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고니시라니-193화 (193/225)

193화 사과깎기(1)

“전하, 문책사가 영은문을 지났다 하옵니다.”

이미 두 번의 문책사가 다녀갔고, 이번은 마지막이 될 터였다. 상선의 전언을 들은 이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의 왕에게 선대왕이란 위대한 존재들이었다. 나라를 세우고 이환에 이르기까지 아홉의 임금들이 조선을 다스려왔다.

원론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야 했지만, 이환이 직접 보고 들은 왕이란, 괴롭고도 외로운 사람이었다. 스스로도 한동안 그렇게 살아야 했지만, 그가 보았던 부친과 형에 대한 기억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선릉(성종)의 덕을 따르시옵소서.’ 정도는 그래도 들어줄만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툭하면 ‘폐주 연산을 잊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같은 소리를 하며 왕을 압박하려 들었다.

적어도 그의 부친이 헌릉(태종)이나 광릉(세조)처럼 앞장서서 나섰다면 또 모를 일이었으나, 신하들의 손으로 추대된 왕의 힘은 미미했다.

정통성이 약한 왕에게서 물려받은 왕좌란 또 어떠했는가. 그의 형인 효릉(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목숨을 위협받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모두 이환을 왕으로 세우기 위한 모후와 외숙의 행동이라는 것은 이해했다. 그러나 돌이켜볼수록 신하된 자가 감히 왕의 후계자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그 자체가 아주 거슬렸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일찍부터 깨달은 이환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경복궁을 재건하고, 대명회전에 잘못 기록된 태조대왕의 사적을 바로잡기 위해 사신을 보내고, 외숙들의 비리를 끄집어내 모조리 숙청해버렸다.

그러나 그 모든 명분은 명분 자체보다도 힘이 더해졌을 때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조선의 국왕에게는 정적의 선혈를 요구할 수 있는 칼이 필요했던 것이다.

친절한 말 한 마디는 반대가 심했지만, 군기시에 가득한 화약은 신하들을 설득하기에 더없이 좋은 수단이었다. 적어도 연산처럼 반정에 직면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왕권이 강해지면서, 더 이상 대국의 책봉과 기록에 매달릴 이유도 사라졌다.

비록 바친 조공보다 값진 사여품을 받는다고는 해도 그 내용은 조선에서 정하기 힘들었기에, 명의 요구는 이제 방해가 될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도움이 되는 존재를 상국이라고 한다면, 오랑캐로 얕잡아보았던 경공방 소서행장이야말로 조선의 상국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도학에서는 위아래를 분간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경공방과의 교역은 그렇게 하지 않고도 서로에게 유익하기만 했다.

명은 이제 양자택일을 강요했고, 이환은 미약한 정통성을 대국의 책봉으로 보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조선의 역사를 돌이켜보던 이환은 자신이 세자의 눈에는 어떤 왕으로 비칠지 궁금했다. 적어도 선왕들처럼 신하들을 이용해서 이이제이나 꾀하는 미약한 존재는 아닐 터였다.

“전하, 문책사가 이제 돈의문으로 들어온다 하옵니다.”

이렇게 명의 사신을 앉아서 맞이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한 결정이야말로 이환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침내 사신이 대전에 나타났다.

“전하, 대국의 천사를 이렇게 대한다는 것은, 역시 거부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네 태도가 아주 무례하나 사자의 목을 베는 건 상도가 아니니, 성히 돌려보낼 것이다. 그러니 너는 속히 가서 너희 천자에게 알리기나 하라.”

*       *       *

“어찌 감히!”

조선 국왕의 언행을 보고받은 황제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래도 대국의 아량을 보이기 위해 세 차례나 문책사를 보냈는데, 기만으로 일관하다가 기어이 오랑캐 따위와 손을 잡다니!

믿었던 장거정과 풍보가 표리부동한 행태를 벌인 것도 결국은 황제를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던가.

이제 내신(內臣)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있지만, 외방(外邦) 중 제일번국이라는 조선은 여전히 천자의 권위를 능멸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황제는 고함을 지르며 명을 내렸다.

“당장 군대를 소집하라! 백만 대군을 이끌고 짐이 친히 조선을 징치할 것이니라!”

황제의 결정을 들은 신하들은 당황했다. 물론 조선을 정벌하는 그 자체는 예상된 수수순일 터였지만, 황제가 백만을 동원해 친정한다는 계획은 마련하지 않은 상태였다.

서로 눈치만 보던 끝에 이부시랑 심일관이 앞으로 나섰다.

“신 예부시랑 심일관이 감히 폐하께 아뢸 것이 있나이다.”

“말하라.”

“일개 번국을 징치함에 있어, 과한 조처는 오히려 대국의 위신을 깎는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유능한 상장을 세워 십만의 병력을 맡기셔도 역도들은 폐하의 위엄에 눌려 쓰러질 것이옵니다.”

심일관은 최대한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표현을 신중하게 사용했다. 그러한 행동은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황제는 약간 누그러진 어조로 심일관의 주청을 내쳤다.

“조선의 작태를 보면 다른 오랑캐들은 또 어떤 불측한 마음을 품겠는가. 마땅히 일벌백계로서 다스려야 할 것인즉, 짐은 조선을 본보기로 삼고자 한다.”

분노에 마주하기는 어려워도, 물꼬가 트인 상황에서 설득에 나서는 것은 훨씬 수월한 일이었다.

다른 신하들도 심일관에게 가세했고, 기나긴 논의 끝에 절충안이 나왔다.

“과중한 군비는 크나큰 부담이 될 것이옵니다. 부디 백성들의 삶을 살펴주소서.”

“경들이 그리 말하니 병력의 숫자는 이십만으로 줄이도록 하겠다. 그러나 짐이 친정하는 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으니, 그리 알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명나라의 최전방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요양성에 십만 대군을 집결시키고, 황제 스스로가 직접 나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나머지 인선은 경들이 정한 다음, 짐에게 고하도록 하라.”

힘겨루기 아닌 힘겨루기에 지친 황제는 대전을 나가 버렸고, 신하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재개했다.

석성의 실각으로 공석이 되어버린 병부상서 대신, 상서 대행을 맡고 있었던 시랑 송응창이 황제를 보좌하겠다고 나섰다.

척계광이나 위충현이나 반대할 이유는 없었기에, 그대로 황제의 보좌역이 정해졌다. 그 다음으로 의논의 대상이 된 것은 실전을 맡을 장수를 어떻게 뽑느냐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성량을 당장 끌어오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만…….”

“나도 그리 생각하오.”

이제 천자의 성격은 변화무쌍한 하늘을 닮아가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 갑자기 분노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기에, 척계광은 위충현에게 도박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성량의 아들들을 부장격으로 동행시키고, 행요동총병관 조승훈이 그들을 지휘하는 건 어떻겠소?”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겁니다.”

“동이서마라고 했으니, 포정사 마귀를 불러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역량만 놓고 보면 이성량보다 윗길로 알고 있는데…….”

“괜찮은 생각입니다.”

신하들끼리의 의논은 수월하게 흘러갔다. 종군을 자처한 송응창은 경략책조선군무(經略責朝鮮軍務)라는 직함으로 군정을 맡기로 했다.

실전지휘관으로는 행요동총병, 그러니까 요동총병 대행인 조승훈이 이성량의 아들들을 이끌고 선봉에 서기로 했고, 포정사 마귀를 불러서 중군을 맡기기로 정해졌다.

“보급은 어찌 하는 게 좋겠소이까? 역시 군량을 실어 나르려면 우마보다는 배가 낫기는 하겠는데…….”

“역도는 조선만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외다.”

척계광이 중요한 부분을 지적했다. 만약 조선과 손을 잡은 왜구가 바다를 어지럽히기라도 한다면, 물경 이십만을 자랑하는 대군이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정말로 조선이 왜구와 손을 잡았다면, 양동을 걸어 천군을 분산시키려 들 것이오.”

그는 자신이 수군을 이끌고 습격을 막겠다고 했다.

“천진(天津)에서 요동만에 이르는 해안가가 어지러워지면 이십만을 집결시키기도 어려울 것이외다. 그러니 내가 왜정에 밝은 제독들을 이끌고 경계를 서겠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기에, 누구도 척계광의 주장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선 원정에 뼈대와 살이 붙기 시작했다.

*       *       *

얼마 전에 스모토에 다녀갔던 하성군이 다시 찾아왔다. 역시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닷새 전에 문책사가 다녀갔네. 이제 명이 조선을 치려 할 걸세.”

“그렇게 되고 말았군요.”

아직까지 명이 대군을 소집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닷새 전에 문책사가 다녀갔다고 했으니, 이제 곧 움직임이 나올 터였다.

대국은 대국답게 덩치가 크지만, 그만큼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저 역시 포석을 깔아 두었지요.”

“공방의 말을 들으니 든든하군. 어떤 계책이 있는가?”

조선의 종친은 내가 수군을 이끌고 발해만을 휘젓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그쪽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굳이 북경 근처의 바다를 건드리지 않고도, 대군의 결집을 방해할 방법은 많지요.”

“혹시 말해 줄 수 있겠나? 나야 공방을 믿네만,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야 하네.”

정해 둔 계획을 말해 주자, 하성군은 적잖이 실망한 기색이었다.

“이보게, 공방. 분명 수군을 통한 보급선을 차단해 달라고 하지 않았나.”

“그쪽은 수군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지요. 명의 군대는 무척이나 지친 상태로 조선에 갈 겁니다. 그리고 부탁하셨던 것 대신이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내 말을 들은 하성군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스모토를 떠났다. 나는 그를 배웅한 뒤, 곧바로 다이묘들을 호출했다.

이미 그들은 빠른 대응을 위해 나니와쿄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사들을 소집하시오! 이제 저 오만한 명의 콧대를 꺾을 때가 되었소이다.”

소집할 군대는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내가 직접 인솔할 연합수군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조선으로 갈 원군이었다.

모리와 미요시는 양쪽 모두에 병력을 내기로 했고, 도쿠가와와 코가 쿠보 밑의 무가들은 조선으로 갈 원군에만 참여했다.

의외로 그들이 적극적이었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앞으로는 공훈을 세울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이 그 첫 번째였고, 전리품으로 얻을 부를 기대하는 것이 두 번째였다.

“모두 한 달 내로 가라츠(唐津 당진)에 집결하라고 하시오.”

“예, 쿠보.”

내가 소집령을 내린 뒤에야 명나라 조정도 군대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시차를 고려해도 역시 이쪽보다 다소 느린 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문책사의 보고를 받고 나서 움직인 듯했다.

그러는 동안 연합수군은 이미 소집이 끝나 있었다.

“조선으로 갈 원군은 늦지만 않게 도착하면 된다. 먼저 출발할 것이니, 무네요시 자네는 병력이 모두 모이는 대로 곧장 가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원군의 총지휘를 맡은 야규 무네요시에게 방침을 일러준 뒤, 나는 연합수군의 출격을 명했다.

“우리는 강남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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