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사과깎기(2)
대만이라는 이름보다는 포모사(Formosa)로 통하는 중국 연안의 제법 큰 섬. 일부를 제외하면 중원의 왕조들은 이곳을 외면했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손이 먼저 닿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누군가가 접수한 상태는 아니었고, 원주민과 유럽 상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기항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연합수군이 여기에 도착했을 때, 먼저 와 있던 유럽 상인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쿠보.”
“제법 많이들 모아 왔군.”
“흐름은 타고 볼 일이 아니겠습니까?”
교역량을 움켜쥐고 휘두르는 명나라의 행태는 그들에게도 꼴불견일 터였다. 아직 대항해시대는 초기 단계일 뿐이겠지만, 지금도 대륙은 세계의 은을 무한히 집어삼키는 공룡이니 말이다.
참가자들을 둘러보니 면면이 무척이나 다양했다. 그러나 역시 그중에서도 포르투갈과 잉글랜드, 네덜란드의 상인이 가장 많았다.
드레이크가 마닐라 총독과 싸우기 시작하면서, 난장판이 된 동남아에서 탈출한 자들이었다.
미리 와서 기다렸던 자들이 내게 쓸 만한 소식을 전했다.
“지금 이 근방은 경계가 약해진 상태입니다. 명의 군선이 죄다 북경으로 올라갔다고 하더군요.”
“북경?”
알 만한 이야기였다. 지금 명나라 황제는 대군의 집결지를 요양성으로 정했다고 했다. 발해만을 이용하면 병력과 물자의 이동이 편리해지지만 그만큼 습격을 받기도 쉽다.
아무래도 이쪽의 해상 세력을 염두에 둔 모양인데, 이걸 어쩌나. 나는 여기 있는데.
“아주 잘되었군. 맛있는 부분이 알아서 껍질까지 까고 있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크큭…….”
나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지도를 펼쳤다. 자세하지는 않았지만, 대륙의 남동해안지대에서도 주요 지점을 표시하는 정도면 충분했다.
“자네들도 군령이니 뭐니에 얽혀서 갑갑하기는 싫겠지?”
“그야, 물론입니다마는…….”
유럽 상인들이라 쓰고 해적이라 읽어도 될 무리는 내 질문에 긍정하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눈치를 보는 모양새였다.
“나도 자네들의 불만을 떠안아 가면서 전쟁을 수행하고 싶지는 않네. 그러니 방향을 둘로 나누도록 하지.”
저들에게는 천주(泉州, 오늘날의 취안저우)와 하문(廈門, 샤먼)을 거쳐 광주(廣州, 광저우)로 향하는 길을 배정했다. 그리고 미리 작성해 두었던 문서를 한 장씩 넘겼다.
“이건 자네들도 익숙하겠지?”
“사략 면장… 입니까?”
“바로 보았네. 이 지역에서 자네들이 벌이는 약탈, 파괴, 그 외 기타 공격적인 행동은 모두 내 이름으로 하도록 하게.”
일반적인 사략 면장과는 달리 발급자와 이익을 나눌 필요가 없으며, 대신 성당이나 절, 사당을 비롯한 종교시설은 건드리지 말 것.
이러한 조건이 붙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저들도 역시 뱃사람이라 미신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전리품이 온전히 자기 것이 된다는 사실이 중요할 터였다.
꼴깍.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환호성을 지르면서, 모두가 만세를 외쳤다.
“해적의 시간이다!”
* * *
“그런데 굳이 예외를 둘 필요가 있었는지요?”
“무슨 말인가?”
“종교시설은 약탈에서 제외하라는 단서조항 말입니다.”
복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이번 원정에 따라온 혼다 마사노부가 자신의 의문을 물어왔다.
“이왕 명나라에 최대한의 타격을 입히려면, 쌀 한 톨도 남겨 놓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 그 이야기로군.”
나 역시 미신을 믿는 쪽은 아니었기에, 더더욱 마사노부는 의아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물론 세례까지 받은 상태라서 성당을 건드리는 것은 좀 켕기긴 했지만, 그게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다.
“생각해 보게. 황제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해적들이 종교시설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게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겠나?”
“그야…….”
내 말을 들은 마사노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짝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그러나 역시 그 효과는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쿠보, 고작 그런 정도로 민심을 뒤흔들 수 있겠습니까?”
“고작 그 정도라니. 지금 우리는 명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 걸세.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나?”
“아.”
그렇게 문답을 나누는 동안, 연합수군은 복주에 도착했다. 유럽 상인들이 귀띔해 준 대로, 정말 명의 수군은 대폭 줄어들어 있었다.
“여기에는 딱 한 나절만 머무르겠다. 그동안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부수고 불태워라!”
정화의 거대선단이 출항했던 유서 깊은 항구는 순식간에 박살났다.
소소한 습격에는 대비할 수 있었겠지만, 이쪽의 규모는 평소 해적들의 수준을 아득하게 웃돌 터였다.
갤리온급 함선만 서른, 거기에 모리와 미요시가 끌고 온 크고 작은 군선이 수천에 육박했다.
“다음은 항주로 간다. 최대한 빠르고 요란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불과 닷새 동안, 내가 이끄는 연합 수군은 복주와 항주(杭州, 항저우)를 초토화시키고, 장강에 들어섰다.
저항은 변변치 않았고, 순식간에 남경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저곳이 바로 남경……!”
스모토가 화려하다고는 해도, 오랫동안 대륙 남부의 중심지이자 명나라의 두 번째 수도인 남경에는 그 나름대로의 멋이 있었다.
모리 테루모토를 대신해서 모리 수군을 이끌고 있는 킷카와 모토하루나, 직접 온 미요시 마사야스도 그 성세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쿠보, 화포를 내리시겠습니까?”
정신을 차린 마사야스가 먼저 공략을 제안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강가의 나루터와 마을은 텅 비어 있었지만, 남경성의 대비태세는 아주 단단해 보였다. 게다가 미리 풀었던 닌자들의 첩보에 의하면, 무려 네 겹의 성벽이 둘러치고 있어 공략이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화포라면 확실히 공략하기는 쉽겠네만, 그보다는 성 주변을 휘저으면서 쑥대밭이나 만들도록 하지.”
“아쉽군요.”
“지금까지 얻은 전리품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야 그렇습니다만, 저기는 명색이 명의 도읍이었던 성이 아닙니까. 상징적인 타격이 상당할 겁니다.”
그의 말도 옳았다. 지금 내가 벌이는 행동은 명나라 황제의 속을 화끈하게 긁기 위한 것. 그러니 남경성을 함락시켜 버린다면, 그는 꼭지가 돌아서 이쪽으로 먼저 달려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공성전은 너무나 많은 시간과 품을 요구할 터였다.
“만족을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 이미 우리가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목적은 이룬 거나 마찬가지일세.”
“하면 이대로 돌아갑니까?”
“그것도 조금 아쉽지.”
나는 병사들을 풀어 남경성의 병력에 유의하며 초토화 작전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작고 빠른 배 몇 척을 따로 뽑았다.
강남의 생산력이야말로 대륙의 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 병력은 몇몇 지점을 박살내 버릴 수는 있어도, 그 전부를 불태울 만큼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몇몇 지점이야말로 핵심 중의 핵심이 아니던가. 거대한 덩치에서 나오는 힘은 무시무시하지만, 그 혈관을 끊어 버리면 의미가 없을 터였다.
“너희들은 배에 화약을 가득 채워서, 운하를 폭파시켜라. 최대한 많은 구간을 못 쓰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 쿠보!”
과연 내륙 수운이 망가진 명나라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 * *
황제는 이제 요양성에 십만이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아들었다. 당초 예정한 규모의 반이 모였으니, 이제 그도 친정을 하기 위해 요양성으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파발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폐하, 복주와 항주가 왜적의 습격을 받고 있사옵니다!”
“왜적이 장강으로 들어와 남경성이 함락될 위기라 하옵니다!”
“남만구가 광주에 들끓고 있나이다!”
몇몇 보고는 사실과 달랐지만, 어쨌든 남직례까지 쑥대밭이 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처음에는 평소대로 해적의 습격이겠거니 했지만, 보고가 이어질수록 사태의 심각성은 커지고 있었다.
“감히 왜구 따위가! 경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럴 때를 대비하기 위해 조선 정벌군의 규모를 줄이지 않았느냐 말이다!”
쾅.
황제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용상을 내리쳤다.
이미 발해만에 대기하고 있었던 명나라 수군이 뜻밖의 소식에 놀라, 황급하게 남하하고 있었다. 그리고 척계광의 아들 조국이 척가군을 모아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위충현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천자를 달랬다.
“불과 열흘 동안에 벌어진 일이옵니다. 폐하의 군대가 반격을 준비하고 있사오니, 심려를 거두시옵소서.”
“그리 해야 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어지는 소식은 여전히 황제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척가군이 남경성에 들어가기도 전에 왜구가 내빼버렸고, 자랑스러운 황제의 수군은 장강 어귀에서 패퇴했다는 소식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적도들이 대만에 머무르며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하옵니다.”
“척계광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때마침 장계가 올라왔다. 황제는 분기를 억누르며 그 내용을 읽었다.
- 왜구와 남만구가 서로 결탁하여 바다를 어지럽히고 있사온데, 그 수효가 수천에 달하여 몰아내기가 심히 어려울 듯하옵니다. 경공방 소서행장의 이름으로 약탈을 벌이니, 이는 필시 심유경의 일로 불만을 품고…….
황제는 장계를 읽다가 내던졌다. 그러나 그 분노가 척계광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짐의 내탕고를 열 것이다! 경들은 다른 걱정 없이 해적들을 소탕하는 일에 전념토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일이 이렇게 되었사오니 부디 친정은 거두시옵소서.”
신하들은 이 기회에 황제의 친정을 말리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니, 조선은 여전히 화근이니, 짐이 친히 징치할 것이니라.”
그러나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말처럼, 나쁜 소식은 혼자 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영하에서 새로운 파발이 위급을 알렸다.
“유격 발배가 모반을 일으켜, 순무 당형을 죽이고 몽골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사옵니다.”
“발배가 감히!”
발배라는 이름은 황제에게도 익숙했다. 몽골인으로, 가정 연간에 귀부하여 도지휘까지 오른 자였다.
명나라 조정은 그를 이용해 몽골을 억누르려 했으나, 지금은 그러한 의도조차 틀어진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하필 몽골이 개입한 반란이라는 점에서, 분노에 몸을 맡긴 황제조차도 경계심을 늦출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이 여말선초의 난세를 기억하는 이상으로, 명나라에게는 몽골이 최대의 공포였기에.
게다가 영하성은 북경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지. 친정은 취소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경들은 마땅한 인선을 고하라.”
신하들은 잠시 머리를 맞대다가 포정사 마귀가 소집령에 응해 오는 중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동이서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도 유능한 장수였기에, 그를 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아직 포정사 마귀가 영하성을 지날 것이니, 그에게 토벌을 명하시옵소서.”
“윤허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