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공방 검지(2)
미요시 마사야스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본 뒤, 주변의 다른 무사들처럼 수결을 작성했다.
얼마 전, 그는 모리 테루모토와 별도로 만난 적이 있었다.
- 대체 우마노카미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검지는 분명 쿠보의 뜻일 텐데, 어찌하여…….
- 아직은 시기상조라 보기 때문이오.
- 그러지 마시고, 솔직하게 말씀을 좀 해 주시지요.
- 내게 다른 뜻은 없소이다.
마사야스는 사카이 쿠보의 힘에 의지하여 미요시 일족을 재건하고 가문의 숙원이었던 간레이직까지 받아낸 상태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순히 쿠보에게 고개를 숙이기보다, 모리 테루모토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긴밀하게 협력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검지에 관한 건은 잠시 숙여야 할 때라고 보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같은 태도를 취했다.
만약 모리 테루모토가 반기를 들다가 쿠보의 분노라도 산다면, 그의 입지도 덩달아 줄어들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테루모토는 한사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방금 전까지도 쿠보의 방침에 이의를 제기했다.
회상을 마친 마사야스는 옆의 테루모토를 슬쩍 돌아보았다. 역시 그는 수결을 작성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내 걱정은 마시구려. 누군가는 이 일을 말려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러다가 쿠보가 퇴장하자, 테루모토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발걸음은 명백히 쿠보를 향한 상태였다. 마사야스 역시 테루모토가 선을 넘을까 두려워하며, 황급히 뒤를 쫓았다.
“쿠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마노카미!”
모리 테루모토는 끝내 자신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걸 본 마사야스는 뜯어말리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우마노카미구려. 시코쿠 간레이도 왔고……. 미카와노카미까지 온 걸 보니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쿠보의 말에 놀란 마사야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그 말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따라온 상태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오.”
기어이 지금의 형세도 무너지고 마는구나. 마사야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집무실까지 따라 들어갔다.
* * *
‘기어이 모리 테루모토가 제 무덤을 파는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낯가죽 밑으로 미소를 감췄다.
‘이미 대세는 정해졌고, 남은 것은 누가 2인자로 올라서느냐다.’
도쿠가와 가문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천하에서 모리와 미요시, 이 둘뿐이었다.
미요시는 쿠보와 혼인으로 엮여 있지만,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한 거나 다름없어서 목소리를 높이기 어려운 처지였다.
게다가 쿠보의 대두 이후로는 미요시 나가요시의 딸도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이에야스는 그들을 넘기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리는 어려운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테루모토의 조부였던 모토나리는 아주 현명한 자였고, 그가 쿠보와 동맹을 맺은 이래 쿠보와 모리 가문의 협력 관계는 아주 굳건했다.
그랬던 것을 지금 테루모토가 망치려 하고 있었다. 도쿠가와 가문에게 가장 드높은 장애물이 알아서 넘어져 주고 있으니, 이에야스는 웃음을 참느라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이에야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테루모토는 그가 예상한 대로 다시 검지에 반대하고 나섰다.
“쿠보, 검지의 실행을 재고해 주십시오.”
“또 그 이야기인가.”
“지금 쿠보께서는 동국의 많은 영지들은 인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득보다 실이 클 것인즉, 결코 쿠보께 이로울 수가 없는 일입니다.”
테루모토의 표정은 고집스러웠고, 그걸 받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안색은 굳어 있었다.
“이미 공표까지 끝낸 일일세. 그런데 어찌하여 되물리라 하는가.”
“쿠보께 해가 될 일을 보고도 내버려 둘 수가 없기에 올리는 간언입니다.”
“간언이라……. 정말로 지금 간언이라 했는가?”
그런데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리 가문은 실상이야 어떻든 명목상으로는 쿠보와 대등하게 동맹을 맺은 입장이었다.
더구나 나머지 두 세력인 미요시나 도쿠가와와는 달리 종속적인 색채도 강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간언이라니. 이는 보통 상하관계가 명백할 때나 쓰는 표현이 아니던가. 그것도 모리 테루모토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입밖에 내기까지 했으니,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터였다.
이에야스는 어느새 등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은 고작해야 밀고나 했을 뿐인데, 테루모토는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 * *
테루모토가 흥미로운 단어를 꺼냈다.
모리 일족이 내게 절대적으로 협조적인 것과는 별개로, 그들은 항상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가문의 수장이 지금 내게 드러내 놓고 배를 깐 거나 다름없는 표현을 사용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간언이라, 간언이라! 하하…….”
“그렇게 웃어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쿠보.”
“아니, 아니오. 다소 뜻밖이라…….”
테루모토의 표정이 여전히 굳은 것을 보면, 그는 상당한 각오로 진심을 다하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세가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꿋꿋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이걸 정략의 일환이자 연기라고 한다면, 테루모토의 경지는 두 분야에서 거의 천상계에 이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간과 쓸개를 다 내놓고 납작 숙이는 것이라면, 그것도 자신의 평판을 깎아가면서 벌이는 짓이라면 오히려 괜찮았다.
고개를 숙이는 대신 존속을 보장해 달라는 타협을 갱신하자는 제안이나 마찬가지니까. 배신의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 터였다.
아까 테루모토가 민심을 운운한 것도 흥미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아예 칭신(稱臣)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는 손을 들어 안심하라는 몸짓을 보였다.
“우마노카미가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으니,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오. 어디 그 이유나 한번 들어봅시다.”
내가 판을 깔아 주자, 테루모토는 다시 자신이 반대하는 이유를 설파했다.
“지금 쿠보께서는 동국의 영지를 많이 인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네.”
“이미 전란으로 피폐해졌으니, 그걸 복구하려면 상당한 인력과 물자가 필요할 겁니다.”
그러니 검지 같은 대사업은 잠시 뒤로 미루자는 이야기였다. 아까도 했던 이야기였지만, 그의 진심을 확인한 이후로는 다르게 들려왔다.
“내가 그까짓 거를 감당치 못할 걸로 보이는가?”
“조선 속담에 이르기를,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동국의 재건은 쿠보의 재화를 불처럼 태워 버리기만 할 뿐, 남는 게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자네의 걱정은 타당하군. 하지만 이미 대책은 마련해 두었네.”
그는 물론이고, 여기 참석한 사람들은 아직 내가 무엇을 꾸미고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동국에 적극적으로 목축을 권장할 생각이네. 얼마 전에 조선의 소를 사다 보낸 것도 그 일환이고, 조만간 중국의 돼지를 비롯해서 우수한 외국의 가축을 마저 들여올 계획이지.”
“하지만 사람은 고기만으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물며 인구가 대폭 줄어들은 동국에 그걸 할 인력이 남아 있을지…….”
“하하, 이 사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네.”
조선의 소는 순하여 키우는 데 인력이 덜 들고, 다른 가축 역시 농사만큼 손을 타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역시 돈을 빨아먹기만 하겠지만,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 문자 그대로 캐시카우가 될 터였다.
“아마 길어야 오 년이면 모든 게 세입은 정상으로 돌아올 거고, 그 이후에는 오히려 기대해 봄직하지 않겠나.”
그러한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하자, 테루모토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쿠보의 말씀대로라면…….”
“제 식견이 짧았습니다.”
동맹들의 의문을 풀어준 것과는 별개로, 아직 내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말일세. 모리 공의 생각은 일본에서 보기 드문 것인 듯한데, 혹시 새로 익힌 학문이 있었던가?”
“요즘 조선에서 건너온 선비들에게 도학을 익히던 차였습니다.”
“호오, 그랬군.”
그랬다면 이야기의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일본의 무사는 주군이 바보짓을 해도 같이 바보짓을 하는 걸로 충을 다한다지만, 조선의 선비는 목숨 걸고 뜯어 말리는 것으로 충을 다한다고 하지 않던가.
더구나 내가 조선의 문무 관료를 끌어오기도 했으니, 그 의도가 어디에 있을지 알아차린 눈치였다.
“교류는 다양할수록 좋은 법이지. 학식이 뛰어난 자들이니 많이 배우도록 하게.”
* * *
“과연 자네의 말대로 되었네. 젊은 선비가 식견이 대단하더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자신의 성으로 돌아온 테루모토는 식객으로 있는 선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사실 반신반의했네.”
“오히려 무모한 도박을 제안드린 것 같아 송구스럽던 차였습니다. 일이 잘 풀렸으니 다행이라 생각할 따름입니다.”
“정말이지, 이에야스, 그 너구리 같은 자의 표정을 수은 자네도 봤어야 했네, 크하하하.”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고 했다. 쿠보가 일본 제일의 세력가로서 자리를 굳힌 지금, 동맹을 언제고 팽하려 들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비록 조부 때부터 이어진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는 법. 테루모토는 모리 일족의 수장으로서 가만히 앉아만 있으려 하지 않았다.
계책은 맞아떨어졌고, 이제 모리 가문의 존속과 번영은 재차 보장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네에게 오천 석의 봉록을 내리고 싶네. 부디 중신으로 들어오지 않겠는가.”
“소인은 조선 사람입니다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옛날 중국의 소진이라는 자는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직하기도 했으니, 출신과 소속이 같을 필요는 없을 걸세.”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지요.”
지금 조선의 조정은 그 형세가 뒤집어져 있었다. 그간 득세하고 있었던 서인은 온갖 이유로 숙청을 당하고 있었고, 동인이 새롭게 떠오르는 상태였다.
성혼의 제자였던 강항 역시 그 풍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정국에서는 과거에 급제해도 오히려 날벼락을 맞기 쉬울 터였다.
- 이렇게 된 이상, 잠시 소나기를 피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강항은 천하 유람에 나섰다. 견문은 넓을수록 좋은 법. 굳이 조선에만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일본행을 선택했다.
그리고 하타카에서 킷카와 모토하루와 연이 닿아, 모리 가문의 식객이 되기에 이르렀다.
입신양명은 선비로서 꿈꾸는 바였지만, 일본국 대명의 가신이 된다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잠시 생각할 말미를 요구한 그는 자신의 처소에서 고민에 잠겼다.
“어찌해야 좋을지…….”
일본국 경공방에게 조선 사람이 붙어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은 상태였다.
유성룡은 그의 스승과도 친분이 있었지만, 엄연히 노선이 달랐다. 그걸 생각하면 역시 한동안 서인의 앞날은 캄캄하기만 했다.
“게다가 오천 석의 봉록이라…….”
어지간한 고관대작의 급료보다도 높은 양이었다. 조선에서의 어두운 앞날과 당장 눈앞에 나타난 막대한 봉록이 강항을 유혹했다.
“흠……. 나쁘지는 않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