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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176화 (176/225)

176화 악연의 끝(12)

하시바군은 아침 일찍부터 행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당연히 이쪽에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곱게 물러나서 태세를 갖추게 해줄 수는 없었기에, 나는 조선 군관을 호출했다.

“윤흥신 만호.”

한극함과 같이 온 장수였는데,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까지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병력을 움직이고, 성실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굳이 목줄을 움켜쥐면서 휘두를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그를 동맹이 파견한 응원군의 장수로 대했다.

“부르셨습니까?”

“자네가 조선의 기갑사들을 이끌고 적을 좀 괴롭혀주었으면 하네.”

“분부대로 하지요.”

윤흥신 만호가 이끄는 조선 기병이 북쪽으로 출격했다. 그들은 멀리 돌아서 강을 건넌 뒤, 하시바군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견제할 터였다.

“그리고 우리도 슬슬 움직이도록 하지.”

어느새 하시바군은 영채를 전부 뽑고, 이쪽을 경계하며 멀어지고 있었다.

“아직 하시바군에는 도이(刀伊)가 남아 있다. 습격에 대비하며 신중하게 도강하도록.”

비록 사가미 강이 개천에 가까운 수심이라고는 해도, 건너는 중에 공격당하는 사태는 피하는 편이 나았다.

병사들이 무릎이나 허리까지 물에 잠겨 있는 동안, 그 덩치 큰 여진 군마를 탄 기병이 달려들면 답이 없을 테니까.

하시바 히데요시도 군략에 밝은 자인만큼, 가장 취약한 때를 노리고 있을 터였다. 지금 그가 물러나는 것도 결국은 이쪽의 약점이 드러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내 지시를 받은 병사들은 철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조심스럽게 물에 들어갔다.

과연 예상대로 야인 기병이 이쪽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처럼 그들이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그걸 본 혼다 마사노부가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했다.

“정말로 내응해올 생각인 모양입니다.”

“글쎄……. 그건 지켜봐야 알 일이지.”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허락해달라. 그게 내응 의사를 타진해온 야인들의 조건이었다.

이미 그들의 퇴로는 끊긴 지 오래였고, 타지에서 백골이 되기는 싫다는 이야기.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지만, 그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도 곤란했다.

- 우리 마을을 불태운 놈들이오!

- 제 남편을 죽였어요!

- 우리 딸을 저것들이, 크흐흑…….

도이, 그러니까 야인들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이러했다. 에미시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단순히 권력쟁탈전으로 끝날 일이었으면 몰라도 히데요시가 몽땅 긁어 모아다가 깽판을 친 이상, 밑에서 일했던 자들도 그간 있었던 일련의 사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잡아 족칠 수 있는 것을 그대로 살려서 보낸다? 동국 일대의 평정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고르기 힘든 선택지였다.

“내응을 한다고 해도 골치지. 궁지에 몰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하되, 저들 역시 살려서 보낼 수는 없네.”

“과연,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마사노부와 문답을 나누고 있는 동안, 도하가 끝났다. 그와 동시에 하시바군이 반전하여 접근하고 있었다.

“역시 우리가 강을 등지고 싸우기를 바랬던 모양이군.”

“사소한 유리함이라도 최대한 붙들어보겠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아군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잖나. 대군에 구구한 병법은 필요없다 하였으니, 그대로 힘 대 힘으로 맞붙으면 그만일세.”

*       *       *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는군.”

하데요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치를 떨었다.

이미 야인 부족의 족장들이 대놓고 태업을 하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 강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고작해야 전면에 밀어 넣고 소모를 유도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케이지로, 후군을 최대한 넓게 펼치라고 전해라.”

“넓게, 말씀이십니까?”

“그래. 앞에 세운 것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초승달 형태로 펼쳐서, 적 앞으로 몰아놓으란 말이다.”

난전이 벌어지는 중에는 깃발을 바꾸기도 어려운 법.

히데요시는 자신이 이끄는 본대 앞에 믿을 수 없는 병력을 둘 생각이었다. 언제든 수상한 낌새를 보인다면, 언제든 짓이겨버릴 수 있게.

예전 같으면 특유의 친화력을 내세워서 구슬리고 볼 일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그렇게 할 여유조차 없었다.

“조세이, 조세이는 어디 있나?”

“도토야 공은…….”

“아, 그랬군. 그렇다면 기요마사를 불러와라.”

“가토 공은 미노와 성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도토야 조세이는 만리타향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고, 가토 기요마사는 시나노에서 넘어올 고니시군을 차단하기 위해 요충지를 맡겨놓은 상태였다.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는 히데요시가 직접 정한 인선이었기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히데요시의 광증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문답은 행군 중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곤 했다.

도토야 조세이나 가토 기요마사 외에도 이시다 미츠나리의 이름도 나올 때가 종종 있었지만, 그 역시 이미 포로로 잡힌 지 오래였다.

“차라리 본대를 이끌고 미노와성으로 가는 게 어떻겠소?”

횡설수설하는 꼴을 보다 못한 마에다 토시이에가 그렇게 권하기도 했지만, 하시바 히데요시는 한사코 야전을 고집했다.

“성에 갇히면 그때야말로 끝장이야. 받아들일 수 없네.”

제안을 거부당한 토시이에는 군막을 물러나며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뚝 서 있어야 할 주장마저 저 모양이니, 죽을 수밖에 없겠군.”

그렇다고는 해도 마에다 토시이에 역시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들을 독살하는 데 찬성한 몸, 그도 갈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       *       *

다시 하루가 지나는 동안, 야인들의 우두머리인 나니의 속도 타들어갔다.

“정말 쿠보가 그렇게 말했다고?”

답신을 가져온 전령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로 내투하고 싶다면, 하시바 히데요시의 목을 가져와라. 그게 전령이 가져온 고니시 유키나가의 전언이었다.

“너무 조건이 까다롭지 않나. 왜 일을 굳이 어렵게 만들겠다는 거지?”

“우리의 악명이 너무 높아서, 그 정도의 공이 아니면 받아줄 수가 없답니다.”

“하……. 전쟁 중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단 말인가?”

그러나 이 거래 조건에서 갑은 고니시 유키나가였고, 나니와 그가 이끄는 야인 기병들은 을조차 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내일 싸우는 척하다가 곧바로 선회해서 하시바군의 본대를 친다.”

여기를 새로운 터전으로 삼을 수 있다면 몰라도, 그 꿈이 요원해진 이상 백골을 묻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니는 마음을 다잡았다.

과연 날이 밝자마자, 고니시군이 먼저 싸움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하시바군 본대는 이미 그들을 향해 창을 겨누고 있었고, 고니시군의 태도도 거기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젠장, 죽을지도 모르겠군. 모두 깃발을 내던지고 방향을 바꿔라!”

나니가 그렇게 지시하자, 야인 기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창끝을 하시바군으로 돌렸다.

“하시바 히데요시의 목을 가져와야 우리가 살아 돌아갈 수 있다. 돌격하라!”

전장에서 배신이 벌어지면 혼란이 일어날 법도 하건만, 오히려 분위기는 차분하게 돌아갔다. 모두가 예상한 사태였고, 이 자리에서 가장 궁지에 몰린 쪽은 하시바와 고니시 둘 중 하나가 아니라 가운데에 끼게 된 야인들이었다.

*       *       *

“꽤나 착실한 친구들이군요.”

카츠타케가 흥미롭다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글쎄……. 정말로 그랬다면 얌전히 고향에서 가축이나 치고 있었겠지.”

“그거야 저들이 선택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역시 무사 출신이라는 것인지, 카츠타케는 그들이 용병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왕이면 초원에서 남루하게 사는 것보다는 칼밥을 먹는 게 낫다는 것일까.

어쨌든 그런 것들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역시 도이 기병의 돌파력은 대단하군요. 벌써 하시바군 본대의 한복판을 파고들었습니다.”

“저들이 밥상을 차리고 있으니, 이제 가서 떠먹을 일만 남았군. 병력을 내보내게.”

“옛, 쿠보.”

나는 카츠타케의 출진을 허락했다. 아군이 아닌 생명은 모조리 섬멸할 것. 그게 유일한 사전 계획이었다.

아직도 구출해내지 못한 수만의 백성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신경 쓰다가는 되려 이쪽이 당하게 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저 현명하게 굴기를 바랄 밖에.

동국 다이묘들의 의용병을 앞세웠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그들과 합이 맞아준다면 살 수도 있을 거고, 그게 아니라면 죽을 수밖에 없겠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아군의 좌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선군은 적진의 측면을 빙글빙글 돌면서 압박했고, 경계할 방향이 많은 적은 주의가 산만해진 상태로 갈팡질팡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보니, 아군의 본대는 그대로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적진에 육박해갔다.

나니라고 했던가. 정말 뭐냐 싶은 이름의 여진 족장은 그래도 마지막 발버둥을 제법 효과적으로 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카츠타케가 부하들에게 호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가운데는 내버려두고, 좌우익부터 꺾어버려라. 혼란스러운 판에 뛰어들어봐야, 아군의 손해만 커질 뿐이다.

그리고 잠시 후, 과연 그가 지시한 대로 아군이 움직였다.

가뜩이나 사기가 떨어진 하시바군은 곧바로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기 시작했고, 히데요시의 친위부대만이 유일하게 저항하는 판이었다.

이미 나니가 먹기 좋게 요리를 해놓고 있었기에, 카츠타케가 점 하나만 찍으면 끝날 터였다.

다만 당장 그렇게 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었다.

“꽤나 잘 싸우는군.”

죽기를 각오한 자는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시킨다고 했던가. 지금 남아 있는 하시바군이 딱 그런 모양새였다.

“철포대를 준비시키게.”

“옛? 아직 도이들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들은 아군이 아닐세.”

납구슬의 향연에서 용케 살아난다면, 그땐 책임지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지. 그렇게 생각하며 철포대를 전면에 세웠다.

“사격 준비!”

구령을 외친 장수가 마지막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한 번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가 비로소 발사 명령을 내렸다.

“쏴라!”

전장에 콩 볶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고, 적진에서는 야인과 에미시, 하시바의 무사들을 막론하고 픽픽 쓰러져나갔다.

그렇게 한 차례의 일제 사격이 끝나자, 멀쩡하게 서 있는 자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 키가 작지만 잘 차려입은 무사가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살아남은 모양이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고도 모르겠나? 생포하려고 들면 피해가 커질 걸세. 다음 사격을 준비시키도록.”

카츠타케가 지휘를 맡은 의용대는 잔적을 좌우로 압박하며 막아섰다. 그리고 본대가 그 가운데로 재차 일제 사격을 가했다.

- 유-키-나-가-!

타다탕!

그 단말마가 하시바 히데요시의 유언이 되었고, 더 이상 저항하는 이는 없었다.

- 적장은 죽었다! 무익한 저항은 그만두고 항복하라!

드디어 기나긴 악연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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