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공방 검지(6)
“오랜만일세.”
“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쿠보.”
나는 호조 우지히데부터 불러들였다. 그는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으신 것인지…….”
“일단 차부터 들게나. 멀리 천축에서 들어온 것일세.”
“오오, 귀한 것이군요. 과연 향이 좋습니다.”
그렇게 차를 마시면서 족자를 감상하다가, 옛 이야기부터 꺼냈다.
“자네도 한동안 도성에 지낸 적이 있었지.”
“그렇습니다, 쿠보. 그때는 도성 나니와쿄가 아니라 사카이 마을이었지요.”
우지히데는 옛 일을 회상하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자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우에스기 가문에 양자로 보내졌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겐신 님께서는 저를 정말 친아들처럼 여겨 주셨지요. 하지만…….”
“신겐과 공멸하고 말았지.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사카이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리고 쿠보의 은덕으로 큰형님에게서 영지를 받아냈습니다. 게다가 일전에 조언해주신 덕에 소출이 나날이 늘고 있지요.”
도대체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앞에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뒤로는 성대하게 호박씨를 까고 있다니.
어쨌든 그는 내가 노리던 바를 정확하게 언급했다.
“전부 자네의 복이 아니겠나.”
“감사합니다, 쿠보.”
“그런데 말일세.”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딱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아시카가 가문의 마지막 적손은 왜 자네가 감추고 있는 것인가?”
“예, 예?”
내가 정곡을 찌르자, 우지히데의 가면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일단 잡아떼는 모양새였지만, 당황한 기색만큼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런 우지히데에게 나는 한 발짝 더 들어갔다.
“코가(古河 고하)의 쿠보는 이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기에, 내가 따로 건드리려 하지 않았네. 어쨌거나 나 역시 돌아가신 쇼군께 도움을 받은 바가 적지 않으니, 어찌 내 손으로 아시카가 가문을 끊을 수 있겠는가.”
코가 쿠보의 후예를 감추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허튼 수작은 용납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를 담아서 말하자, 우지히데도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보이는 말을 꺼냈다.
“저, 저 또한 호조 가문이 전부터 연이 있어, 곤궁한 처지를 도우려 했을 뿐입니다.”
우지히데는 인척 관계를 변명으로 내세웠다.
그에게는 고모가 되는 셈인, 우지히데의 조부 우지츠나의 딸이 당시의 코가 쿠보였던 아시카가 요시우지와 혼인했고, 지금 아시카가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도 그들의 후손이었다.
그러니 어려운 친척을 돕는다는 명분은 언뜻 보기에 사리에도 어긋나지는 않았다. 호조 가문의 손으로 거세시키다시피 한 코가 쿠보를 다시 내세운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정말로 그것만인가?”
“믿어 주십시오, 쿠보.”
일단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과연 자네의 말이 이치에 맞는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정말 순수한 선의의 발로였다면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말일세. 어쨌거나 이제 아시카가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가 아닌가. 그러니 이제는 도성으로 옮기는 게 맞다고 보네만.”
“제, 제가 이미 의식주를 풍족히 대고 있으니, 쿠보께서 번거로움을 감수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 역시 돌아가신 쇼군의 은덕을 많이 입지 않았던가. 그러니 대가 끊이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쿠, 쿠보…….”
과연 우지히데는 내 제안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쇼군가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겠나.”
“하면, 새로운 쇼군을 옹립하시려는 것이신지…….”
우지히데는 이 와중에 또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자기 친척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입밖에 내서도 안 될 이야기였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목을 긋는 손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못할 것도 없네만, 지금 상황에 새로운 쇼군이 서면 오히려 혼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겠나?”
“그, 그런…….”
“생각해 보게. 그 옛날의 덴노도, 쇼군도, 간레이도, 허수아비가 된 자들은 그 끝도 좋지 않았네. 지금 쇼군을 세운들 무슨 힘이 있겠나. 혹시 자네는 입으로 보호를 말하면서 속은 태뢰의 소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우지히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시원시원해서 좋군.”
“쿠보의 관대함 덕입니다.”
실체가 까발려진 음모가는 이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자네 덕에 쇼군가의 제사가 끊이지 않게 되었으니, 특별히 전봉을 시켜 줄까 하네.”
“그, 그러지 않으셔도…….”
“아닐세. 공을 세웠으니 응당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나. 지금 자네 세입이 한 오만 석쯤 되지 않았던가.”
물론 지금 검지 이전에 산출했던 양이었다. 내가 언질했던 대로 부지런히 개간을 했다면, 지금쯤 족히 이십만은 웃돌 터였다.
중간에 히데요시의 난 때문에 피해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치요다 성 일대의 잠재력만큼은 일본 제일이니까.
그리고 아직 검지의 결과는 공표되지 않았다. 나야 영지를 사들이거나 담보로 잡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평가 가치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흠, 시모츠케(下野 하야, 오늘날의 도치기 현)국에 십만 석을 주겠네.”
“가, 감사합니다, 쿠보.”
“하지만 그걸 통째로 주면 말이 많을 테니, 지금의 영지는 내어놓도록 하게나.”
“예, 예?”
우지히데는 뜻밖의 말을 들어서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완전히 이해한 다음에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쿠, 쿠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상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공에는 반드시 상이 따라야 하지 않겠나. 가게.”
“쿠보.”
“두 번 말하지는 않겠네. 이제부터 자네의 영지는 치요다 성 일대의 늪지대가 아니라, 시모츠케의 기름진 땅일세.”
물론 거기도 한참 재건을 해야 하는 땅이지만, 어쨌든 예전에는 이십만 석을 자랑하는 영지였다. 우지히데도 상을 받아서 기분이 좋은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 * *
“역시 쿠보의 감시망은 곳곳에 깔려 있었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지히데가 겪은 일을 전해 듣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장남인 나가타다는 부친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님, 결국 계책이 틀어지고 만 것이 아닙니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일이었다. 어쨌든 쿠보의 정보력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있었으니, 소득은 충분하니라.”
쿠보의 눈길은 우지히데에게서 끊겼다. 그 이야기인즉, 아직 그의 성과 저택은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에야스는 덴뿌라를 한 입 베어 물고 다시 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미쿠모 공이 내일 온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아버님.”
지금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장을 열고, 아와지의 상인들에게서 공장을 유치해 오고, 학교 설립도 준비하는 상태였다.
키리시탄의 선교사들 역시 쿠보의 눈과 귀가 되겠지만,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만했다.
이미 시바츠지 일족은 철공장을 세우기로 약속했고, 내일 올 미쿠모 일족의 상인은 염색공장을 짓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오기로 되어 있었다.
“상대의 신분이 무사가 아니라고 해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이니라.”
군대를 이끌고 천하를 다투는 일이라면 나가타다가 이에야스보다 나았다. 그러나 상인을 대하는 일은 군략보다는 모략에 더 가까웠고, 아직은 그가 아들을 챙겨야 했다.
다행히도 나가타다 역시 이제는 부친의 말에 잘 따르고 있었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아버님.”
이제는 영지 자체의 농사와 군사력은 의미가 없다. 그게 이에야스가 내다본 일본의 앞날이었고, 도쿠가와 일족은 그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렇지. 요리의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느냐?”
“요즘 긴키 지방에서는 육류가 유행하고 있다 하니, 숙수와 도축업자를 불러왔습니다. 멧돼지와 사슴, 노루 고기를 준비하게 했으니, 그들의 입맛에도 맞을 겁니다.”
“그리고 활어도 준비하거라. 시바츠지 공이 아주 좋아하더구나. 도성과 스모토에서는 여전히 튀기거나 굽거나 혹은 초밥을 만들고, 날회는 여전히 귀하다고 했다. 그러니 그걸 내어놓으면 두고두고 기억할 게 아니겠느냐.”
“그리 지시해 두겠습니다.”
도쿠가와 부자는 그렇게 공을 들여서 접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기로 한 상인은 끝내 오지 않았다.
“아직도 미쿠모 공은 오지 않았느냐?”
“기별이 없습니다.”
“흠, 분명 선편으로 온다고 했을 것인데…….”
도쿠가와 가문의 저택은 하마마츠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곳 역시 항구로서의 입지 조건이 꽤 괜찮았다. 이에야스는 공들여서 사주를 파냈고, 바다와 이어진 하마나(浜名 빈명) 호수는 천혜의 항구나 다름없었다.
하루에도 수 척의 배가 드나들었지만, 이날따라 하마마츠 항도 한산했다.
“수군의 초계 범위를 좀 더 넓혀 보라 해라.”
“예, 아버님.”
차라리 육로로 왔다면, 어디쯤 오는지 기별이라도 왔으련만. 이에야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갑갑함을 억눌렀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사정은 비슷했다. 하마마츠 항에는 그 어떤 배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이냐.”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스모토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요.”
“그래, 그러도록 해라.”
이에야스는 아들의 말에 동의하다가, 갑자기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잠깐,”
“예, 아버님.”
“그간 약조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연통을 넣도록 해라. 시바츠지 일족의 상선이 항상 때를 지켜 왔는데, 벌써 하루가 늦지 않았느냐. 뭔가 변고가 있는 것이다.”
“과연, 그리 지시하겠습니다.”
파발이 황급히 하마마츠를 떠났다. 그리고 꼬박 이레가 지난 뒤에야, 도쿠가와 부자는 답신을 받아볼 수 있었다.
- 갑자기 병이 들어 멀리 나가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몸이 좀 낫거든,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급환이 들었다고……. 뭐, 어쩔 수 없지. 병마가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도 아니니.”
미쿠모 상인의 편지를 내려놓은 이에야스는 시바츠지 일족에서 온 서신을 펼쳤다.
-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 당분간 사업을 확장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부디 양해를 부탁드리며, 다음에 다시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에야스는 첫 번째 편지를 읽었을 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내용은 납득이 어려웠다.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 대체 무슨…….”
“상인 놈들은 역시 예의를 모르는 후안무치한 자들입니다!”
“아니, 잠깐. 기다려봐라.”
다른 편지들도 내용은 비슷했다. 곤란한 처지가 되었으니, 그간 추진했던 일은 다음으로 미루자는 내용만 나올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츠다의 당주가 보낸 편지에 진상이 드러났다.
- 우리 츠다 일족이 미카와노카미의 집안과 연이 깊어, 특별히 몇 자 적습니다. 지금 쿠보께서는 상인들이 공과 거래하기를 원치 않고 계십니다. 당분간 보중하시고, 좋은 날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런, 이럴 수가! 으, 으으…….”
이에야스는 분노와 당혹감을 억누르지 못했다.
“아, 아버님, 아버님!”
멀어지는 아들의 목소리가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