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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190화 (190/225)

190화 내 일본에 도쿄도특허사무국은 없다(3)

“이제 이성량, 그자는 이빨 빠진 호랑이일 뿐입니다.”

누르하치는 아주 자신 있게 호언장담했다. 그 표정도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요동총병 이성량은 여진족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해왔다, 동시에 그에게는 조부와 부친을 죽인 원수가 되는 만큼, 아주 기분이 좋은 모양새였다.

“그간 미곡을 넉넉하게 사들인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

아무래도 이쪽에서 구매한 식량을 이용해서 다른 부족들을 모조리 복속시킨 모양이었다.

명이 소위 오랑캐라 부르는 타국을 제압하는 방법에는 군사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정치, 외교와 무역을 수단으로 휘두르는 것이 더 익숙했다.

진시황이 중원을 하나로 묶은 이래, 중원의 지배자는 대륙의 모든 것을 누렸다. 황하와 장강 유역에서 나는 막대한 생산량은 물론이고, 동서남북의 특산물을 모두 거머쥐었으니 말이다.

여진족은 식량이 부족한 편이었고, 모자란 분량을 충당하기 위해서 조선이나 명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물론 약탈을 일삼았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지만.

당연히 명나라, 그리고 그 창구 내지는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요동총병은 여진족의 목구멍을 움켜쥐고 휘둘러왔다.

그러나 내가 누르하치에게 미곡을 공급하면서, 그 질서도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물론 형님께서 팔아 주신 쌀만 해도 크게 도움이 되었지요. 하지만 역시 명나라 조정에 수를 써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기회를 잡은 거야 아우가 현명하기 때문이 아니겠나.”

나는 누르하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명나라 조정에 수를 썼다니? 일단 얼렁뚱땅 넘겨 버리고, 화제를 다시 주식의 매입으로 돌렸다.

“그럼 내가 곧바로 동양 무역회사에 말을 해 두도록 하겠네.”

“부탁드립니다, 형님.”

*       *       *

“그런 이유로 동양 무역회사의 증권을 추가로 발행하고자 하네.”

내 말을 들은 옛 시정봉행, 베드로는 턱을 쓰다듬었다.

“어려울 건 없습니다. 하지만 추가로 자금이 더 들어온다고 해도, 딱히 쓸 곳이 없습니다.”

“배를 더 늘리는 것은?”

“지금도 약간 넉넉하게 운용하고 있는 판국입니다. 쿠보의 말씀대로 하려면 그만큼 운용비가 더 나갈 것인데, 그에 걸맞는 이익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나중에는 돈이 돈을 부르고 복리가 우주 최강의 힘이 되겠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돈의 위력이 크지 않았다.

지금 동양 무역회사에 돈이 더 들어간다고 해도 그 용처는 고작해야 배를 늘리거나, 호위 무장을 충실히 하는 정도일 터였다.

동양 무역회사의 총수는 장부를 뒤적이며 이모저모를 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르하치 공께서 동양 무역회사의 지분을 사들이려고 하시는 것은 금전적인 분야보다도 외교에 가까운 것이 아닌지요.”

“따지고 보면 그렇겠지.”

결국은 명나라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 최대한 버팀목을 많이 만들어 놓으려는 것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재확인한 베드로는 다른 제안을 꺼냈다.

“차라리 특허에 관한 건은 동양 무역회사와는 별개로 조약을 체결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연 저 유럽인들이 순순히 이쪽의 요구를 따르리라고 낙관하느니, 미리 조심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만 조선이나 여진은 몰라도 저 서양의 사람들에게는 강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으니, 당분간은 ‘동무’의 틀 안에서 진행을 해야 할 걸세.”

“과연, 불가피한 일이군요.”

다시 고민을 재개하던 베드로는 뭔가가 떠오른 듯, 고개를 위로 휙 들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마닐라 총독이 급전을 찾더군요. 필요하다면 ‘동무’의 증권을 팔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증권을 판다고? 혹시 지난 총회에 불만을 품고 발을 빼려는 것은 아닌가?”

정치적 문제가 엮여 있다고 했으니, 본격적으로 이쪽을 적대하기 위한 절차를 밟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옛 시정봉행이 설명하는 그쪽의 사정은 조금 다른 듯했다.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요즘 포르투갈 본국에 돈이 궁하다고 하더군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비록 잉글랜드에게 대차게 박살났다고는 해도, 아직 합스부르크 황실은 세계 각지의 재화를 마구 집어삼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칼레 해전도 결국 흥망성쇠의 계기일 뿐, 그 자체로 갑자기 잉글랜드가 세계 최강국이 되고 합스부르크의 이베리아 연합이 붕괴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드레이크 공이 요즘 이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토벌을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사정이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동무’의 증권을 움켜쥐고 있느니, 현찰로 바꿔서 자기 나라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를 잡아 버리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역시 그가 잡힐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쿠보.”

어쨌거나 판매자가 나왔으니 무리해서 자본금을 늘릴 필요도 사라졌다.

“총독에게 언질을 넣어 보게. 지분을 한 5푼에서 1할 정도 인수할 수 있을지 말이야.”

“예, 쿠보.”

동양 무역회사의 총수는 곧장 마닐라 총독부로 가는 쾌속선을 띄웠다. 답신은 약 보름을 살짝 넘겨서 돌아왔다.

- 듣던 중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소. 대금은 이미 받았으니 이 선편에 증서들을 보내는 바이오.

마닐라 총독은 지분을 7푼, 그러니까 퍼센트로 치면 7퍼센트에 해당하는 만큼을 들고 있었다. 그걸 전부 보내왔다.

물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국적의 상인들이 들고 있는 지분은 그대로였기에, 그의 영향력이 완전히 제로가 된 것은 아닐 터였다. 이 7푼은 오히려 그가 만약의 사태에 쓰는 여유자금일지도 몰랐다.

“제가 형님을 못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빈손으로 와서 증서만 챙기는 것도 염치가 없으니, 제가 꾼 돈을 다 갚기 전까지는 형님께서 들고 계시지요.”

이런 이유로, 증서는 일단 내가 들고 있기로 했다. 물론 누르하치의 명의가 되어야 할 터였지만, 그가 당장 낼 수 있는 돈은 그렇게 많지가 않은 편이었다.

어쨌든 여진족의 우두머리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스모토와 부산포, 뤼순에 이어 네 번째 특허 사무국이 녹둔도 건너편, 솔빈이라는 항구에 자리 잡았다.

*       *       *

누르하치가 돌아간 뒤, 나는 다시 이치로와 베드로를 불러들였다.

“아무래도 명나라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은 모양이야.”

나는 정말 명나라에 뭔가를 한 적이 없었다. 했다고 쳐도, 기껏해야 돼지나 골라서 가져온 게 전부였다.

요동총병 이성량이 실각한 건 확실한데, 누르하치는 거기에 내가 수를 썼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먼저 동양 무역회사의 총수에게 지시를 내렸다.

“밀수꾼과 명나라 출신 해적들을 중심으로 정보를 모으도록.”

“예, 쿠보.”

그 다음 이치로를 돌아보았다. 명나라 사람을 매수한다고 해도, 그 한계가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직접 사람을 꽂아 넣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치로는 명나라에 투입할 닌자들을 준비시켜라.”

“언어와 풍습이 달라서 들여보내기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닌자도 이 시대에는 나름 전문직이요 지식인의 반열에 들 만했다.

그러나 잠입을 하려면 이질적인 모습을 감추는 게 가장 중요한데,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야말로 닌자들에게 위험한 대상일 터였다.

“시간은 좀 걸려도 상관이 없다. 그리고 명나라 역시 상당히 커서 남쪽과 북쪽의 말이 아주 다르다고 들었으니, 어느 정도 구색만 갖춰도 될 것이다.”

“예, 주인님.”

그동안은 일본 내부의 일, 그리고 유럽 상인들과 조선과의 관계에만 집중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리저리 계속 명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이상, 나중을 대비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언제까지고 심유경이 이쪽의 흔적을 덮어줄 수 있을지도 확실치가 않았다.

“명나라 관원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리고 다시 한 달이 지났고, 그동안 옛 시정봉행은 최대한의 수완을 발휘해 왔다.

“그동안 모은 정보입니다.”

“어디, 좀 볼까.”

맨 앞에 나온 것은 역시 명나라 조정의 사정이었다.

기본적인 틀은 추정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거정 사후에 만력제는 그대로 정치에서 손을 놓아 버렸고, 그 이후로 실권을 쥔 자는 병부상서 석성이라고 했다. 심유경은 석성의 일파였고, 지금은 그들이 실세에 가장 근접한 인사들이었다.

보고서를 다음 장으로 넘기니, 좀 더 세부적인 내용이 나왔다. 석성의 파당이 가장 유력하기는 해도, 그들이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모양새였다.

황제가 차라리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형국이었다면 명나라 조정도 안정적으로 굴러갔겠지만, 지금은 자금성 내부가 춘추시대의 재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지금 석성과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는 약점이 몇 가지 존재했는데, 그중 하나가 이쪽과 무관하지 않았다. 지금도 간관들이 심유경이 허위 보고를 한 것이 아니냐며 물어뜯는 중이라 했다.

“역시 인구가 많으니 그중에서 조금 가려 뽑기만 해도 똑똑한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는 모양이군.”

물론 지금은 16억 떼쟁이가 아니라 진짜 중화 그 자체요, 명실상부한 천조국이라는 것도 감안을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진상의 당사자인 입장에서 보기에, 꽤 예리한 의심이 아닐 수 없었다.

상당히 세세하게 적힌 내용을 읽으면서, 옛 시정봉행이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주 꼼꼼하군.”

“과찬이십니다, 쿠보.”

그리고 다음으로는 바로 이성량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내가 명나라의 동향에 관심을 보인 계기가 누르하치의 말 때문이기도 했으니, 그만큼 공들여 조사한 것 같았다.

“이성량이 뛰어난 장군이라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아주 쓰레기였구만.”

“서는 자리에 따라 보는 것도 달라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렇군.”

전공을 허위로 보고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싸우지도 않고 싸운 것처럼 장계를 꾸미고, 양민을 잡아다가 여진족이라면서 목을 베어 올렸다고 했다.

그리고는 장거정과 그 파당에게 끈을 댔는데, 심유경의 공으로 석성 일파가 정권을 쥐면서 그간 숨겼던 진상이 드러난 모양이었다.

“명나라의 사정은 오히려 누르하치가 더 밝았을 것이니, 심유경이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내가 뭔가 수를 썼다고 했던 게로군.”

요동의 정세는 딱 그 정도로 끝났다. 현지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외부인이 총병을 맡으면서, 누르하치가 혓바닥으로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조선에 관한 것이었다.

“종계변무를 아직까지 끌고 있다고?”

원래 지금쯤이면 해결이 되고도 남을 시기였다. 더구나 지금 정권을 쥐고 있는 석성이 원래의 역사에서도 해결의 실마리 노릇을 했으니, 어련히 끝났으랴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류큐국이 조선에 도움을 청했을 때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서 이쪽으로 팔밀이를 해 버린 일이 있었다.

그리고 기억을 좀 더 과거로 돌려보면, 지금 조선의 국왕이 명나라의 침공을 각오했던 것도 생각났다. 그때 후방 교란과 해로 차단을 부탁해 왔던가.

그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아무래도 조선이 여전히 명의 으뜸가는 번국이라고 하기에는 곤란할 터였다.

“이거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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