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사과깎기(3)
보바이는 초조한 마음으로 때를 기다렸다. 너무 이르게 거병하면 명나라가 보낸 토벌대에 짓밟힐 터였고, 지나치게 늦으면 누르하치와 자삭투 칸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요양으로 병력을 보내라는 명이 오자, 조용히 물밑 작업에 들어갔다.
첫 시작은 조정의 감시역이라고 할 수 있는 순무, 당형을 참살한 일이었다.
“순무, 어째서 조정으로 갈 세미를 빼돌린 것이오?”
“당치도 않은 소리! 발배(哱拜, 보바이) 네놈이야말로 역심을 품은 게로구나!”
그의 주변에는 한족 출신 장수와 병사가 많았다. 대놓고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가는 되레 등에 칼을 맞을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먼저 그럴싸한 명분으로 걸림돌부터 치워 버린 것이다.
중앙에서 보낸 눈부터 치워 버린 보바이는 곧바로 영하총병 장유충을 손에 넣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상주문부터 작성했다.
“총병, 내가 군을 일으킨 것은 어디까지나 순무가 죄를 지은 뒤, 우리에게 덮어씌우려 했기 때문이오.”
“아, 알겠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다행히도 장유충은 유약한 자였고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했다. 유격은 어디까지나 총병의 부장 중 하나였지만, 그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와 조정은 조선 정벌에 온 신경을 쏟는 상황, 총병의 명의로 된 해명 정도면 시간 정도는 끌 수 있을 터였다.
영하부성을 장악한 그는 곧바로 자신과 약속한 몽골 부족들을 불러들였고, 차근차근 한족 출신들을 배제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고니시 유키나가가 말한 ‘좋은 소식’이 들려오자, 쓸모가 없어진 장유충마저 베어 버리고 곧바로 영하부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의외로 명나라 조정의 움직임은 빠르게 다가왔다.
“토벌대가 벌써 성 밖 20리까지 접근했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적장은 누구라 하더냐?”
“포정사 마귀의 깃발을 내걸고 있었습니다.”
병졸의 보고를 받은 보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필시 요양성으로 가던 병력을 그대로 토벌대로 파견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마귀가 명장이라고는 해도 그런 급조 부대로는 힘을 쓰기 어려울 터였다.
“족장들을 불러라. 어차피 우리는 시간만 끌며 버티면 명나라가 알아서 나가떨어질 거다.”
* * *
북경으로 보낼 조세가 가득 실린 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걸 본 킷카와 모토하루가 혀를 내둘렀다.
“과연 쿠보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고 있습니다.”
“남선북마라는 구절도 있지 않던가. 북쪽이야 수운이 마땅찮으니 말을 쓰겠지만, 대량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려면 배만 한 것도 없지.”
남경 근처까지 갔을 때, 절강운하와 강남운하는 물론이고 회양운하와 통제거 초입까지 골고루 부숴 놓았다.
당시 장수들은 물론이고 다른 다이묘들조차 배와 화약이 아깝다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은 마사야스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모조리 털어라! 단 한 톨도 북경으로 가게 두어선 안 될 것이다!”
아군이 조운선에 달려드는 것을 본 명나라 수군이 황급히 뛰쳐나왔지만, 오히려 포격에 얻어맞기만 했다.
“적선과 거리를 유지하는 데 집중하라.”
쿄타로가 내 말을 반복하며 연합수군에 전파했고, 아군 함대는 그대로 움직이며 명나라 수군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적은 아군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아 가며 장강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쿠보, 쫓아가서 마저 깨 버립시다.”
흥이 오른 미요시 마사야스가 추격을 권해 왔다. 그러나 장강이 넓다 해도 자칫 강 위에서 아군끼리 꼬여 버리면 역습을 당하기도 쉬울 터였다.
“내륙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할 걸세. 당분간 조운선이나 끊어먹도록 하지.”
“하지만 그러면 오히려 바다를 포기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그도 이번 출정의 목적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벌인 약탈과 파괴는 결국 명나라 상층부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한 것. 그러니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면서 눈에 띄게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자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명나라를 도발하는 방법은 꼭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네.”
“하면 달리 생각해 두신 방도가 있으십니까?”
“물론이지.”
내륙 깊이 들어가는 건 곤란하지만, 해안가라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터였다. 나는 길잡이 노릇을 하던 왜구 출신 무사를 불렀다.
“내가 전에 듣기로, 영파라는 곳에 일본의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던데…….”
“바로 저깁니다. 항주는 만 깊이 들어가야 하지만, 쿠보께서 말씀하신 영파는 다소 바깥으로 나와 있지요.”
“그렇군.”
지리를 확인한 다음 명나라 측에 보내는 서신을 작성했다. 그리고 포로 몇을 석방해서 그 손에 들려주었다.
“뭐라고 쓰신 겁니까?”
“영파는 대대로 일본인이 살았던 지역이니, 이참에 돌려받겠다고 썼네.”
정말로 그걸 내줄 리도 없고 설령 내준다고 해도 지킬 수는 없겠지만, 내가 노리는 바는 따로 있었다.
천하가 모두 천자의 영역이라고는 하나 직접 다스리는 땅은 특별한 법. 그러한 땅을 오랑캐가 짓밟고 점유를 선언한다. 최대의 굴욕이지?
* * *
황제의 심기는 아주 불편했다. 남직례에서 올라올 조세가 끊겨 버린 것이 그 이유였다.
“짐이 분명 내탕고에서 필요한 대로 가져다 쓰라 하였거늘, 경들은 아직도 오랑캐를 몰아내지 못했는가!”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고정, 고정, 그놈의 고정! 짐이 고정한다 하여 역도들이 스스로를 묶어 바치기라도 한단 말이더냐!”
쾅.
황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용상을 내리쳤다. 요즘 들어 이러한 모습도 거의 일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빨리 조선을 징치해야 하는데, 경들은 어찌 이리도 늑장을 부린단 말인가!”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제가 입만 열면 조선을 징치하겠다는 말 뿐이었고, 최대의 관심사는 요양성에 집결시킨 병력이었다.
다시 정무를 보기 시작한 것도, 내탕고를 열어버린 것도 모두가 결국은 조선을 정벌하는데 집중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그 외의 다른 국사는 귀찮게만 여길 뿐이었기에, 신하들은 황제가 조선에만 관심을 둔다 하여 종종 푸념하곤 했다. 요즘 조정에는 조선천자라는 말이 떠돌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지존이라고 해도 지금 화를 내 봐야 달리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풀에 지친 황제는 역시 요양성에 관해 질문했다.
“요양성에 모인 병력은 얼마나 되는가?”
“지금 십만이 모였사온데…….”
그보다 더 끌어 모으기는 어렵다는 것이 신하들의 보고였다.
일부는 영파의 발배를 토벌하러 보냈고, 강남에도 원군을 파견해야 했다. 게다가 군량 문제도 고려하면 그 이상을 모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십만이면 충분하겠지.”
“폐하?”
“경들이 일전에 말하길, 상장 하나에 십만 대군이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대로 시행하라.”
갑작스러운 명을 받은 신하들은 황제의 고집을 말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병력은 십만이 모였사오나, 아직 군량은 다 모이지 않았사옵니다. 이대로 출병했다가는 대군이 그대로 굶어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할 것이오니 부디 굽어 살피시옵소서.”
“짐이 명한 게 언제인데, 게다가 이십만이 십만으로 줄었는데도 군량이 부족하단 말인가?”
황제는 신하들이 자신을 속이고 조선 정벌을 단념시키려는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실제로 돌아가는 상황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았다.
“강남과 통하는 운하가 모두 끊기고 바닷길마저 왜구가 창궐하고 있는 지경이옵니다. 그런 까닭으로 원정에 필요한 물자가 모두 모이지 않았사옵니다.”
“짐이 내탕고를 열지 않았는가?”
“강남에서 곡식이 들어오지 못하여 도성의 곡가가 크게 치솟았나이다.”
“곡가로 장난을 치는 자들을 잡아들이라!”
황제의 분노는 그대로 도성의 상인들에게 향했다. 곧바로 미곡상들의 곳간이 털렸고, 그들은 죽느냐 쌀을 내놓느냐의 기로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는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분명 곳간에 쌀을 가득 쌓아 놓고 폭등을 기다리는 자들은 있었다. 그러나 쌀이 북경에 오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자금성을 괴롭혔다.
* * *
명나라가 조선정벌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조선은 마치 태풍의 눈처럼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국왕은 성벽의 보수와 증축을 명했고, 조정의 관료들은 각지의 부대와 물자를 꼼꼼하게 점검했다.
의정부를 능가하는 핵심 기구가 된 비변사는 그 소재지를 평양으로 옮겼다. 지금 조선의 모든 국력은 명나라의 침입을 막는 데에 쏠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일본에서 보낸 원군이 야규 무네요시의 인솔 하에 부산포를 거쳐 삼화현(오늘날의 남포)에 내렸다.
“이곳이 조선인가…….”
“꽤 춥구려.”
“글쎄, 아국의 북부와 크게 다르진 않은 듯한데.”
조선은 빠른 이동을 위해 서해의 뱃길을 열어주었다. 물론 아직도 왜구의 피해를 잊지 못한 백성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배에서 내린 일본군은 조선이 배정해 준 위치에 숙영지를 꾸렸다.
“절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곳이 일본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고, 모두 행동을 조심하라.”
아직 개전조차 되지 않은 상황, 아군끼리 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피해야 할 일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야규 무네요시는 휘하 병력의 단속에 가장 많은 심력을 쏟았다.
“모리 가문의 군대에는 조선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소.”
“장수는 아니나, 물자를 셈하고 병사들을 다독이는 대관 몇 사람이 조선에서 왔습니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안국사혜경)은 야규 무네요시의 말에 아는 대로 답했다. 그의 주군인 모리 테루모토는 강항을 필두로 조선의 선비들을 고용한 상태였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말처럼, 관직에 나가지 못한 사대부에게는 일본국 대명의 봉록도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쿠보께서도 상당한 숫자의 역관을 붙여 주셨지만, 역시 현지인이야말로 가장 말이 잘 통하는 법이 아니겠소이까. 모리 가문이 많이 힘을 써 주셔야 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야규 무네요시가 이끌고 온 원군은 조선에서 머무를 준비를 해 나갔다. 그러던 차에 일본군의 숙영지에 조선의 관료들이 찾아왔다.
“아니, 이 공 아니시오?”
“오랜만이구려. 부족한 몸이나마 어명으로 평안 병사의 자리를 맡고 있소이다.”
“숙영지가 완성되는 대로 평양으로 가려 했는데, 먼저 와 주셨구려. 참으로 반갑소이다.”
한때 스모토에 백의종군이라는 명목으로 머물렀던 이순신은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있었다.
“일본군과 협의해야 할 것이 많아서 말이오.”
“옳은 말씀이오. 하면, 같이 오신 분들은?”
“모두 명의 침공을 대비하는 중임을 맡은 무관들이외다.”
이순신은 동행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평안도 관찰사 권율, 비변사 도제조 곽재우, 선전관 원균.
무네요시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이순신 하나밖에 없었지만, 과연 한 사람을 제외하면 초면임에도 그 기세가 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