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사과깎기(4)
양국의 장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조선 측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비변사 부제조 곽재우가 운을 뗐다.
“가장 최선은 적이 압록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겠소만…….”
“요양성에만 십만대군이 모여 있고, 앞으로 더 모일 예정이라 하오.”
일본 측의 대표인 야규 무네요시가 그렇게 말을 받았다.
지금 이쪽의 병력을 모두 합친다고 해도 십만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조선군은 평안도에 이만, 함경도에 일만이 주둔 중이었고, 황해도와 경기도에 추가로 예비대격 병력이 다시 이만 정도 존재했다.
본격적으로 개전을 하게 되면 다시 추가로 징집령을 내리겠지만, 제 몫을 할 수 있는 수준을 갖춘 군인의 숫자는 이렇게 전부 합쳐서 오만이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하면 일본에서 온 원군의 숫자는 얼마나 되오이까?”
“전부 합쳐서 삼만인데…….”
야규 무네요시는 곽재우의 질문에 답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일단 머릿수는 삼만을 채웠지만, 이 중에서 삼분의 일에 대해서는 무네요시 본인도 전력감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다이묘 간의 은근한 위신이 걸린 일이라면 아군의 치부를 최대한 감추고 허세를 부려야 할 터였다. 그러니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무네요시의 주군은 성공적으로 적을 막아내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위신을 높이는 길임을 당부했다.
지금 조선은 일본이 감당해야 할 명나라의 대군을 일차로 받아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원군이라고 으스대며 허튼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고니시군 일만에 미요시와 모리가 각각 보낸 오천씩의 병력은 그 전력이 충실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외 다이묘들의 병력이 혼재된 나머지 일만은 조금 애매했다.
야규 무네요시는 잠시 고민하다가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희 주군께서는 최정예 병력을 파견하셨습니다만, 저희 일본은 조선처럼 중앙 정부라고 할 만한 게 없는지라…….”
그 말을 들은 조선의 관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중앙에서 장수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무네요시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아직 태조대왕께서 천명을 받으시기 전에, 가별초를 이끌고 동정서벌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식으로 꾸며진 군대라는 이야깁니다.”
이순신이 무네요시의 말을 받아서 보충했다. 옛 고사를 예시로 들어가며 설명을 들은 뒤에야, 곽재우를 비롯한 조선측 무관들도 원군의 사정을 알아차렸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선전관 원균이었다.
“아국은 공방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전쟁까지 불사하는 판에, 너무 성의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이 보시게, 원 승지.”
그러나 무네요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오직 원균 한 사람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가장 일본의 사정에 밝은 이순신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관리인 비변사 부제조 곽재우조차 이 과격한 주장에 눈살을 찌푸리기만 했다.
“소장이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만을 보내온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게.”
선전관은 역시 왕명의 출납을 맡은 관리며, 특히 무관을 가리키는 서반 중에서 승지 노릇을 한다 하여 서반 승지라고도 통했다.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보다는 얌전히 귀담아 듣다가 제대로 보고를 해야 할 터였다.
곽재우는 장계를 주의해서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어떤 방책이 최선일지 고민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병력은 예비대로 두는 게 낫겠구려.”
“귀국의 배려에는 감사드립니다마는, 여기 건너온 자들은 모두가 무공에 목마른 상태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최전방에 세워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조선으로서는 마다할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뜻밖인 것만은 확실했다. 참석자 중 하나인 평안 감사 권율이 그 까닭을 물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도우려 하니, 과연 공방과 일본은 조선의 친구라 할 만하외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일을 피하고자 함은 사람의 본성인데, 어찌 앞으로 내몰아 달라는 것이오?”
거기에 답한 것은 야규 무네요시가 아니라 그를 따라온 안코쿠지 에케이였다.
“아국은 한동안 전국시대라 할 정도로 전란이 끊이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공방께서 평정하셔서 겨우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칼을 잡던 자들에게는 지위가 올라갈 기회가 끊겼다는 이야기기도 합니다.”
“과연…….”
이런 식으로 양국 군대의 특성 따위를 견주던 장수들은 구체적인 계획으로 화제를 넘겼다.
원균은 투덜거리기만 할 뿐이었고 정작 작전을 세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머지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일본군을 배치하기에 좋은 자리를 논의했다.
“의주는 이미 준비 태세가 단단하나 일본의 군대가 싸우기에는 적합지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벽동은 어떻겠나? 만약 명나라 군대가 우회하려고 한다면 역시 그리로 올 듯한데…….”
“제 생각도 부제조와 같습니다.”
이러한 대화는 역관을 통해 무네요시를 비롯한 일본 측 장수들도 듣고 있었다. 벽동이라면 압록강 중류에 위치한 지역이었고, 지도상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산이 많아 보였다.
의논을 정리한 조선의 관료들은 무네요시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쁘지 않구려.”
“그렇게 생각해 주니 다행이오.”
구체적인 계획을 맞춘 뒤, 일본군은 삼화현에서 이틀을 더 쉬며 여독을 풀었다. 그리고 떠나려던 날, 명나라 군대가 요양성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받았다.
* * *
황제는 끊임없이 고심한 끝에, 마침내 조선 원정을 추진할 방법을 찾아냈다.
“아직 영제거는 멀쩡하지 않은가.”
“그, 그러하옵니다, 폐하.”
소서행장이라는 왜구가 감히 강남에서 이어지는 대운하를 부숴놓았지만, 여전히 직례와 서안을 잇는 뱃길은 멀쩡했다.
거기에 생각이 닿은 황제는 새로운 명을 내렸다.
“하내의 세금을 미리 걷도록 하겠다.”
“폐, 폐하!”
“북로남왜가 다시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하나, 여전히 하내를 비롯한 다른 지역은 멀쩡하지 않은가.”
황제의 뜻이 그렇다는데, 신하들이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명을 받은 환관들이 세금을 걷기 위해 개봉과 낙양으로 떠났다.
“아직 세금을 낼 때가 되지 않았는데요.”
“하내 지역은 미리 조세를 거둘 것이라는 폐하의 명이시다!”
민심이 크게 술렁였지만, 심각한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개봉 역시 그 몽골이 초토화시킨 한족의 도시였기에, 영하의 발배를 토벌한다는 명분은 불만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물론 황제의 관심은 몽골보다도 조선에 더 쏠려 있었지만.
게다가 단순히 세율을 올린 게 아니라 미리 걷는 정도에 불과했기에, 아직은 황제의 요구를 감당할 만하다는 이유도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강남의 쌀에 의존하는 북경과 달리, 과연 하내 일대는 아직 여유로웠다.
“호오, 삼백만 석이나 가져왔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경들은 이를 기억하라. 어떤 식으로든 머리를 쓰면 곤경을 벗어날 방법이 나오는 법이니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삼백만 석 중 상당수는 북경의 미곡 가격을 안정시키는 데 들어갔다. 발배의 토벌을 맡은 마귀에게도 이십만 석이, 요양성에는 도합 백만 석이 보내졌다.
이제 신하들도 더 이상 조선 정벌에 시간을 끌 명분이 없었다. 그나마 황제가 친정을 단념한 것이 유일한 다행거리라 할 만했다.
마침내 자신의 뜻을 관철한 황제는 아주 신이 난 모습으로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제 조선을 징치할 준비는 모두 끝이 났도다!”
* * *
“아주 작정하고 온 모양이군. 요양성에는 여전히 십만이 있다고 했는데 말이야, 여기에 또 십만이라니. 역시 대륙은 대륙이야.”
일본의 감합선이 드나들었던 영파에 눌러앉아 있으려니, 명나라가 곧바로 반응해왔다.
조선을 정벌하겠답시고 이십만을 끌어 모으고 있었을 터였다. 게다가 보바이도 몽골을 끌어들여가며 백중세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어쨌든 전선의 숫자만 놓고 보면 양면도 아니고 삼면인 셈인데, 이쪽에 보낸 병력의 숫자도 십만가량 된다는 첩보를 받았다.
혼다 마사노부가 내게 앞으로의 방침을 물었다.
“역시 일전을 벌이고 후퇴하시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 있겠나. 모두 짐을 싸라고 하게.”
이미 운하도 죄다 끊어 놓았고, 북경에서 군량을 한껏 긁어모아서 요양으로 보냈다는 소식도 있었다. 조선 침공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여기에 오래 있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어차피 제해권은 우리가 쥐고 있으니, 아슬아슬할 때까지만 있다가 뜨도록 하지.”
“예, 쿠보.”
이번 출정은 여러모로 이익이 많았다. 단순히 명나라의 신경을 분산시켰다는 의의도 있었지만, 부유한 지역을 털어 버린 성과도 상당했다.
내 방침이 알려지자, 모든 이들이 마지막 전력질주에 들어갔다.
“여유부릴 때가 아니다! 빨리빨리 움직여!”
“쓸데없이 부피만 큰 건 버려라! 최대한 값나가는 걸로, 이왕이면 은화를 잔뜩 챙겨!”
이미 많은 전리품을 얻었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명나라 군대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연합수군과 유럽 상인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약탈물을 챙겼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틀 뒤, 영파에 명나라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바로 십만 대군의 위용인가.”
“상당하군요.”
항주에서 출발한 토벌대는 산과 들을 덮으며 영파로 다가왔다.
확실히 머릿수에서 나오는 기세는 대단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대담무쌍하게 약탈을 벌여 대던 유럽의 상인들마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함선을 운용할 인원을 제외하면 이쪽의 순수 전력은 고작해야 일만. 당연히 맞아 싸운다는 것은 고를 수 없는 선택지였다.
일전을 벌이자고 했던 마사노부도 정작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그 모든 노고가 허사가 될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지금은 십만의 헛수고가 아니겠나.”
“과연 그렇습니다, 쿠보.”
“눈치도 없이 너무 오래 있었으니, 이제 빠져나가도록 하지.”
내 지시가 떨어지자, 연합수군은 질서정연한 태도로 항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토벌대는 그 뒤를 아득바득 쫓아왔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나 달마가 아니었다.
“우리를 배웅해 주는 사람들에게 예포라도 쏴 주도록.”
쾅, 콰쾅!
가벼운 무장으로 달려온 명나라 군대에게 화포가 있을 리는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떠나는 모습을 넋 놓고 보다가 날벼락을 얻어맞아야 했다.
그렇게 한바탕 약올려 준 뒤 대양으로 나왔을 때, 마사노부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쯤이면 조선 정벌군이 요양성을 출발했을지도 모르지. 우리는 그 뒤를 노리도록 한다.”
일단 확인된 규모만 십만, 어쩌면 더 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그 숫자가 고스란히 조선으로 가게 둘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