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내가 호랑이를 키웠구나(2)
“1할 정도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1푼.”
“살아있는 생명에 관한 대가인데 1할은 주셔야지요.”
유교 원리 주의파였던 동인 수준 실화냐? 갑자기 가슴이 웅장, 아니 갑갑해 진다.
물론 유성룡을 불러다가 특허 관련 연락 업무를 익히게 한 건 나지만, 이건 청출어람도 어지간한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설마 어딘가 다른 세계선의 유성룡이 튀어나와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랬으면 내가 일본의 사카이 쿠보가 아니라 대조선국 본주도 경총독쯤 되었겠군. 그것도 괜찮나……? 어쨌든!
내가 상인 생활을 열 살 무렵에 시작했다. 같은 급의 상인 가문이 사카이에 36개가 있었고, 지금 나만큼 사는 상인은 나 하나라고!
펄펄 끓는 차를 마시자, 비로소 현실 감각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승천해 버리려는 정신 줄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가며 협상을 진행했다.
“그렇다면 조선의 사람들이 소의 특질에 기여한 게 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1할씩이나 받아가겠다는 것인가? 1푼이 적당할 걸세.”
“소의 특질에 기여한 바가 없다니요. 아국 이전에 고려가 있었고, 고려 이전에는 삼국이 있었으며, 그 삼국은 삼한에 뿌리를 두었고…….”
유성룡은 갑자기 조선의 내력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내가 조금은 더 세밀하게 알 텐데, 그런 이야기까지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은 잠깐 구석으로 밀어 넣고, 손을 들어 길어지려는 말을 끊어냈다.
“잠깐, 결례인 줄은 아네만, 날은 짧고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려면 바쁘니 간단하게 해주게.”
“아국의 내력은 단군으로부터 이어지지요. 여러 차례의 분열과 흥망성쇠가 있었지만, 예로부터 그 습속은 중원이나 일본과는 아주 뚜렷했습니다.”
“미안한 일이네만 결론부터 말해 주게.”
“지금 공방께서 찾으시는 조선의 소는 조선 땅의 천시와 지리, 인화가 어우러져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러니 조선에서 나고 자란 사람 모두가 기여한 것이지요. 1할도 싸게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천지인의 합일을 이렇게 귀신같이 끼워 넣는다고?
그렇다고는 해도 1할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보게, 유 대사. 내가 특허에 관한 법도를 제정하려 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모두가 군자가 될 수는 없으나 소인의 재주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으니, 독점적인 이익을 제공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하려 함이 아니셨습니까.”
“바로 보았네.”
단순히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건 확인했다. 적어도 내가 특허 제도를 도입하려는 이유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차 한 모금을 들이키고 입을 열었다.
“그 취지를 잘 아는 자네가 어찌하여 1할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이는 정당한 대가가 아니라 탐욕이며, 장차 특허 제도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고 말 걸세. 이게 일본에 있어서 대국이었던 조선의 뜻이라면, 실망을 금할 수가 없네.”
내가 이치와 조선의 체면을 끌어와 이야기를 하자, 유성룡도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물론 조선에서도 소가 농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근래 들어서는 식용으로도 많이 쓰인다는 것을 알고 있네. 하여 내가 섭섭하지 않게 값을 쳐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다섯 배로 갚는 게 1할씩 사용료를 내는 것보다 저렴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두고두고 삥을 뜯기게 되는 것이고, 이런 선례가 남는 것 역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차후에 일어날 일도 생각을 해보게. 조선에서도 여송이나 일본에서만 나는 식물성 약재를 사가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것들 전부에 1할씩 사용료가 매겨진다고 생각하면, 결코 조선에도 이로운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일세.”
다 같이 잘 살자는 취지로 제도를 도입했더니 오히려 무역 장벽이 되어 버리는 사태는 용납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조선도 요즘은 수입 품목이 다양해 졌고, 그 양도 제법 늘어난 상태였다.
유성룡은 잠시 고민하더니, 금세 내 말에 수긍했다.
“과연 그렇기도 하군요. 그렇다 해도 1푼은 너무 낮은 가격이 아닐지…….”
“내가 처음 사용료의 개념을 창안해 냈을 때도 5푼을 넘기지 않았네. 더구나 지금의 조선 소는 어떤 특별하고도 인위적인 개입이 없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인데, 그걸로 폭리를 취할 셈인가?”
“그렇다면 5푼으로 하시죠.”
“조선에 백락 같은 이가 있어 명우를 가려내 교배한 일이 없을 것인데, 어찌 개인의 창의성과 비교하려고 하는가. 그대로 1푼으로 하지.”
약간의 실랑이 끝에, 품종에 관한 사용료는 1푼으로 확정이 되었다.
“그런데 공방의 말씀대로라면, 인위적으로 특별한 품종을 만들어 내도 인정받을 수 있겠군요.”
“그야 당연한 이야기지. 그 경우라면 그대로 5푼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걸세.”
그 자리에서 토종과 개량종에 관한 사용료까지 논의가 흘러갔다.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라면 이쪽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이었기에 적극적으로 밀어붙였고, 유성룡도 거기에 수긍했다.
“일단 소에 관한 것은 이렇게 정하도록 하고, 장차 자국의 원산종에 관해 정리할 필요가 있겠군.”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조정에 알려 두도록 하지요.”
그렇게 협상을 끝내고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나는 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까지 영리하게 굴 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사실 아직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도 이런 논의가 벌어질 정도로 경험이 쌓이지는 않았다.
“날이 늦었군.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술이나 한 잔 하고 가는 게 어떻겠나?”
“공방께서 청해 주신다면 사양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술상이 금방 차려지고, 나는 유성룡과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몇 순배를 돌렸다. 협상이 완전히 마무리된 상태였기 때문인지, 유성룡도 아주 편안하게 취해 있었다.
그렇게 적당히 얼큰해 질 무렵,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오늘 자네가 보여준 협상 능력은 대단했네. 아주 감탄스러웠어. 내가 상인으로 시작하여 평생을 거래로 살아온 몸이지만, 오늘 같은 일을 겪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네.”
“저야 배운 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주본(洲本, 스모토)에 온 이래 일본에서는 특허의 법도가 어찌 돌아가는지 살폈으며, 거기에 전부터 알고 있는 것을 더했을 뿐입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일세. 나는 재화를 불리고 군대를 맡길 장수를 볼 수는 있어도, 그런 이치에는 아무래도 약하지 않은가 말이야.”
나는 짐짓 겸양을 떨었다. 물론 평생이 경전 지식으로 좌우되는 조선의 선비들에 비할 바가 아니기도 했지만.
그렇게 유성룡을 추켜올려주자, 그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공방께서 이치에 약하시다니요. 이미 졸하신 율곡 선생께서 들으시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일입니다.”
그도 협상이 꽤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괴력난신 따윈 언급도 안할 선비가 사령술의 영역까지 입에 올리는 걸 보면, 확실히 취하긴 취한 듯했다.
“그런 말은 마시게. 그보다도 짐승의 품종에 사용료를 매길 생각은 어찌 한 겐가?”
“어려운 건 아닙니다.”
질문을 받은 유성룡은 기분 좋게 술잔을 털어 넘긴 뒤, 입을 열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보천지하(普天之下)에 막비왕토(莫非王土)요, 솔토지빈(率土之濱)에 막비왕신(莫非王臣)이라 하였지요.”
“그런 구절이 있었던 것도 같군.”
“하늘 아래 왕토가 아닌 곳 없고, 그 땅에 신하 아닌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조선에 사는 소 역시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마디로 유교 경전에서 끌어 온 근거가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랬군. 참으로 대단하이.”
이게 현대인 천재론의 함정이라는 것인가 싶었다. 나야 단순히 그간 인류가 쌓아올렸던 경험을 컨닝한 것이지만, 지금 협상했던 상대는 자신의 지식을 조합해서 거기에 근접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문득 정말로 조선에 회빙환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여러 사실을 조합해보면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은 듯했다.
조선에서 비금도 소총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없고, 하성군이 뭔가 현대인스러운 면모를 보이지도 않았으니 그쪽은 아니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유성룡도 아주 떡 벌어진 체형은 아니니 역시 기각.
하성군의 아들들도 지금 두각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없으니 역시 아니겠지.
나는 내가 들고 있는 패가 절대적 우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걸 새삼 되새기면서, 유성룡에게 술을 권했다.
* * *
“그런 이유로 특별한 생물종이 있다면 전부 찾아내야 할 걸세.”
조선은 조선대로 바쁘게 움직일 거고, 나 역시 눈뜨고 코 베일 수는 없는 노릇. 관료들을 불러다가 조사 작업에 착수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각 영지별 상황을 파악하기에도 인력이 모자란 실정입니다.”
예상했던 반발이 나왔다. 지금은 히데요시가 남기고 간 상처를 수습하기에도 급급하니, 일을 더 벌릴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동국의 재건은 그 어떤 일보다 우선이 될 것이네.”
“그렇다고는 해도 쉽지 않은 일이 될 겁니다.”
일단 조선과의 협약은 꽤 긴 유예기간을 둔 상태였다. 물론 그동안에 동국이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동시에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생물종의 조사는 그 자체로 목적이기도 하지만,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이기도 하지.”
“그 무슨……?”
시정봉행을 비롯해, 대부분의 관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혼다 마사노부만은 뭔가를 알아차린 기색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나는 일본의 전부를 측량할 생각일세. 인력과 예산은 최대한 지원해 줄 것이니, 모두들 따라주기 바라네.”
그렇게 공표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오자, 마사노부가 뒤따라왔다.
“조만간 금척이라도 하나 마련해야겠군요.”
“역시 자네는 눈치가 빠르군.”
“천하를 평정했으면, 그 다음은 마땅히 통일된 법식의 도입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책사로 이름 높은 마사노부였다. 내가 이번 일로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대번에 짚어낸 것이다.
“진시황도 중원을 통일한 이후에 화폐와 수레바퀴의 폭, 그리고 길이를 재는 단위를 모두 하나로 묶었지요. 그 이전에도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내기도 했고 말입니다.”
“그렇네. 지금이야말로 검지(検地)를 실시하기에 좋은 시기겠지.”
통치는 각지의 무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고, 나는 그들에게 빨대를 꽂는다. 돈과 힘, 그리고 명예의 맞교환이면 제법 훌륭한 거래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를 목숨처럼 아낀다면, 그건 그냥 가지고 있으라지. 대신에 나는 땅과 명예를 제외한 모든 것을 가져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