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악연의 끝(11)
요시로는 히타치국 쿠지군(郡) 출신의 농부로, 하시바 히데요시의 징집령에 끌려나온 신세였다.
“제발 가족들만이라도 무사하면 좋으련만…….”
울부짖으며 매달리던 아내, 그게 요시로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살만해진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영주 나으리가 선정을 베풀고,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정도로 비쌌던 물건들이 싼 값에 나왔다.
생활이 나날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단지 땅이나 파먹다가 죽으면 끝나겠거니 하던 삶에 희망이란 것을 처음 가져 보았다.
그러던 것이 하시바 히데요시라는 무사가 등장하면서 모조리 깨져 버렸다.
주변 마을이 약탈당하는 가운데, 요시로가 살던 마을의 촌주는 발 빠르게 백기를 내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운이 좋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징집징발령이 떨어지고, 요시로는 모든 재산을 빼앗긴 채 하시바군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지금 여기에 끌려온 사내들은 모두 그와 같은 처지였다.
일단 병졸 취급을 받기는 했지만, 몽둥이 하나조차 받지 못한 신세. 문자 그대로 적수공권인 그들은 불안감에 떨며 앞날을 걱정했다.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수 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그 쿠보란 말이오. 우린 죽게 될 거요!”
“쉿, 저기 에미시가 오고 있소.”
감시자가 지나가면 죽은 듯이 있다가, 다시 눈치를 봐 가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식 들었소? 어제 옆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탈출했다고 하던데…….”
“발각되지 않았나? 군문에 매달려 있던 시체가 바로 그들일세!”
오늘 본 얼굴이 내일이면 사라져 있는 경우는 제법 흔했다.
탈출을 시도한 사람의 운이 좋다면 그대로 끝이었지만, 붙잡혔을 때는 모두 탈영병 취급으로 목이 매달리고 말았다.
게다가 사람들을 좁은 공간에 밀어 넣으면서 전염병마저 돌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살아남을 가망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앞날을 두고 불안해하는 가운데, 요시로는 눈에 띄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외모가 특징적이지는 않았지만, 초연한 듯한 태도는 시선을 잡아끄는 데가 있었다. 평소 같으면 무심코 넘겼을 터였지만, 그날따라 요시로는 홀린 듯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꽤 태연하시구려.”
“뭐,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길이 있다잖소.”
“이런 지경에서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가능성밖에 없는 판국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절망 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 사내의 태도는 달랐다.
“죽어 버렸으면 몰라도, 살아 있는 이상 기회는 얼마든지 붙잡을 수 있는 거요.”
끌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불과 하루 만에 픽 쓰러져서 죽어 버리고 말았다.
한번 죽음을 본 이후, 요시로는 비슷한 말을 들을 때마다 비웃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비웃음을 내보이는 대신, 무심코 사내에게 누구인가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단조, 야마다 마을에서 온 단조요.”
사내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날씨가 흐린데다가 오늘은 그믐이기도 하니, 잠들지 않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 거요.”
그렇게만 말하고는 곧바로 누워서 잠들어버렸다.
이들에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감시가 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재수 없게 작업에 불려나가지만 않으면 막사에서 뭘 하고 있든 신경 쓰는 일은 없었고, 지금 이 사내처럼 잠을 자도 마찬가지였다.
“허, 배짱도 좋은 친구군.”
요시로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내심 그의 말을 믿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끌려온 이후로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많으니, 시키는 대로 해도 나쁠 건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날 밤, 정말로 좋은 일이 일어났다.
“부, 불이야!”
사람들을 한데 모아 놓으면 온갖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일어난 화재도 그럴 터였다. 요시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단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금이 기회요. 벗어나고 싶다면 바가지를 들고 나를 따라오시오.”
“무슨 수로…….”
“방법이 있소.”
그렇게만 말하고는 휙 나가 버렸다. 뜬금없는 사건과 행동의 연속이었지만, 요시로는 단조를 믿어 보기로 했다.
요시로 말고도 많은 이들이 행동을 같이 했고, 같은 막사를 쓰던 사람 대부분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다가 장수 하나가 그들과 마주쳤다.
“무슨 일이냐?”
“불을 끌 수 있게 물을 떠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비켜 주십시오.”
단조가 공손하고도 빠른 어조로 그렇게 둘러댔다.
어느새 불길은 커져 있었고 그걸 끄러 간다는 말은 합리적이었기에, 무사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길을 비켰다.
그런데 요시로가 생각하기에, 지금 그들이 가는 방향은 도저히 탈출하기가 마땅치 않은 쪽이었다.
“이보시오, 단조 씨. 지금 바닷가로 가는 거 아니오?”
“그렇소.”
“무슨 수로…….”
고니시군과 대치 중인 강가라면 몰라도, 바닷가라니. 탈출은 불가능할 터였다. 방금 마주친 무사가 길을 열어 준 까닭도 그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단조는 태연하게 대꾸하기만 했다.
“벗어나고 싶다면 잠자코 따라오기나 하시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둘러댈 말은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불을 끄기 위해 나온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요시로는 입을 닫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도 비슷했다.
그렇게 탈주자들이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고니시군의 깃발을 내건 나룻배가 홀연히 나타났다.
“저, 정말…….”
“어서 탑시다!”
사람들은 황급히 나룻배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나룻배에 타고 있는 병사들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단조.”
“네, 우리가 단조 씨와 같이 나온 사람들입니다. 단조 씨는 곧 올 겁니다.”
요시로가 황급히 그들에게 답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단조.”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태워달란 말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탈주자들의 마음만큼은 천추가 지나고 있었다. 그때 단조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단조.”
“이치로.”
고니시군 병사들의 말은 단조라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정해진 신호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단조가 올바른 답을 내놓자, 병사들은 무기를 거두고 사람들이 배에 오르는 것을 허용했다.
요시로는 한숨 돌린 뒤,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미 바닷가는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을 태우러 나온 나룻배들도 많이 나와 있었다.
“대체……?”
단조는 누구란 말인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탈출시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 의문에 아무도 답해 주지 않았고, 요시로가 탄 나룻배는 바다 한복판으로 미끄러져 갔다.
* * *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시바 히데요시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밤중에 불이 났을 때, 그는 양동 작전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경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실제로 불길이 거세지는 동시에 북쪽에서 조선에서 온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히데요시는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유인계에 지나지 않았다. 적의 목적은 최대한 많은 백성들을 탈출시키는 것이었다.
징집한 백성들 중에서 무려 사십만이나 탈영하고 말았다. 이미 죽어 나자빠진 숫자도 적지 않았고, 이제 남은 숫자는 사만 내지는 오만 정도에 불과했다.
단순히 양적으로만 계산하면 여전히 적지 않은 숫자였지만, 전력상의 의미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산이 거기까지 닿은 히데요시는 눈이 뒤집힌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바다 쪽의 경계를 맡았던 놈들은 모조리 참수해버려라!”
“주, 주군…….”
“명령이다! 당장 목을 베어 오란 말이다!”
히데요시의 분노는 탈영병에게 길을 열어주었던 장수들에게 향했다.
“내 말이 들리지가 않는 것이냐!”
결국 남쪽 경계를 맡았던 무사 다섯이 참수를 당하고 나서야 히데요시의 분도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미 병사들의 사기는 푹 꺾여 있었고, 고기방패의 숫자도 턱없이 모자란 상태였다.
“우리도 슬슬 몸을 빼야…….”
“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미 고향으로 갈 길은 끊겼는데.”
그 사납다는 에미시와 야인들조차 눈치만 살필 뿐, 예전의 날카로운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쿠보라는 자에게 접촉을 하면 다시 길이 열리지 않겠나?”
“그래, 예물을 가져간다면 더욱 좋겠군!”
“뭐라고? 배신이다!”
마음이 맞은 족장들 몇몇이 은밀하게 의논을 벌이다가 걸리면서, 진중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적과 내통을 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에미시와 야인들조차 등을 돌릴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히데요시의 마음도 다급해졌다.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기에, 이제는 무조건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아야만 했다.
“내일, 전군을 뒤로 물릴 것이다.”
* * *
“하시바 히데요시가 후퇴를 선언했다고?”
내응을 약속한 야인 부족 중 하나가 사람을 보내서 알린 내용이었다.
“그렇습니다, 쿠보.”
“다른 말은 없던가?”
“전군을 뒤로 물리겠다. 그 한 마디만 했습니다.”
이미 다른 부족들에게도 전해들은 이야기였고, 모든 내용이 일치했다. 더 알아낼 것은 없었기에, 질문을 더 하는 대신 은화를 한 움쿰 쥐어 주었다.
전령이 나간 뒤,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아들인 히사미치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병력을 뒤로 물린다는 건, 결국 도망치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건 아닐 거라고 보네.”
그러나 시마 카츠타케는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거지.”
“그렇게 보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히데요시, 그자는 이미 천하의 공적이 되었네. 간다면 어디로 가겠나?”
카츠타케의 말을 들은 히사미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내 생각도 카츠타케의 판단과 일치했다. 그는 갈 곳이 없고, 마지막 역전의 기회는 내 목을 가져가는 것 하나뿐일 터였다.
하지만 역시 강을 끼고 대치하는 상황이다. 선공을 가하는 쪽이 쉽게 지치는 만큼, 히데요시의 전략은 ‘니가와’에 가까웠다.
배수진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되면서 강을 등 뒤에 두면 더 잘 싸울 거라는 편견이 있지만, 병법의 상도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나 역시 사콘의 생각과 같네.”
“그렇다면 추격은…….”
“추격이 아니라 결전이 되겠지.”
그리고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패면 충분히 쫓아가서 뚝배기를 깨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의용군의 재편은 어떻게 되고 있나?”
“사십만 중에서 십만이 싸우겠노라고 나서고 있습니다.”
구출한 백성들은 각각 출신지의 다이묘에게 맡겼다.
그들 중 대부분은 병사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일부는 아군을 도와 복수하고 싶다고 했다.
“남은 무기는 얼마나 되나?”
“창칼이 족히 일만을 더 무장시킬 만합니다.”
“그렇다면 십만 중에서 일만을 선별해서 부대를 편성하도록.”
굳이 십만 전부를 총알받이로 세울 수는 없었다. 의미도 없거니와 무익한 사망자는 절대적인 손해일 터였다.
그리고 새로 편성할 부대에도 별 기대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맞붙기보다는 측면에서 압박하게 배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세부적인 사항의 조율이 끝난 뒤, 나는 내일 어떻게 싸울지를 정했다.
“적이 물러나는 거리를 잘 살펴서, 하루치만큼의 거리를 두고 쫓아가도록 하지.”
그리고 아군이 전부 사가미 강을 건너면, 그때는 추격을 개시한다. 그게 내 방침이었고, 이견은 나오지 않았다.
“내일은 결전의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