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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187화 (187/225)

187화 만국진량의 나라(2)

“확실히, 요즘 영길리 상인들이 류큐 왕국에 부쩍 관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동양 무역회사의 경영을 맡고 있는 베드로의 증언도 류큐국 사신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길리나 서반아, 포도아 상인 모두가 ‘동무’의 주주이니, 쿠보께 해가 되는 일이 아니면 시급을 다툴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가 같이 가져온 이번 달의 정기 보고서에는 해당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영길리 상인, 난잔의 호족과 접촉.’

내 호출을 받고 급히 추가한 것이 아닌가 싶은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일단 수정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그 뒤로도 다른 보고 내역이 빼곡하게 들어찬 상태였다. 문서를 매끄럽게 수정하려면 최소한 개인용 컴퓨터 정도는 나와야 하니, 베드로가 다른 꿍꿍이를 품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베드로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내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고, 류큐국에서 사신이 와 있다네.”

“류큐라……. 우리에게야 타국의 일에 불과하겠습니다만, 확실히 류큐 국왕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겠지요.”

그가 대꾸한 대로, 국왕의 입장에서는 삼산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일 터였다.

“그렇다면 다시 사신을 불러와야겠군.”

지금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만, 한시가 급할 누군가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곧바로 류큐국 사신 세이치를 집무실로 오게 했다.

“늦은 시간에 불러서 미안하게 되었네.”

“아닙니다, 쿠보.”

분명 실례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오히려 세이치의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이 시간에 찾았다는 것 자체가 그의 목적을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도 될 테니까.

“그대의 말이 맞더군. 일단 이 국서의 진위는 믿을 수밖에 없었네.”

“그, 그렇다면……?”

세이치의 상체가 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만큼 기대를 크게 품은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류큐의 우슈가나시와 어떤 의리가 있어서 도와야 한단 말인가?”

내가 질문을 던지자, 세이치는 미리 준비한 것처럼 매끄럽게 말문을 열었다.

“고사에 이르기를, 순망치한이라 했습니다. 저희 류큐국은 예로부터 뭇 나라의 가교 역할을 했으나, 이는 달리 말하면…….”

“그만하지.”

“쿠보?”

결국 류큐의 사신이 내민 것은 허망하기만 한 명분론뿐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줄 수 있는 것도 많지가 않으니, 그게 최선의 수이기는 했다.

이왕 벌어진 상황이니 나도 류큐에 바라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교섭에 나와서 도움을 청하는 입장이라면 스스로가 쥔 으뜸패가 무엇인지쯤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말이다.

“류큐는 분명 만국진량의 나라였지. 귀국 도성에 큰 종이 하나 걸려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네.”

남해의 명승지로서 삼한의 빼어남을 담았다. 또한 대명과는 보거(輔車, 보거상의의 약어)이며, 일본과는 순치(脣齒, 순망치한의 약어)이다. 배와 노로 만국의 진량이 되어 기이한 물산과 보화가 가득 찼다.

“쿠보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지만 바꿔 말하면, 쥐도 아니고 새도 아니지 않은가. 류큐국에는 박쥐가 많다 하더니, 사람도 박쥐와 같은 듯하군.”

내 면박을 들은 세이치의 얼굴이 붉어졌다.

“비록 쿠보께 도움을 청하러 왔다 하나, 나라와 나라의 일입니다. 어찌 이리도 모욕을 주십니까!”

“그럼 내가 담백하게 물어보지. 류큐는 내게 뭘 줄 수 있나?”

“그, 그건…….”

고작해야 선조들이 중계무역으로 쌓았던 부가 전부일 터, 그러나 고작 그런 걸로는 나를 움직일 수 없다.

“생각해 보게. 류큐 국왕이 도움을 청할 정도라면, 내가 움직여야 할 병력의 규모도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일세. 그 군비만 생각해도 얼마겠나.”

내가 이치를 들어 다시 차근차근 설명하자, 세이치의 얼굴은 핏기가 빠지고, 아주 새하얗게 변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허어, 내가 아까 물어보지 않았나. 무엇을 줄 수 있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이르자, 류큐국의 사신은 머리를 찧으며 말했다.

“나라와 우슈가나시의 존속을 위협할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아국은 예로부터 교역으로 먹고 살았으나 지금은 그조차도 끊겨 상황이 좋지가 않으니, 부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흠, 그렇다면 이걸 한 번 보게나.”

나는 나니와 조약의 사본 하나를 보여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직 아국이 전란에 휩싸이던 시절, 내가 다른 다이묘들과 맺은 내용일세.”

가문을 류큐국 왕실로 치환하면, 그대로 적용해도 괜찮을 조문이었다. 과연 세이치도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이 정도라면……. 그래도 이 문제는 제가 임의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 우슈가나시께 아뢰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네. 그러면 내가 귀국에 사절을 보낼 것이니, 같이 가서 협의하도록 하게나.”

*       *       *

쿄타로는 뱃전에 서서 주군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 자네가 류큐국에 좀 다녀와야겠네.

- 하명하십시오.

- 가서 류큐의 국왕에게 내 친서를 전달하고, 남방 제도에 함대를 주둔시키는 문제를 협의하도록 하게.

- 소관이 수전을 벌이는 일이라면 나름 잔뼈가 굵기는 했으나, 타국과 교섭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 별다른 일은 없을 걸세. 지금 조건에서 양보하지만 않으면 될 것이고, 그 외의 나머지는 원군으로 가는 정도로 생각하면 충분하겠지.

그리고 과연 주군의 말대로, 류큐 국왕은 순순히 쿠보의 제안에 국새를 찍었다.

그리고 지금 쿄타로와 그가 이끄는 함대는 미리 지시받은 대로 사키시마라는 섬 근처 해역에 닻을 내린 상태였다.

“지금부터 류큐국의 남쪽 해역은 우리 수군이 봉쇄한다. 동양 무역회사를 제외한 그 어떤 배도 통과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사카이 쿠보 휘하의 여러 함대 중에서, 특별히 가장 좋은 함선으로 구성된 제 1 함대. 원래는 스모토 인근 해역을 경비하게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교타로의 인솔 하에 가장 멀리까지 나와 있었다.

“만약 적을 발견하거든 바로 신호탄을 올리고, 본대와의 합류를 우선시하라.”

사카이 쿠보가 지목한 잠재적인 위협은 바로 영길리의 대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였다. 그는 치고 빠지기에 아주 능하다 했으니, 각개격파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렇게 판단한 쿄타로는 휘하 선장들에게 신신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       *       *

“어디에서 온 배인가?”

“누구인가를 물을 때는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예의 아닌가?”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상대편 함선에게 그렇게 반문을 던졌다. 하지만 배의 형상이 아주 낯익었기에, 어디 소속인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내 아끼는 황금사슴과 모양이 비슷한데, 그 쿠보의 함대가 와 있는 것인가…….’

지금 프랜시스의 조국은 스페인을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때야말로 세계 곳곳에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잉글랜드의 판도를 넓일 기회라고 보았다.

이미 스페인이 장악한 대서양과 카리브해를 휘저었고, 포르투갈의 인도양도 들쑤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곳, 극동에 거점을 마련하면, 오만방자한 합스부르크를 괴롭히기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마닐라를 건드리기에는 너무 태세가 강고했고, 포모사의 이해관계는 복잡하게 얽혀있어 섣불리 손을 대기가 어려웠다.

고심하던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류큐국 남쪽의 군도였고, 그는 지역 호족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번에 정식으로 여왕 폐하의 이름으로 조차지를 건설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이제 완전히 틀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깃발을 보고도 모르겠나. 우리는 사카이 쿠보 휘하의 수군 함대다. 당장 배를 멈추고, 소속을 밝혀라.”

“역시 그랬군.”

드레이크는 혀를 차며, 마지막 미련을 버렸다.

“나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여왕 폐하의 해군 제독이다. 쿠보께 예물을 가져왔으니, 안내해 주기 바란다.”

“예물을 가져왔다고?”

“요즘 쿠보께서 쓸 만한 가축을 수집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한 녀석까지 챙겨왔지. 안내를 부탁한다.”

*       *       *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자네는 정말로 대담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쿠보.”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자신의 야심을 접고, 곧바로 나를 만나러 왔다.

“류큐 국은 공백지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추잔의 왕이 도움을 청했거든.”

“한 발 늦었군요. 뭐,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준비한 예물이나 받으시지요.”

그가 선물이랍시고 넘겨준 것은 다름 아닌 소였다. 그것도 덩치가 크기로 유명한 인도의 품종이라 했다.

그렇잖아도 조선의 소를 어떻게 교배시킬지 고민하던 차였는데, 그 문제가 단숨에 풀려 버렸다.

“허, 내가 이걸 필요로 하는 것은 또 어찌 알고?”

“이 일대의 바다에서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명나라에서도 돼지를 구하셨다고 하던데, 혹시 필요하시지는 않은가 싶어서 가져와봤습니다.”

“잘 받도록 하겠네.”

역시 눈치 하나만큼은 자기 배만큼 빠른 자였다. 그는 류큐에서 바로 발을 빼고, 나와의 우호를 다지는 편을 선택했다.

“대신에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게.”

“쿠보께서는 마닐라의 스페인 총독이 도움을 청하면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번에는 실패로 돌아갔으니, 다음 기회를 노리겠다는 뜻이었다. 역시 스페인 죽이는 맨이라는 걸까.

“글쎄…….”

“스페인은 여왕 폐하와 잉글랜드의 적입니다. 그들까지 돕겠다고 하신다면, 그때는 저 역시 물러설 수 없습니다.”

드레이크는 내게 협박을 하다시피 했지만, 나는 빙긋 웃기만 했다.

“지금은 그렇게 행동하실지 몰라도, 때가 오면 결정을 하셔야만 할 겁니다.”

“이보게, 미스터 드레이크.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동양 무역회사의 사장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뭐라고 했는지 짐작이 가는가?”

내 질문을 받은 잉글랜드의 대해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두가 동양 무역회사의 주주이니, 그 행사에 관해서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네. 물론 이쪽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말이지.”

“그렇군요.”

나는 어느 쪽에도 개입하지 않겠다. 그런 뉘앙스를 담아서 말하자, 프랜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돕지 않는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원수를 갚는데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야, 드레이크라는 이름이 울지요.”

단순히 엘리자베스 1세의 충신이라서가 아니라, 드레이크 본인도 스페인에게 악감정이 있었을 터였다. 카리브해로 상선을 타고 처음 나갔을 때, 목숨을 잃을 뻔했다던가.

“역시 미스터 드레이크로군.”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모처럼 만난 자리였기에, 드레이크는 자신의 모험담을 늘어놓았고 나는 그걸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그가 마닐라 인근에서 스페인의 갤리온을 털었다는 이야기를 마친 뒤, 나지막한 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요즘 명나라 쪽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쪽이야 워낙 대국이니, 사소한 움직임 하나도 우리에겐 상당한 무게로 다가오는 법이지.”

만력제가 고려 천자가 될 일이야 없겠지만, 어쨌든 태업 중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명나라가 움직인들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까.

하지만 드레이크의 생각은 아주 다른 듯했다.

“단순하게만 보실 일은 아닙니다. 명나라에서 돼지를 구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관원들이 관심을 보였다고 하더군요. 부디 주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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