다.
“이제 형님이 말한 것들은 모두 끝냈수.”
“그래, 수고 많았다.”
요양성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약 삼백 리 거리의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선과 명 사이에 살고 있었던 여진족들은 누르하치의 명에 따라, 지금 해서강(후룬 강 일대)로 모조리 옮겨 간 상태였다.
“그런데 일본국의 쿠보는 우리가 참전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 않았수?”
슈르하치만이 아니라, 누르하치의 의도를 알고 있는 여진족 수뇌부 모두의 의문이었다.
굳이 터전을 옮겨 가면서 조선과 명의 전쟁에 참전해야 하는가. 여진족은 이제 누르하치가 온전히 장악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명나라는 공포의 대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걱정할 거 없다. 봐라. 원래 요양성에 모이기로 한 병력은 이십만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절반인 십만밖에 되지 않는다. 그만큼 명나라의 국력이 기울었다고 할 수 있지.”
“그 말도 일리는 있수.”
“나는 고니시 형님을 믿는다만, 그래도 차후의 정국에서 여진족의 목소리를 높이려면 이게 최선이다."
누르하치는 이번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할 생각이었다. 해상보급로야 일본의 수군이 알아서 하겠지만, 육상보급로마저 끊어 버리면 명군은 제 힘을 쓰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그 자체가 온전히 누르하치와 여진족의 공훈이 될 터였다.
“명나라 군대를 패퇴시키는 데에 한손 거들 수만 있다면, 우리도 우리만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주션 구룬! 누르하치는 물론이고, 모든 여진족에게 언제나 그리운 이름이었다. 몽골의 칭기즈칸도 한때는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대상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모든 여진족이 누르하치에게 복속한 상태였지만, 단순히 개인이나 한 부족의 힘으로 다른 부족을 아우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 될 터였다.
갈갈이 찢어져서 상쟁을 벌이는 여진족이 하나로 뭉치려면, 강렬한 계기가 필요했다. 여진족의 나라를 꿈꾸는 젊은 족장은 명나라에 대한 승리가 그 계기가 될 거라고 여겼다.
“조선에 전령을 보내라. 주션 구룬도 같이 싸우겠다고.”
* * *
“하, 여진족마저 끌어들였을 줄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그 노이합적이라는 자에게 속은 것이 아닌가!”
조승훈은 당황스러워했고, 송응창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여송의 마음속에서는 그 두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송구스럽습니다, 경략. 노이합적은 대대로 저희 가문을 섬겨 왔던 자였는데…….”
이여송이 기억하는 노이합적은 부친 이성량의 충실한 개였다.
짖으라면 짖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그 조부와 부친이 죽어도 찍소리도 못하는 그런 개. 마지막으로 봤을 때조차도 여전히 이여송에게 도련님, 도련님하며 굽신거리지 않았던가.
그 모든 게 연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이여송에게도 아주 불쾌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지금 이여송이 당한 일이 송응창의 눈에는 다르게 비친다는 점이었다.
“혹시 이제 와서 이씨 가문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경략.”
이여송은 한사코 송응창의 의심을 부정했다. 아니, 그에게도 지금의 일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조승훈도 대강의 사정은 납득한 상태였기에, 일단 송응창의 의심을 뜯어말렸다.
“진정하시지요. 그보다도 말입니다, 다시 요양성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황상께는 뭐라 말씀드리고? 여진족의 추장 하나가 천군을 속여서 부득이하게 출병을 미뤄야 한다고 말인가?”
이렇게 따지고 드는 데에는 조승훈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 노이합적이 했던 말은 전부 틀렸다고 봐야겠지. 작전을 바꿔야겠네!”
“어떻게 말입니까?”
사실 여진족의 우두머리가 했던 말은 그들도 예상했던 것들이 대다수였다. 조선은 성을 보강하고 있으며, 압록강에서 천군을 막을 거라고 했다. 상식적인 면에서, 조선이 이보다 더 나은 계책을 내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군대를 둘로 나누도록 하지. 하나는 예정대로 의주를 치도록 하고, 나머지 하나는 압록강 중류쯤에서 건너서 조선에 진입하자는 이야기일세.”
송응창의 주장 역시 특별할 게 없었다. 그간 명나라 군의 수뇌부가 세웠던 계획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노이합적이 이미 조선에 붙었으니, 우리의 계획을 모두 까발려놨을 게 아닌가! 그러니 적의 유리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마땅히 알려진 계획을 바꿔야겠지.”
“경략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기병을 최대한 풀어서 초계에 힘쓰도록 하게. 여진족 역시 유목을 일삼는 자들이 아니던가. 언제 천군의 보급로를 끊으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걸세.”
조승훈은 송응창의 지시를 모두 받아들였다.
* * *
야규 무네요시는 누르하치와 마주했다. 그의 주군은 여진족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지금 그 족장의 말은 또 달랐다.
“아군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입니다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누르하치는 무네요시에게 그냥 남이었지만, 어쨌든 주군의 의동생이라는 이유로 공대를 취했다.
“승산이 충분하기에 내린 결단일세.”
“그렇다면 제가 뭐라 드릴 말씀은 없군요. 그보다도, 명군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무네요시의 질문을 받은 누르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군의 진영을 떠난 이래로 감시를 거두지 않고 있었는데, 군대를 두 패로 나누었더군.”
자신의 배신을 알아차린 뒤에 계획을 바꾼 모양이라며, 여진족의 우두머리는 껄껄 웃었다.
이 자리에는 일본의 장수와 여진의 족장 외에도 조선의 목민관이 동석한 상태였다. 벽동군수 김시민은 결연한 태도로 각오를 드러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곳 역시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쉬이 내주지는 않을 것이오.”
“너무 일찍부터 기세를 올리지는 마시게. 이미 세워 둔 계책이 있지 않은가.”
“그야 그렇소만…….”
“자네 마음은 알고 있네. 이곳은 국경이라 장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지역의 목민관이라고 했지?”
한치의 땅도 내어줄 수 없다는 것은 벽동군수로서 당연한 각오였지만, 조선군 전체의 대전략 차원에서는 의미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미 벽동군의 백성들 역시 명군의 진격로에서 비껴난 강계로 피난을 보낸 상태였고, 여기에는 오직 양국의 군대만이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첩보를 전달한 누르하치는 다시 말 안장 위에 올랐다.
“어쨌든 말은 전했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네. 이번은 처음이라 직접 왔네만, 다음부터는 전령을 보낼 것이니 그리 아시게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과연 누르하치가 말한 대로였다. 그가 벽동군을 떠나고 나흘이 지난 뒤,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