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내가 호랑이를 키웠구나(1)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쟁은 완전히 끝났다. 살아남은 잔당은 전부 포로로 잡히거나 혹은 할복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히데요시가 끌고 온 타 민족 병력은 전부 노역형에 처해졌고, 끝까지 미노와 성에서 항전하던 가토 기요마사는 자기 주군의 목을 보고는 그대로 성루에서 뛰어내렸다.
그걸로 끝. 이라고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개선식을 마친 뒤, 내 저택과 치소는 방문객으로 가득했다. 높아진 위세에 눈도장이나 찍으러 온 사람이면 차라리 반가울 텐데, 그보다 묵직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많았다.
히데요시가 막바지에 부렸던 패악은 지금까지도 아물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영지를 사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공의 집안이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아니오이까?”
“그게,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으니……. 차라리 다 내려놓고 일개 백성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를 찾아온 사람들은 오히려 눈치가 아주 빠른 편이었다.
비록 땅이 남았다 해도, 인구가 반 토막조차 남지 못한 영지가 되고 만 상황. 그걸 붙잡고 있느니 일찌감치 가산을 정리해서 살기 좋은 나니와로 아주 이사해 버리겠다는 의도였다.
처음에 의용병까지 모아 가며 의욕적으로 탈환에 나섰던 자들 중에도 이런 경우가 적지 않았다.
“뜻이 정 그러시다면, 저쪽에서 다시 이야기를 하시구려.”
영지를 팔겠다고 찾아온 다이묘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아예 실무진을 짜서 체계를 갖춰 놓은 상태였다.
나는 상대의 의지를 확인한 뒤, 정말로 팔려고 하는 사람은 그쪽으로 보냈다.
아마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헐값을 받게 되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눈탱이를 맞아 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 고작 이거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마침 불만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섭지만 실무 담당자는 만만하다는 거겠지. 그리고 잠시 후,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그것도 꽤 잘 쳐준 것이다. 불만이라면 썩 꺼져라.
과연 삼대 효웅 중 하나라는 것인지, 많이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에 위압감이 있었다.
예전의 그도 내게 자신의 영지를 맡기고 소출에 준하는 봉록을 받아갔으니, 더더욱 당당하게 호통을 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잠시 후, 히사히데가 직접 내 집무실로 찾아왔다.
“쿠보, 이런 잡일까지 맡기는 건 너무 하는 거 아니오?”
“아무래도 무사란 족속은 이름값에 눌리는 경향이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아니면 마츠나가 공 외에는 달리 맡길 사람이 마땅치가 않더군요.”
창칼이 가득한 싸움터에서 은퇴는 시켜주었지만, 아직 그가 설 만한 전장은 남아 있었다.
“이거야, 원…….”
“그래도 공의 위엄 덕에 실무진이 자기 일에만 집중할 수가 있잖습니까.”
내가 험악한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뒤에서 무게만 잡아 달라는 건데 얼마나 쉬운 일이란 말인가. 물론 너무 진상을 부리면 히사히데 본인도 짜증이야 나겠지만.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영지를 팔겠다고 하는 사람의 숫자도 반 정도로 줄어든다.
대신 마음을 고쳐먹은 다이묘들은 두 번째 행렬로 자리를 옮기고, 일감은 그대로 남게 된다.
“돈을 빌려 달라는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쿠보.”
“물론 빌려드릴 수야 있겠소만……. 역시 영지의 재건에 쓰려는 것이오이까?”
그래도 선조의 유산을 내려놓기 힘든 사람들은 재건하기 위한 자금을 빌리려 했다.
“히데요시, 그 악적이 심하게 망가뜨려 놓은지라, 제 가산을 털어서도 부족할 듯하여…….”
“많이는 빌려드리기 어렵소.”
그러니 담보를 보여 달라고 말하면, 당연히 영지를 담보로 내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영지의 가격을 판정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아까의 실무진에게 보냈다가 평가액에 따라 대출금을 책정했다.
간혹 가다 귀한 보물을 내놓는 경우도 있었다.
“이건 중국에서 들여온 도자기인데, 백여 년 전에 장인이 만든 거라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기엔 좀 구식 같소만.”
“그, 그럼…….”
“이건 송대에 만들어진 도자기요. 꽤 귀한 걸 갖고 계셨구려.”
이런 식으로 졸지에 동국의 재산현황이 파악되곤 했다.
그렇게 받아 온 땅은 자신의 영지를 원하는 장수들에게 내렸다.
물론 처음부터 자신의 영지와 봉록을 맞교환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나 그를 따라온 무사들은 거부했지만, 그 아들들이나 혹은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흔쾌히 영지를 수여받았다.
“고작 노예였던 제가 영지를 지닌 다이묘가 되다니, 모두 쿠보의 은덕입니다.”
“쿄타로 정도만 그래도 받을 만하지 않은가. 앞으로도 열심히 일해 주게.”
물론 그들이 새로 얻은 영지를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운영한 것은 아니었다.
스모토의 관료들이 상당수 파견을 나갔고, 사실상 수조권만 받은 상태로 꾸려졌다. 그렇게 최대한 처분을 해도 많은 땅이 공백지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황무지로 놀려 둘 수는 없지.”
“혹시 방도가 있으십니까?”
“목초지로 꾸며 볼까 하네.”
농사는 어쨌든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적어도 내연기관이 나오고 농업용 차량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러나 목축업이라면 그래도 약간은 이야기가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노역을 살고 있는 야인들을 중심으로 가축을 치는 방도를 연구해 보도록.”
그래도 야인들은 유목민인 만큼 짐승을 기르는 일에는 정통했고, 걸맞는 품종 역시 외부에서 들여오기가 쉬웠다.
“돼지를요……?”
“그렇네. 중국의 돼지가 고기를 많이 낸다 하니, 가서 좀 사오도록 하게나.”
처음에 떠올렸던 것은 이베리코였지만 너무 밀리 있었다. 중국의 돼지도 상당히 쓸 만했던 것으로 기억하니, 급한 대로 밀무역을 통해 가져오기로 했다.
그리고 소는 돼지보다도 구하기가 쉬웠다. 적어도 거리상으로는 그랬지만 그 전에 팔 쪽에 설득을 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의 소를 사들이고 싶다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지금 전란으로 피폐해진 동국을 재건하려면, 조선의 소가 제격일 걸세.”
“공방께서 백성을 아끼시는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유성룡에게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는 난색을 표했다.
그간 부산포에서 많은 상품을 거래했지만, 역시 소는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고, 피폐해진 동쪽 지방을 재건하려면 조선 소가 절실했다.
역시 소는 농사에 중요하고, 아직은 농업이 중요한 시대였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그 대가를 확실하게 이야기하면 가져오기는 더욱 쉽다고 할 수도 있었다.
“물론 농우가 귀하다는 건 잘 알고 있네. 세상에는 돈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고, 소 역시 그러한 것이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씨로 쓸 소들을 보내주면, 10년 후에는 다섯 배로 갚겠네.”
내 제안을 들은 유성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 다섯 배!”
“그렇네. 열 마리를 보내면 쉰 마리로 갚고, 백 마리를 보내면 오백 마리로 갚겠다는 이야기지, 어떤가?”
“제가 임의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조정에 상신하여 답을 드리겠습니다.”
유성룡이 나간 뒤, 시정봉행은 오히려 내 제안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 공이 아까 말한 것이기도 하지만, 일본에도 소는 많습니다. 그런데 굳이 조선의 소를 들여올 이유가 있는지요?”
“소장도 그리 생각합니다. 각 지역마다 소의 특색이 다 달라 열 가지 소가 있다 하는데, 그중에 쿠보께서 원하시는 품종이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혼다 마사노부도 말 한 마디를 더 얹었다.
“국우십도(国牛十図)를 말하는 것인가?”
“바로 보셨습니다, 쿠보.”
그건 나도 근래 들어 가축을 도입하느라 몇 번 읽어봤다. 헤이안 시대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은 딱히 영양가라는 걸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쿠젠의 소, 원래 이키 섬에서 왔으며 모습이 좋다. 원나라 침입으로 그 숫자가 줄어들었으나 최근 다시 늘어났다.’
이런 식으로 열 가지의 품종을 제시했고, 그중에는 아와지의 소도 있었다.
그러나 내용을 뜯어보면, 힘이 좋다, 몸집이 크다, 뛰어난 개체가 많이 나온다. 이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 내용을 다시 떠올려 봐도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소가 힘이 좋으니 당연히 농사에 쓰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가축으로 부적격이지 않은가 말이다.
헤이안 시대의 국풍, 그러니까 최초의 일본식 국뽕에 취해서 작성한 기록 따위는 쓸모가 없었다.
애초에 그 기록대로 하자고 한다면, 그 서문에 ‘동국의 말, 서국의 소’라는 대목부터 어긋날 일이기도 했다.
“하, 품종만 열 가지로 제시했으나, 결국은 한 가지를 이름이 아니던가. 힘이 좋다느니 몸집이 크다느니 하는 내용만 반복되고 있으니 실속이 없었네.”
“소야 크고 힘이 좋으면 그만이 아닙니까.”
“그럼 그 소를 다룰 사람은 동국에 얼마나 있나?”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으면 농우로는 쓸모가 있겠지. 하지만 지금 동국에 필요한 것은 농우가 아니라 사람을 잘 따르는, 순후한 품종의 소일세.”
“그렇다는 말씀은…….”
“조선의 소가 내가 원하는 바와 들어맞으니, 굳이 다섯 배의 대가를 제시해 가면서 들여오려는 것일세.”
이제 반론은 쑥 들어갔다. 아무리 국뽕이 좋아도 더 나은 게 해외에 있는 이상, 그걸 가져다 쓰는 게 낫다고 본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유성룡이 답변을 가져왔다.
“아국의 조정에서도 공방의 제안을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섯 배는 지나친 폭리를 취하는 것이니, 적정한 가격을 맞춰드리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역시 조선은 대국이라 할 만하군.”
그간 다져놓은 우호가 이럴 때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며, 나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 공방과 사전에 협의해야 할 내용이 좀 있습니다.”
“말씀하시게.”
“반드시 조선의 소여야만 하는 것입니까?”
이때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지만, 나는 그저 기분 좋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네. 조선의 소가 품성이 온후하다 하니, 지금 동국의 재건에 알맞지 않겠나.”
“공방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건 조선 소의 특질로 봐도 되겠지요?”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겠나?”
내 말을 들은 유성룡은 아주 참신하고도 기특한, 그러나 결코 편하게 들을 수는 없는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 역시 특허와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 들은 순간, 나는 웃음을 그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중에는 품종에 관한 지적 재산권도 확립이 되기는 하지만, 그걸 벌써 들이민다고?
“맞는, 말일세.”
그러나 앞으로의 구상을 생각하면, 허튼 소리 말라고 일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아국의 조정에서는 조선의 소에 관한 특별한 지정과 그에 관한 사용료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조선에 호랑이가 확 줄었다더니, 그게 전부 조정에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내가 호랑이를 키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