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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174화 (174/225)

174화 악연의 끝(10)

내가 직접 간토 탈환에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행동으로 보여주기. 조약에 가입한 다이묘들은 그 내용대로 보호를 받을 것이다. 이 부분을 확신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오다와라 성에 도착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호조 우지마사, 지금까지 버텨낸 두 사람과 합류했다.

“미카와노카미(三河守 종5위하 삼하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관위), 그간 수고가 많았소.”

“스모토의 군 봉행이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꽤 현명하게 처신했다. 하시바 히데요시의 세 갈래 군세가 동국 전역을 휩쓰는 동안, 그는 단자와 산의 인광산을 필사적으로 지켰다.

밀무역을 벌인 베르나르두를 잡아 족치면서, 하시바군이 새로 화약을 획득할 수단은 사라진 상태.

간토 지역으로 나온 가토 기요마사는 이쪽의 공략을 우선시했으나, 이에야스가 그걸 막아낸 것이다.

나는 이에야스를 칭찬한 뒤, 호조 우지마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호조 공의 힘도 적지 않았다 들었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외다.”

“저야말로 조약에 가입한 자로서 책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물론 호조 우지마사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진작에 내빼버린 이복동생 우지히데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영지를 굳건하게 지키면서 도쿠가와군과 합동으로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자기 부친만큼 역량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우지마사는 우직한 면모가 있는 자였다. 그게 지금의 그를 돋보이게 했다.

인사를 끝낸 뒤, 나는 곧바로 지도를 펼치게 하고 그간 있었던 변화를 갱신시켰다.

“일진일퇴인가.”

한극함은 처음에 잘하는가 싶었다.

무사시국(오늘날의 도쿄도에 해당하는 지역) 일대를 약탈하던 야인들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역시 조선군이라고 생각했다.

그쪽에 가토 기요사마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요소들의 차이가 상당하니 괜찮으리라고 판단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원래의 역사처럼 가토 기요마사의 꾀에 넘어가 패배하고, 끝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우지히데, 그 녀석이 줄기차게 원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치요다 성은 성주가 도망친 상태에서도 지금까지 함락되지 않았소.”

배후를 유린해 줘야 할 한극함이 죽어 버렸으니, 하시바군의 공세도 더욱 거세질 터였다.

그나마 조선에서 온 기갑사들의 반은 여기 남아 있으니, 아직 기병 세력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 치요다 성의 전략적 가치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 굳이 원군을 보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우지히데, 그자는 좀 결사항전이라는 걸 경험할 필요도 있겠지.

내가 그런 취지로 답을 주자, 나머지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시나노 전선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니, 저쪽도 모처럼 모인 병력을 다시 나눠야 할 것이오.”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지도상에 놓인 표식들을 바꾸었다.

치요다 성에 있던 ‘韓(한)’자가 놓인 말 모양 표식은 들어서 치우고, 역시 시나노 전선의 ‘藤(등, 도도 다카도라의 첫 글자)’자 표식도 내려놓았다.

그리고 ‘李(이)’는 조금 전진시켜, 아사마 산 아래로 옮겼다.

“단순히 길이 열린 그 자체만으로도 경계할 병력을 나누어야 할 테니 말이외다.”

시나노 전선을 맡겼던 이순신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단순히 전선만 지켜도 그만인 상황에서, 도도 다카도라를 박살냈다. 오천의 병력만으로 요해처를 지키는 적을 뚫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기책을 쓸 필요가 없소. 이곳 오다와라에서 하치오지(八王子 팔왕자)를 넘어, 그대로 간토로 진격할 생각이오.”

전체적인 숫자는 대등한 상황이다. 그리고 후방의 원군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절대적으로 이쪽의 우세였다.

지리적 요인도 이쪽이 훨씬 유리했다. 자신의 영지를 빼앗긴 다이묘들이 앞 다퉈 척후를 자처하고 있었고, 그들의 의욕도 상당히 높았다.

원래부터 고니시군이었던 일만에, 간토 지역 다이묘들이 결성한 의용병이 일만, 그리고 조선 기병 일천과 도쿠가와군 삼천. 이 정도 숫자면 하시바군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방침을 정하고 있는데, 척후로 나간 병사가 보고를 올렸다.

“쿠보,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끄는 적의 본대가 오다와라 성으로 오고 있습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수순이었다. 이제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남은 방법이란 단 하나일 터였고, 그걸 실행하자면 이리로 와야만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쳐 있었던 모양이었다.

*       *       *

하시바 히데요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직접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군을 몰아 츠루가오카로 내려왔다.

비록 치요다 성의 조선군을 박살냈다고는 하나, 돌아가는 상황은 그가 현재의 세력을 유지하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점령지를 현지의 토착 무사들에게 맡기고 회유했다고는 하나, 진짜 주인과 그 후계자는 죄다 나니와쿄에 있었기에 명분이라는 측면에서 불리했다.

히데요시 본인이 느끼는 고니시군의 장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상륙을 통한 습격이었고, 그의 직할 병력만 가지고 간토와 오슈 전역을 지키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도 있었다.

결코 장기전은 그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가 떠올린 구체적인 수단은 차라리 광기에 가까웠다.

“식량이란 식량은 모조리 쓸어 담고, 사내는 전부 징집하라. 무기가 없어도 상관없다. 맨 몸으로 전장에 세워도 좋으니, 모조리 끌어와라! 무기를 만들 쇠붙이도 몽땅 가져오도록.”

하시바 히데요시는 자신이 점령한 지역 전체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사실 국력 전부를 기울여 싸우는 세련된 형태라기보다는 쓸 수 있는 자원을 죄다 박박 긁어모으는 형식에 가까웠지만.

“미, 미친!”

“하, 하시바 공. 그렇게 하면 민심이 흉흉해질 거요!”

“재고해 주시지요.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고 해도 그래서는 곤란합니다.”

마에다 토시이에조차도 기겁해서 만류하고, 휘하 무사들 역시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방침이었다.

소출의 칠 할을 요구하면 꽤 관대한 편이며 대개는 팔 할을 가져가는 무사들이라고는 해도, 몽땅 긁어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발상일 터였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태도는 완고하기만 했다.

“백성이란 쥐어짜면 쥐어짤수록 더 많은 것을 내놓게 마련이다. 농공상, 삼민은 모두 사를 위한 것이니, 모든 것을 바치라고 해라!”

모든 마을이 순순히 그 명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시바군에는 이런 경우에 아주 특화된 병종도 존재했다.

“하시바 공의 허락이 떨어졌다. 모조리 약탈하고 불을 질러라!”

“튀어나온 놈들은 모조리 잡아라. 불 속에서 죽을 독종은 필요가 없다!”

아직 잔존한 야인들이 히데요시의 명을 따르지 않은 지역을 약탈했다.

뒤늦게 후회한 토착 무사들이 황급히 창칼을 들고 맞섰지만, 산발적인 움직임은 고스란히 각개격파로 이어졌다.

“하시바 공은 비천한 처지로 올라서서 우리 마음을 잘 알아줄 거라더니…….”

고니시 유키나가도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졌지만, 사실 백성들에게는 하시바 히데요시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선 인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어디까지나 점령지를 안정시키기 위한 선전 수단에 불과했고, 히데요시가 본색을 드러내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군량으로 쓸 미곡 백만 석에 기타 잡식도 백만 석입니다. 장류도 적지 않게 끌어 모을 수 있었고, 긁어모은 고철만 해도 족히 팔만 근을 넘길 겁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적군?”

“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악착같이 달려드는 통에, 건져내지 못한 물자가 상당해서…….”

이미 끝나버린 일을 어찌할 수는 없는 법. 히데요시는 혀를 한번 차고는 징집한 병력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래, 병사들은 얼마나 모았나?”

옷가지까지 몽땅 빼앗기고 맨몸인 자들을 전투력 취급하는 것은 어폐가 상당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히데요시가 보기에는 그들도 훌륭한 고기방패였다.

물자를 셈하던 무사는 우두머리의 질문에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 그것이, 오십만으로 추정됩니다.”

“오십만, 추정?”

“어찌어찌 모아 오기는 했지만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에 이르는 자들이 탈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유 없이 쓰러지는 자들도 적지 않은지라…….”

“됐다. 대의를 이해하지 못할 자들도 어떻게든 써먹을 길이 있게 마련이지.”

히데요시는 빙긋 웃고는 물자 담당 관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렇게 덩치를 불린 하시바군은 사가미 강을 끼고 고니시군과 대치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전군을 몰고 왔다고 해도, 정작 도착해서는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기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다. 죽기로 싸워서 그놈만 거꾸러뜨리면, 회천도 꿈은 아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끝없는 소모전일 수밖에 없었다.

*       *       *

“오십만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초라할 줄은 몰랐습니다, 쿠보.”

“저들이 원해서 저기 있는 게 아니잖나.”

시마 카츠타케가 질린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눈앞의 광경에 질릴 것 같은 기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 정도쯤 되고 보면, 광경이 光景이 아니라 미쳤다는 의미로 狂景이라는 새로운 한자 조합이 훨씬 어울릴 것 같았다.

하시바군의 규모는 분명 전무후무한 대군임에는 틀림없었다. 사람만 바글바글한 중원 대륙이면 또 몰라도, 최소한 이 일본땅에서는 그럴 터였다.

그러나 적절한 수단으로 쌓아올린, 제대로 된 전력이 결코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갑주를 제대로 갖춰 입은 자들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나머지는 사실상 거지 떼나 다름없지.”

“하지만 그 거지 떼조차도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을 겁니다.”

그 혼다 마사노부조차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백성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태도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세에 지옥도를 펼쳐낸 하시바 히데요시는 정말 사람새끼가 아니라는 게 맞겠지만.

“마, 말도 안 됩니다!”

“원숭이 새끼가 감히……!”

하물며 오슈와 간토에 영지를 두고 있었던 무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눈앞의 거지 떼는 결국 그들의 영민이 아니던가.

땅만큼이나 중요한 게 노동력인 만큼, 그들의 눈이 뒤집히는 것도 당연했다.

“쿠보, 소생이 앞장서겠습니다!”

“제게 선봉을 맡겨 주십시오!”

“이 악행을 두고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싸우는 것이야말로 하시바 히데요시가 원하는 것일 터, 나는 일단 그들을 만류했다.

“진정들 하시게. 이대로는 히데요시, 그자가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갈 뿐이니.”

“어찌 진정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시바 히데요시가 대책 없이 덩치만 불렸으니, 오히려 좋은 계책이 있네.”

적의 실질적인 전력은 고작해야 이만에서 삼만 언저리에 불과하다. 그들이 오십만 가량을 통제하려면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저 불쌍한 생명들은 살려 놔야 하지 않겠나. 이미 간자들이 적진에 들어갔으니, 좋은 소식이 올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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