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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186화 (186/225)

186화 만국진량의 나라(1)

추잔(中山 중산). 그러니까 지금의 류큐 왕국을 일컫는 말 중 하나였다.

엄밀히 말하면 류큐를 구성했던 남산, 중산, 북산의 세 왕조 중 전부를 통일한 중산 왕조를 의미했지만, 그쪽의 사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류큐와 추잔을 혼동하곤 했다.

애초에 조선왕조실록에도 ‘유구국 중산왕’이라는 명칭으로 종종 등장하고는 했으니, 토오루가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탓할 이유는 없었다.

류큐에는 기항지만 만들어 두었을 뿐, 이쪽과의 관계가 그리 깊지는 않았다.

류큐의 가치는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물산보다는 문자 그대로 ‘만국진량’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에 가까운데, 지금은 동양 무역회사의 비중이 훨씬 큰 까닭이었다.

나는 스모토로 향하는 배 위에 올라, 다시 토오루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로 찾아왔다고 하던가?”

“반드시 쿠보께만 아뢰어야겠다고 합니다마는…….”

행색을 보건데 도움을 청하러 온 것 같다. 토오루의 판단은 그러했다.

“도움이라 했나.”

나는 그렇게 대꾸하며 머릿속으로 동원 가능한 전력을 암산했다.

국가간의 도움을 주고받는 문제라면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도움을 청하는 모양새라면 결국은 군사적인 부분일 가능성이 높았다.

고니시 수군의 함대를 하나, 무리하면 둘 까지 차출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 동국의 목축업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라 마침 예산에도 여유가 있었다. 이순신이 훌륭한 모범 사례를 만들어 준 덕에, 다른 지역에서의 시행착오가 크게 줄었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 여유가 생기자마자 쓸 곳이 튀어나온 것은 조금 언짢은 일이었지만.

거기까지 머리를 굴리는데, 뭔가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이 느껴졌다.

시정봉행으로서 나름 눈썰미가 있으니, 잘못 본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뭔가 애매한 느낌이었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주변의 정세를 복기했다.

“‘동무’에서는 그 문제와 관련될 만한 보고가 없었나?”

“예, 쿠보. 적어도 아직까지는…….”

물론 그쪽은 철저히 교역에 치중하는 입장이니, 정치나 외교에 관해서는 민감도가 조금 낮은 입장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명나라가 뭔가를 꾸몄다면, ‘동무’에서도 낌새를 알아차렸을 것이니 일단 그쪽은 아니겠고.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시마즈 일족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류큐에 손을 뻗을 수 없는 입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대가 끊겨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 성세는 과거에 비하면 사실상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고 봐도 좋았다.

사츠마국 전부를 움켜쥐고, 큐슈 남부를 호령하던 그들은 이제 성 하나에 의지해 명맥만 이어가는 처지로 몰락했다.

그렇다면 그 상전으로 올라앉은 미요시 마사야스는? 입지 조건이나 세력 규모만 놓고 보면 얼마든지 류큐에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의 수군은 류큐에 원정을 보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조선인가…….”

무심코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었지만, 옆에 있던 토오루가 냉큼 답했다.

“조선은 아닐 겁니다. 사신이 말하길, 이미 조선에도 도움을 청했으나 되려 쿠보께 가라는 말만 들었다고 합니다.”

“조선이? 무슨 까닭으로 말인가.”

“다른 일이 급하여 신경을 써 줄 수가 없다고 했던 모양입니다.”

지금쯤이면 서인 숙청도 거의 끝났을 것이니, 조선에 있을 다른 급한 일이란 또 무엇일까. 질문이 오히려 질문을 끌어내고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의문을 중간에 끊어내고, 다시 류큐국의 사정을 추측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집중했다.

일본도 조선도 명도 아니라면, 그 다음 후보는 역시 유럽의 상인들일 터였다. 더구나 그들도 ‘동무’에 손을 뻗고 있으니, 별다른 보고가 올라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배는 스모토로 닿았고, 나는 곧장 치소로 향했다.

*       *       *

“사카이 쿠보직을 맡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일세. 나를 찾았다고?”

내 질문을 받은 사신이 고개를 조아렸다.

“쿠보를 뵙습니다. 가나시를 섬기고 있는 세이치라 합니다.”

“가나시?”

내가 처음 듣는 표현에 의문을 표하자, 옆에 있던 역관이 귓속말로 설명했다.

“가나시란 전하에 대응하는 표현입니다. 류큐의 왕을 우슈라 하기에, 우슈가나시라 하면 국왕 전하라는 말이 되지요.”

나는 통역관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다시 사신에게 눈을 돌렸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네만, 귀국의 사정도 좋아보이지는 않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쿠보.”

내가 용건을 요구하자, 사신은 찾아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쿠보의 은덕으로 왜구가 줄어들어 살기가 좋아졌습니다만, 근래 들어 다시 해적들이 류큐를 넘보고 있습니다. 명은 황제가 제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며, 조선은 쿠보께 가라 하였기에 저희가 도움을 청할 곳은 쿠보 한 분뿐이십니다.”

“해적이라……. 그런 보고는 받지 못했는데.”

“남만인들의 수작입니다. 그들은 쿠보와 친근하다고 들었는데, 그들이 쿠보의 눈과 귀를 가린 겁니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그들도 류큐까지 손을 뻗기는 쉽지 않을 텐데? 지금 동양 무역회사의 배가 천축, 그러니까 인도까지 활보하고 있는 판에, 역으로 내 턱 밑에 들어오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남만이라고 해도, 포도아에 영길리, 화란을 비롯해 온갖 분파가 나뉜 것으로 알고 있네. 그들 모두가 서로 이해가 다 다르니, 한 가지로 뭉뚱그리기는 어렵지. 류큐를 탐내는 자들은 어디에서 왔다고 하던가?”

“영길리, 영길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불측한 마음을 품은 난잔(南山)의 아지와 손을 잡고, 류큐를 갈라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영길리?”

유럽인들일 가능성이 크다고는 생각했지만, 그중에서도 잉글랜드가 주범이라는 것은 다소 뜻밖의 이야기였다.

나는 미심쩍은 부분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구체적으로 재차 질문했다.

“남만인들은 서로 상잔하기를 즐기기에, 악행을 저지르면서 이웃의 깃발을 내걸기를 꺼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혹여 영길리에게 덮어씌우려는 다른 남만인의 수작이 아닌가 의심스럽군. 그들의 수괴가 누구인지 아는가?”

“이름은 알지 못하나, 그 별명은 용이라고 했습니다.”

“용?”

역시 뚜렷한 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이쯤 되면 국내 정치에 내 힘을 빌리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남만인이 류큐의 분열을 획책하는데, 그게 누군지도 명확하지가 않고 별명만 알고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내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추궁하자, 사신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답했다.

“하, 하지만 저희들의 힘으로는 그조차도 간신히 알아낸 것이었습니다.”

“일단 돌아가 있게.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 직접 사람을 보낸 것이니, 가벼이 움직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나 혼자 내키는 대로 정할 일은 아닌 듯하군.”

“쿠, 쿠보…….”

“판단이 서고 난 뒤에 다시 부를 것이니, 객사에서 기다리란 말일세.”

나는 나가지 않으려는 사신에게 재차 축객령을 내렸다. 그도 더 매달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순순히 심부름꾼의 인도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영길리의 용이라…….”

짚이는 게 없지는 않았다. 바꿔서 표현하면 잉글랜드의 드래곤, 혹은 드래곤이 아니라 드레이크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사신이 말한 해적 수괴란 다름 아닌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말이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닌데…….”

올해는 서력으로 1590년.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임진왜란까지 2년 남은 시기였지만, 많은 것들이 바뀐 상태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북아의 이야기, 나비효과를 감안해도 아직은 변화가 인도를 넘어서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아직 에스파냐는 여전히 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만 있자, 칼레 해전이 언제였더라?”

세계사의 대략적인 흐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나는 구체적인 연도에 약한 편이었다. 대충 이맘때쯤이겠거니 싶기는 하지만, 그런 겉핧기식 정보로는 유럽의 정세를 파악하기가 어려울 터였다.

나는 일단 심부름꾼을 불렀다.

“지금 영길리의 상관으로 가서, 대표를 오라 해라.”

“예, 쿠보.”

유럽 상인들은 치소에 멀지 않은 곳에 머물러 있었고, 잉글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를 한번 끓이고 그 물이 식어갈 무렵, 내 호출을 받은 잉글랜드 상관 대표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쿠보.”

“음,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불렀네.”

“무엇이든 말씀하시지요.”

머릿속에는 온갖 질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완곡한 것을 골랐다.

“유럽의 정세가 궁금하더군. 요즘 잉글랜드가 에스파냐를 상대로 승승장구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실상이 어떤지 말해줄 수 있겠나?”

“벌써 소문이 쿠보의 귀에까지 들어갔군요.”

잉글랜드의 상관 대표는 그렇게 운을 뗀 뒤, 신이 나서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벌써 재작년이군요. 당시 콧대 높은 합스부르크의 펠리페 국왕이 대함대를 조직해 본국을 침범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주 어리석었고, 그의 오만한 군대는 잉글랜드를 밟지 못했지요. 자랑스러운 여왕 폐하의 함대는 해협 맞은편에 집결한 스페인 함대를 기습하여 몰살시켰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가.”

역시 칼레 해전은 이미 벌어진 다음의 일인 듯했다.

“아직 해군의 규모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완전히 뿌리를 뽑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강대한 스페인도 여왕 폐하의 함대를 맞아 싸우기에 급급한 지경이지요.”

“대단한 일이로군.”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원했던 내용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그 친구가 아주 오만불손하기는 한데, 용기만큼은 아주 대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대함대를 상대로 뛰어들어서 이겼으니 말입니다.”

“전에 왔던 해군 제독이로군.”

“역시 기억하시는군요!”

“아주 인상 깊었지. 오해가 생겼으면 도망칠 법도 한데, 곧바로 스모토에 들어오지 않았나. 요즘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던가?”

아주 자연스럽게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근황을 질문할 수 있었다. 이미 흥에 잠긴 상인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흔쾌히 그의 소재를 말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계속 스페인 놈들을 괴롭히는 중이지요. 얼마 전에는 마닐라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오호, 제법 가까이 왔군. 그렇다면 일본에도 들를 법한데.”

“쿠보께서 한 마디만 하시면 바로 찾아올 겁니다. 상인들에게 미리 말을 해둘까요?”

“그것도 좋겠지.”

그 이후로도 잉글랜드 상인은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스페인과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어갔는가를 읊었다.

“…… 그러니까 말입니다. 이제 스페인의 성세도 한물 간 셈이지요. 이제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이 두 나라가 유럽의 바다를 움켜쥘 겁니다.”

아직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사이가 꽤 괜찮은 모양이었다. 물론 앞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는 입장에서, 잉글랜드인의 입으로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우스웠지만.

그가 돌아간 뒤, 나는 다시 ‘동무’의 총수를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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