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고니시라니-191화 (191/225)

191화 깨어난 명나라(1)

하늘의 아들, 천하의 주인, 세상을 다스리도록 천명을 받은 정당한 지배자. 이 외에도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되는 위치가 바로 황제였다. 그러나 주익균은 그런 표현에 걸맞는 인물이 아니었다.

-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가장 믿고 따랐던 스승과 신하가 모두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뒤, 그는 모든 일을 놓아 버렸다.

황제가 만기친람을 해도 모자랄 판에 아예 상소조차 읽지 않는 지경이 되자, 그 틈새를 노리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북 출신의 위충현이라는 환관도 그 중 하나였다.

“그 소문이 사실이란 말이지?”

“그렇다니까. 바다에 조금만 멀리 나가도 큼직한 배들이 돌아다니는데, 그게 다 왜국 집정의 소유라고.”

심유경이 국서를 거짓으로 꾸미고 공을 세운 것처럼 위장했다. 이는 황상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이야기였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요동총병 이성량도 비슷한 건으로 탄핵당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심유경을 발탁한 석성의 손으로.

고작 여진족 따위를 가지고 황상을 기만한 변방의 장수조차 벼슬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예 사신으로 간 자가 집정과 결탁했다? 황상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위충현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다시 오지 않을 기회로 여겼다.

“증거를 좀 더 모아 보라고. 네가 말한 건,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그가 비록 신출내기 환관이라고는 해도, 사례(司禮, 명나라에서 환관을 관리하는 기구)의 일이란 결국 황제의 의중이 가장 중요한 법이었다. 이 일을 황제의 귀에 제대로 꽂아 넣을 수만 있다면, 일개 창고지기가 실세로 올라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그렇잖아도 요즘 석성이 조선에 유화책을 제안하지 않았나. 어쩌면 동방의 오랑캐들과 손잡고 뭔가를 꾸미는지도 모를 일이지.”

실제로는 석성에 대한 모함에 가까운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진실에 닿아 있는 판단이기도 했다. 정작 그 말을 한 위충현 본인은 그저 일신의 영달만 추구했을 뿐이었지만.

어느 새부터인가 조선은 명나라의 눈치를 보려 하지 않았다. 책봉은 물론이고 건국시조의 가계를 바로잡는 일까지.

예전 같으면 조선의 국왕부터가 매달리고, 황상과 조정은 한 마디 하는 것만으로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것들도 옛 이야기에 불과했다.

어찌된 까닭인지 조선은 책봉에 매달리지 않았고, 사신의 비위를 맞추려 들지도 않았다. 명나라 조정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화였기에, 천조국과 제일번국의 관계는 나날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러한 중에 석성은 조선에 회유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러한 것들이 위충현의 눈에는 좋은 시빗거리였던 것이다.

“증거? 일단 닥치는 대로 모아 오기는 했는데…….”

“이거면 충분하겠어. 출세할 준비나 하라고, 친구.”

동향 친구의 도움을 받아 증거를 끌어 모은 말단 환관은 곧바로 황제를 찾아갔다.

“뭐라, 심유경이 짐을 기만해? 분명 사실이렷다!”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폐하.”

분노한 황제는 칩거를 깨고 나와 석성과 심유경을 잡아들이라고 엄명을 내렸다.

*       *       *

“아니 무슨…….”

닌자들에게 명나라 말과 풍습을 가르쳐서 투입한 게 고작 닷새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정국이 확 뒤집히고 말았다. 시차를 감안하면 거의 동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명 황제가 태업을 그만두었다니…….”

“쿠보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더라면 모르고 당할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옆에서 같이 보고를 받고 있었던 베드로가 그렇게 말했지만, 예상이 맞아떨어졌다고 즐거워하고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기분이 좋아야겠지만 그러기엔 정국이 너무 급하게 돌아가고 있군.”

지금은 석성이 잡히고 심유경이 망명을 요청하기만 한 상태지만, 언제 불똥이 다른 방향으로 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한양과 솔빈에 쾌속선을 띄우도록 하게. 급한 일이니 강화도를 열어 줄 걸세.”

“예, 쿠보.”

“그리고 동양 무역회사와 연관된 상인들은 모두 명에서 몸을 빼라고 이르게. 해금령이 걸린 일이니, 그들이 화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어.”

“포모사에도 쾌속선을 보내겠습니다.”

원래의 역사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란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의 심경이 이랬을까.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사전에 대비를 해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동안은 만력제가 태업을 하고 있어준 덕을 많이 보았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터였다.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다시 닷새 뒤, 심유경이 스모토로 들어왔다. 여전히 황제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까닭은 알 수가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그와 대면했다.

“가, 감사드립니다, 쿠보. 덕분에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환관 놈이, 그 간교한 환관 놈이 황상을 꼬드겼습니다.”

그래도 명나라 조정의 중추에 있었던 자였기 때문인지, 심유경은 닌자들이 가져오지 못한 알짜배기 정보를 많이 내놓았다.

“위충현이라는 창고지기가 있었는데, 그자가 몰래 대전으로 들어가서 동양 무역회사에 관한 것을 아뢰었다고…….”

거기다가 남만 상인들은 모조리 추방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심유경에게 넘겼던 국서는 그대로 날조 취급을 받았으며, 명나라 수군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사흘이 지나고 조선의 국서를 받았다.

- 아직 아국에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이 없지는 않을 걸세. 몇몇 신하들은 공방의 의중을 의심하고 있지만, 과인은 공방을 굳게 믿고 있으니 아국의 사정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일단 지금의 사태에서 조선이 직접적으로 엮여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일단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는 아닐 터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명나라에 가까운 여진의 입장은 또 달랐다. 얼마 전에 다녀갔단 누르하치가 다시 스모토를 방문했다.

“아니, 형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명나라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난 모양이야.”

다시 심유경을 불러와서 누르하치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여진의 우두머리는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형님께서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만약 지금이라도 명나라에 고개를 숙이신다면, 전쟁은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와서 말인가?”

“명나라 사람들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체면을 중시하지요. 원정의 준비도 보통 일은 아니니, 먼저 사신을 보내서 문책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 입조를 요구하는 것 정도가 그들이 내밀 수 있는 한계치겠지요. 그걸 받아들이신다면 전쟁은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의외로 누르하치는 유화책을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태도를 보았을 때, 그건 진심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나를 떠보는 짓은 그만두게.”

“쳇, 벌써 눈치채셨습니까?”

“자네가 명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하니 이상하잖은가.”

“역시 저를 아주 잘 아십니다, 형님은.”

내 타박을 들은 누르하치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진심이기도 합니다. 형님께서 정말로 전쟁을 피하고자 하신다면, 이보다 나은 방법도 없지요. 물론 저는 싸우는 쪽을 택하시길 바라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자신도 무기를 들고 선봉에 서겠다. 여진의 우두머리는 그렇게 말했다.

“자네는 아직 왕도 칭하지 않은 상태지 않은가. 아직 여진에게 주목하지는 않고 있으니, 벌써부터 힘쓸 생각은 하지 말게.”

내 만류를 들은 누르하치는 아주 감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도 여진족 하나가 더해진들, 대세를 뒤집기는 한없이 부족했다.

지금이 시기적으로 따지자면 명나라 말기이기는 해도, 아직 대륙에서는 많은 것들이 바뀌지는 않았다.

명나라의 국력을 크게 소진했던 만력 삼대정은 일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달리 말하면 전쟁을 벌였을 때, 최전성기의 명나라를 상대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단순히 삼대정으로 국력을 소모해도 그게 끝이 아닐 터였다.

군비를 충당하겠다고 세금을 올리다가 이자성과 장헌충의 반란이 또 터져야 하고,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도 북직예의 생산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사실 청나라도 산해관이 열리지 않았다면 대륙의 주인이 되지 못했을 거라는 견해도 있었으니, 그만큼 대륙의 기상이라는 것은 보기보다 훨씬 더 경계해야 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대륙의 기상은 사람의 기를 질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으니까 말이다.

가만, 삼대정? 하나는 만력 동정이라고 부르는 임진왜란이니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나머지 둘은 또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이보게, 아우.”

“말씀하시지요.”

“아우는 몽골하고 친한 편인가?”

내 질문을 받은 누르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원수를 지지는 않았고 그들도 명이라면 질색을 하지요. 혹시 그들에게 손을 내미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네.”

“몽골도 명나라라고 한다면 치를 떨 테니, 좋아할 겁니다.”

그게 일반론이기도 했고, 만력 삼대정의 첫 번째가 바로 몽골이 엮인 보하이의 난이라는 점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너무 깊게 나갈 필요는 없고, 무기와 식량을 팔겠다고 다리를 좀 놓아주게.”

“호오, 이쪽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실 생각이시군요. 좋습니다.”

누르하치는 반드시 몽골을 끌어들이겠다고 장담한 뒤, 다시 배를 타고 솔빈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두 달이 지난 뒤, 하성군이 스모토를 찾아왔다.

“명에서 문책사가 왔네. 당장 해금령을 준수하고, 일본을 치는 일에 앞장서라고 하더군.”

“아직은 조선을 번국으로 봐주고 있기는 한 모양이군요.”

“글쎄……. 내가 보기에는 조선에 마지막 기회를 준 게 아닌가 싶으이.”

다시 제일번국으로 돌아오거나, 혹은 일전을 벌이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최종경고인 셈이었다.

“일단 좋은 말로 돌려보내기는 했지만, 전하의 의중은 변함이 없네. 공방은 어떠한가?”

이미 조선은 명과의 전쟁을 각오하고 있었다. 아마 누르하치가 나와 친하다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겠지만, 원래의 역사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저야 명과는 바다를 끼고 있으니 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그렇게 위협적으로 와 닿지는 않습니다마는, 정말로 조선은 괜찮은 겁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 말을 들은 하성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지금 벌어지는 일이 늦은 감이 있을 지경일세.”

“그렇다고는 해도 조선이야말로 명의 제일번국이 아니었습니까?”

“조상을 욕보이고도 오히려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으려고 드는 게 무슨 상국이란 말인가.”

조선의 종친은 이제 와서 하는 말이라면서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세조와 연산군 시기 이후로 조선의 국왕은 신하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맞대응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명나라의 책봉이었다고 했다.

“사실 전하께서 그간 앓으셨던 지병도 거기에서 오는 울화가 크셨다고 들었네. 처음에는 나도 꽤 아쉽기는 했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 하성군은 국왕의 의중을 털어놓았다. 책봉에 매달려야만 했던 과거로 돌아가느니, 명에게 사대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 조선이 단독으로 명을 상대하려고 한다면, 망하지는 않더라도 국운이 기울어질 걸세. 하지만 공방이 일전의 약조를 지켜 주면, 오히려 백구지국을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