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깨어난 명나라(2)
조선의 의지는 확고한 것처럼 보였다. 국왕의 편지와 하성군의 말대로라면, 최소한 명나라 편에 설 가능성은 없었다.
“일단 염초와 유황의 여유분은 전부 넘겨드리지요. 화약으로 따지면 대충 오만 근쯤 될 겁니다.”
“상당하군. 얼마나 주면 되겠나?”
“목숨 값인 셈 치시죠.”
내 말을 들은 하성군은 적잖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할 터였다.
조선의 종친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흥분과 경악이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공방의 정성은 조정에도 잘 말해두도록 하겠네.”
동서 양당이 모두 이쪽과 교류를 했으니, 조선 국왕이 명나라의 요구를 거절해도 별 반대는 없겠지만, 언제나 세상 천지에 혼자 노는 사람들은 있지 않던가.
그런 인사들이 재야에서 꽥꽥거리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작 조정에서는 항전을 결정했는데 산골짝의 서생이 사대의 명분 운운하면서 의병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게다가 조정의 대신들 중에도 전쟁만큼은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한 여론을 누르자면 일단 잘 먹여 놓고 볼 일이었다.
제대로 전쟁이 터진 직후라면 몰라도, 그 전까지는 잡음이 나지 않게 관리를 해주는 편이 나았다.
하성군에게 사탕과 선물을 한 아름 안겨서 보내놓으니, 다음은 유럽의 상인들이 나를 찾아왔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왜 우리가 명에서 쫓겨야 하는 겁니까!”
그들 모두가 동양 무역회사의 투자자였지만, 동시에 별도로 자신의 상선단을 운영하는 상인이기도 했다.
비단이나 도자기 같은 주요 상품은 이제 동양 무역회사를 통해서도 구할 수 있지만, 이미 움켜쥐고 있는 돈줄을 내팽개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이쪽에서 공장을 효율적으로 최대한 돌린다고 해도 대륙의 인건비란 마술과도 같아서, 의외로 가격 면에서의 경쟁력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는 돈만 벌면 그만인데, 쿠보가 쓸데없이 명나라 조정을 건드려 놔서 해금령이 강화되었단 말입니다! 맨 몸으로 겨우 빠져나온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이걸 어찌할 셈입니까?”
내가 보낸 경고가 늦은 것은 아니었지만, 늑장을 부리다가 상품 째 압류당하고 추방당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한 방에 날려먹은 것이다.
방문객들은 내게 그 책임을 물으려 하고 있었다. 명나라를 쓸데없이 자극해서 장사에 지장이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양국 사이를 오가면서 평화롭게 장사나 하는 ‘선량한 상인’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사실 위충현에게 꼬리를 잡힌 것도 그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재밌는 일이군.”
“뭐요?”
나는 곧바로 심유경을 불러들였다. 그 모습을 본 상인들 중 대부분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여기 심 공은 가까스로 도망쳐왔는데, 꽤 재미난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었지.”
그 중에는 뇌물을 바친 유럽 상인들에 관한 건도 있었다. 절강 출신의 한량이 일약 권신으로 올라서면서, 적잖은 이들이 해금령의 완화를 꾀하며 뇌물을 주었다고 했다.
“그대들이 추방된 게 내 탓이라고 했던가.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지금 일이 발각된 게 자네들이 과욕을 부려서인데, 그건 어찌 생각하나?”
물론 지금의 사태는 어느 하나가 온전히 원인이라고 하기는 곤란했다.
이쪽의 책임이라면 돼지를 구해 오는 과정에서 명나라 해안가를 들쑤신 것이 될 터였고, 저들은 심유경에게 뇌물을 바치며 물량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니 말이다.
내 지적을 들은 유럽의 상인들은 할 말을 잃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 그건…….”
“만약 여기 있는 심 공과 관련이 없었다면, 굳이 명나라 정부가 그대들을 추방할 이유도 없었겠지. 아닌가?”
실제로 그러했다. 닌자들이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여전히 섬라곡(태국)과 월남(베트남)에서는 사신과 상인이 오가고 있었다. 단순히 해금령을 강화하는 차원이라기보다는, 심유경이 실각하면서 벌어진 일에 가까웠다.
“생각해 보게. 지금은 힘든 시기인데, 우리끼리 다퉈서 뭘 하겠나.”
내가 그렇게 빠져나갈 구멍을 보여주자, 그들은 약삭빠르게 태도를 고쳤다.
“과연 그렇지요, 쿠보. 저희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원래 명나라는 해금령을 휘두르며 자유로운 상행을 막았으니, 이참에 그 폐단을 좀 고쳐야 하지 않겠나?”
유럽 상인들도 이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다. 대체로 군자금을 모으기로 했고, 개중 용감한 몇몇은 용병을 모아서 직접 나섰다.
* * *
주익균은 자신의 앞에 부복한 장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역시 그가 아니고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신, 척계광이 폐하를 뵙사옵니다.”
“간악한 왜적이 짐을 기만하였으니, 이를 징치하기 위한 계책을 마련하라.”
유배형에 처해진 그가 돌아온 것은 전적으로 위충현의 술수였다. 비록 그가 황제에게 심유경의 일을 고하여 신임을 얻기는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일개 창고지기에 불과했다.
이 영악한 환관은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 통할 수 있을지를 잘 알고 있었고, 군사적인 부분에 관해서는 나서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장군.”
대전에서 물러난 척계광에게 위충현이 다가갔다.
“위 태감 아니시오? 이 몸이 풀려난 데에는 태감의 진언이 크게 작용했다 들었소. 은혜를 드리워 주심에 감사드리외다.”
위충현은 그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을 정도이면서도 유능한 장수를 골랐고, 그게 바로 얼마 전에 황제의 분노를 사서 유배를 갔던 척계광이었다.
척계광 역시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굳이 상대를 환관이라는 이유로 업신여기지 않았다.
다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자신을 구해주었기도 했고, 그 석성 일파를 축출한 장본인에게 악감정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장군께서는 어떤 계책이 있으십니까?”
“글쎄올시다, 일단 황상의 뜻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소이까. 조선이 먼저일지, 아니면 왜국을 곧장 칠지부터 정해져야 할 것이오.”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서는 조선을 먼저 징치하게 될 것 같군요.”
위충현은 자신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얼마 전에 문책사가 갔다 오기는 했지만, 별 뾰족한 답을 얻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당장 힘을 쓰기가 어렵소이다. 왜구라면 몰라도 조선쪽은 또 다를 터인즉, 요동의 사정에 밝은 장수를 기용해야 할 것이오.”
척계광의 정론을 들은 위충현은 적잖이 실망했지만, 그래도 다른 수는 없었다.
“하면 장군께서는 누가 적당하다고 보십니까?”
“전 요동총병 이성량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하오. 그는 물론이고 그 아들들도 이가의 아홉 호랑이로 유명하니, 능히 조선을 칠 만한 인선이 아니겠소이까.”
“흠…….”
척계광은 유배를 간 세월이 길어서 어렵지 않게 불러올 수 있었지만, 이성량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바로 얼마 전에 쫓겨난 상태인데, 고작 정권이 바뀐 것만으로 다시 불러오기도 곤란한 일이었다.
“이성량을 불러오기가 곤란하다면, 그 아들인 이여송을 써보시오. 그는 아직 군관으로 남아 있으니, 일군을 맡기기에는 괜찮을 것이외다.”
“폐하께 잘 말씀드려보지요.”
* * *
“동양 무역회사의 선단도 상당한 무력을 갖춘 것으로 아는데, 그들만으로는 부족한지요?”
“아무래도 돈을 버는 회사의 목적이 계속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아서 말일세.”
이 부분을 제외하면, 제일본대명 연석 회의에서는 별다른 잡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시카가 쿠니우지는 돌아가는 판에 익숙하지 않아 자신의 견해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들 스스로가 동양 무역회사에 약간의 지분을 갖고 있기도 했다.
“하긴,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하면 저희는 사카이 쿠보의 동맹으로 참여하면 되겠습니까?”
“대신 강제는 하지 않겠네. 어쩌면 명이 조선이 아닌 일본에 곧장 원정을 감행할지도 모르니, 그것에만 대비를 해두도록 하게나.”
“유념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최전선은 큐슈가 될 터였다. 도쿠가와나 코가 쿠보는 몰라도, 미요시 마사야스와 모리 테루모토는 전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통보를 하고 회의를 끝내려는데, 테루모토가 새로운 주장을 꺼냈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명나라에 선수를 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전쟁을 피할 수도 없다면, 최대한 손실이 덜한 쪽을 택하자는 이야기였다.
“선수? 지금, 아니지……. 괜찮은 생각이군.”
그렇잖아도 명나라 국력의 소모를 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력 삼대정을 끌어오려던 차였다. 마침 얼마 전에 누르하치가 몽골과 접촉에 성공했다는 서신도 보냈으니 일단 그쪽을 우선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쪽에서 명나라의 해안가를 휘저어 버리면 그게 임진왜란을 넘어서는 수준의 소모를 강요할 수도 있을 듯했다.
“하면 아예 이참에 연합수군을 결성하시지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내가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나머지 세 사람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저는 달리 세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아시카가 쿠니토모의 반응은 그러했고, 나머지 둘은 테루모토의 주장에 동의했다. 실제로도 코가 쿠보는 그 실체가 없는 단순한 대표에 가까웠기에, 그대로 연합수군 창설이 결정되었다.
* * *
부지런히 연합수군을 조련시키는 동안, 누르하치가 접촉했다는 몽골인이 스모토를 찾아왔다.
“그래, 보바이라고 했나?”
“예, 쿠보.”
만력 삼대정 중 그 첫 번째, 보바이의 난을 일으킨 당사자였다.
원래 명에 귀부하여 유격까지 지냈으나, 그 속에 품은 야심 또한 만만치 않은 인물이기도 했다.
“쿠보께서 제게 도움을 주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전에, 정말로 독립을 하고 싶은 것인가? 내가 듣기로는 명나라의 장수라고 들었는데.”
“세가 불리하니 부득이하게 투항했을 뿐이지요. 하지만 명은 항상 초원의 형제들을 핍박했으니, 언제고 그 밑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말을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정작 지원만 낼름 받아먹고 도리어 명에 고개를 숙여 버리면 이쪽의 판돈만 날아갈 터였다.
“제가 직접 오지 않았습니까. 원래는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지만, 특별히 쿠보께서 지원을 해주시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겁니다.”
“확실히 열의는 대단하군.”
“그럼 제가 한 말씀 여쭙지요. 무엇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화약, 병기,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은 무엇이든 다 가능하지. 말만 빼고.”
내 말을 들은 보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곧바로 필요한 물자를 보내주기는 어렵네.”
일단 누르하치에게 물자를 맡기고, 다시 북방의 몽골족을 경유해서 보바이에게 보내는 형식을 취해야 했다.
“그러시다면야. 언제쯤이면 받을 수 있겠습니까?”
“준비되는 것은 약 두 달 정도 걸릴 거고, 자네가 거병을 하면 그때 몽골족이 도우러 내려갈 걸세.”
내 설명을 들은 보바이는 적잖이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아쉽지만 뭐, 괜찮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사크트 칸이 이 일에 무척이나 관심을 보이더군.”
내 말을 들은 보바이는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자신의 대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허튼 수작은 부리지 않을 터였다.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