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악연의 끝(9)
“갑사라……. 정말 조선의 갑사들이 나타났다고 했나?”
“그, 그렇습니다, 가토 공.”
센소지 일대에서 일어난 일은 곧바로 가토 기요마사에게 전해졌다.
처음에는 그도 뜬금없이 조선군이 나타났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지만, 잠깐의 고민 끝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조세이가 조선의 국경에서 계책을 걸었으니, 그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이 시점에서 조선군이 온 이유는 중요하지 않을 터였다. 그보다는 저들의 전력이 어떻게 되며, 어떤 식으로 상대해야 할 것인가가 더 중요했다.
도토야 조세이의 죽음은 가토 기요마사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그는 단순히 충직한 돌격대장 노릇을 하기 보다는 조금 더 머리를 굴려보는 습관을 들인 상태였다.
생각을 정리한 기요마사는 가까스로 살아나온 야인들 중 하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숫자는 얼마나 되더냐? 그리고 어느 방향에서 튀어나왔는지, 무장 상태는 어땠는지 상세하게 말해라.”
“족히 일천은 되는 듯했고, 센소지 남서쪽 방향에서 돌격해 왔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철포를 들고 있었습니다.”
“철포? 기병이 철포를 들어?”
하시바군 역시 기마 철포를 시도해 보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병에게 철포를 들려줘도, 전술적 이점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철포는 말 위에서 쓰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함이 많았고, 한번 사격한 뒤에는 사실상 쇠몽둥이 하나를 더 들고 있는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차라리 여진 군마의 덩치를 이용해, 거대한 충격량을 살리는 편이 더 낫다고 본 것이다.
조세이가 울라부의 전술에 관한 내용을 전할 수 있었다면 또 모를 일이었으나, 그 소식은 끝내 하시바군에 전해지지 않았다.
“폭음이 울리고 사람들이 쓰러졌으니 철포일 것입니다.”
“조선군이 몇 번이나 철포를 쏘았나?”
질문을 받은 야인은 공포 속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 그게……. 콩을 볶는 듯한 소리가 요란했으니, 제법 많이 쏘지 않았는…….”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철포라는 물건은 재장전에 꽤 긴 시간이 걸린다. 일천 명이 동시에 쏘았다면, 당연히 요란했겠지. 그 요란함이 몇 번 있었느냐는 이야기다.”
“하, 한 번이었을 겁니다.”
“한 번?”
그렇다면 최초의 일제사격으로 충격을 준 다음, 돌격으로 이쪽을 깨부순 것이 아닌가.
가토 기요마사는 현장에 없었지만, 이 문답만으로 얼추 사실에 접근해 냈다.
그는 자신의 심증을 마저 확인하기 위해,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처에 탄이 박힌 자들이 있나? 뽑아낸 것을 좀 봐야겠다.”
기요마사의 지시가 떨어지자, 병졸 하나가 방금 상처에서 꺼낸 납구슬 하나를 내밀었다.
보통의 철포에 쓰이는 탄보다 작은 크기. 기요마사는 전장에서 이런 것들을 종종 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
* * *
평소에는 호조 우지히데가 제공한 유녀들을 끼고 술판을 벌이다가, 적이 나타나면 출격해서 무찌르고 돌아온다.
이게 한극함의 일상이었다.
조선에서는 아무리 도성에서 멀리 나온 국경의 장수라고 해도, 이렇게 방탕해 지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조정의 간관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기회가 있다 싶으면 물고 뜯는 풍토도 강했고, 다른 동료 군관들의 눈치 때문에라도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어차피 당장 그가 맡은 임무는 호조 우지히데를 도와 천대(千代, 치요다) 성 일대를 지키는 것이었고, 아직 고니시 유키나가의 본대는 이제 겨우 미장(尾張, 오와리)를 지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여유로울 때야말로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실컷 누릴 기회가 아닌가.
한극함은 그렇게 자신의 행태를 합리화하며, 주지육림에 푹 빠져 살았다.
“조선에서 오신 영웅을 위하여, 간빠이!”
“간빠이!!!”
우지히데는 자신의 실책을 덮기 위해 더더욱 조선의 장수를 추켜올렸고, 무시무시한 야인을 격파한 그의 전공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런 분위기에 흠뻑 젖어든 한극함은 한껏 기고만장 해져 있었다.
“거기, 한 잔 더 따라 보거라. 옳지, 옳지.”
지금도 아직 이빨을 검게 칠하지 않은 어린 유녀를 끼고,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던 차였다.
그때 전령이 황급히 다가와, 바깥의 소식을 전했다.
“저, 적이 쳐들어왔습니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야인들을 이끌고 곧장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야말로 간토를 휩쓴 장본인이었고, 그가 직접 나섰다는 소식에 우지히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러다가 한극함을 보고는 매달리는 듯한 표정으로 애걸했다.
“자, 장군!”
“그깟 야인 놈들, 몇이나 오든 다 상대해 주지!”
이번에도 조선에서 온 장수는 호기롭게 말 위에 올랐다.
하시바의 깃발을 내걸고 있는 야인들은 우지히데의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쳐라!”
“조, 조선군이다! 도망쳐!”
그러나 이번에는 야인들도 조선군을 보고 미련 없이 달아났다. 만약 예전의 경원부사 한극함이었다면, 대번에 의심부터 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조선에서 온 영웅이자 도이의 파괴자였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야인들이 달아난다, 추격하라!”
사건이 터지려고 하면, 가끔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될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한극함과 그가 이끄는 조선 기병들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들은 사용한 나팔총을 장전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미친 듯이 야인들을 뒤쫓았다.
그러나 한 굽이를 돌았을 때, 한극함은 매복과 마주해야 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아니…….”
이미 사방이 포위되어 있었고, 기요마사가 이끄는 병력은 전신에 무명을 덕지덕지 바르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한극함 본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뿔싸! 내가 너무 방심했구나!”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고, 한극함이 무사히 몸을 빼낼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오랑캐에게 포로로 잡힐 수는 없지. 최대한 혈로를 뚫어 달아난다!”
조선의 기병들은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짚어 돌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살아나온 자들은 극히 드물었고, 그중에 한극함은 없었다.
* * *
“이순신?”
“그런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왔다 들었는데…….”
도도 다카도라는 닌자들로부터 적정을 보고받은 후, 상대측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국인이 여길 맡았다면, 대체 얼마나 유능하기에 그 쿠보가 직접 내세웠단 말인가?”
다카도라는 다시 닌자들에게 상세한 정보를 알아오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새로운 이야기는 다카도라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부, 분명 그렇다고 했습니다.”
실책을 저지른 장수가 유배 대신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파견된 것이라 했다. 사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세간의 소문은 그런 식으로 퍼져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다. 다시 캐봐라.”
그러나 그들이 조선에 직접 건너가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가져올 수 있는 정보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시를 받은 닌자들은 원군으로 파견된 조선의 병사들에게도 접근했지만, 비슷한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다.
“대체 나를 얼마나 무시하기에!”
쿵. 분을 참지 못한 다카도라는 탁자를 내리쳤다.
그도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정도는 대강 알고 있었다.
아자이에서 오다, 오다에서 하시바. 그 과정도 깔끔하다고 보기는 곤란했다.
다른 가신들과 다투거나, 혹은 봉록을 높여 받기 위한 행동이 남들에게 곱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번에도 적당히 싸우다가 항복할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아주 맥없이 백기를 드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에, 최대한 싸우는 데까지는 싸워볼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가 이렇게까지 그를 무시한다면, 다카도라 스스로도 분기가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척후를 세 배로 늘려라! 반드시 적의 빈틈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 만들어 놓고 말겠다. 그렇게 다짐한 다카도라는 칼을 갈며 일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원하던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적 병력이 줄어들었다고?”
“그렇습니다. 오천에 달하던 고니시군이 지금은 이천도 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모를 일이니 다시 살펴봐라.”
척후들이 가져온 소식은 모두 같았다.
대치중인 고니시군의 숫자가 줄었다는 것. 이제 다카도라가 이끄는 병력이 저쪽의 두 배를 웃돌 지경이었다.
“혹시 함정이 아니겠소이까?”
다카도라의 행동을 지켜보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감군의 자격으로 나섰다.
지금 그들의 역할은 고니시군이 시나노를 넘어 간토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 걸로 충분하다. 미츠나리의 주장은 그랬다.
그러나 다카도라는 자신의 전공을 최대한 키우고자 하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이시다 공. 공이야말로 잘 생각해 보시오. 이곳은 양군이 모두 외면하는 자리지만, 그만큼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도 있는 거요. 병법에도 출기불의라 하지 않았소이까.”
상대가 의도치 못한 곳으로 병력을 내라. 일본의 무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격언이기도 했다.
게다가 가토 기요마사의 승전보도 다카도라의 생각에 한몫 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제대로 파견한 원군도 가토 공에게 박살이 났소이다. 하물며 유배 대신 끌려온 자라면 더 볼 필요도 없을 거요!”
지지부진한 시나노 전선을 돌파하고 기요스 성에 군기를 꽂을 수 있다면, 세상은 도도 다카도라라는 이름을 다시 평가하리라. 그런 욕망에 휩싸여 있기는 했으나, 그가 내놓은 계책도 실현 가능성은 제법 높았다.
“생각해 보시오. 지금 많은 무사들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눈치만 보고 있소이다. 그러나 기요스 성에 우리의 깃발이 휘날리면, 그 생각이 어떻게 바뀌겠소이까?”
“흠…….”
이시다 미츠나리가 보기에도 확실히 일발역전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요스 성을 지킬 수는 없을 거요.”
“누가 아주 점령한다고 했소? 우리의 의지를 보이고, 무사들의 생각을 바꿔 놓자는 이야기요.”
그리고 여의치 못하면 다시 물러나서 이곳을 지키면 그만이다. 다카도라가 그렇게 설득하자, 미츠나리도 완전히 넘어오고 말았다.
“좋소. 하지만 후퇴에 관한 결정권은 내가 갖고 있겠소이다.”
“그리 하시오.”
다카도라도 자신이 승기에 취할 수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신중한 미츠나리라면 충분히 물러설 때를 가늠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메츠케로 붙은 장수의 말에 선뜻 동의했다.
그리고 시일이 흘러 그믐날 밤, 도도 다카도라가 이끄는 하시바군은 조용히 적진으로 쳐들어갔다.
적이 하나라도 도망쳐서 이쪽의 소식을 알리면 곤란했기에, 최대한 궤멸시킬 수 있는 시간대를 고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목책을 넘은 직후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딸랑딸랑……. 쾅!
“무, 무슨 일이냐!”
방울소리에 이어서 느닷없이 폭발음이 울려 퍼지고, 갑자기 하늘에 밝은 불꽃이 수놓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방에서 고니시군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는 이미 이 공의 함정에 빠졌다!”
“도도 다카도라는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자신이 역으로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다카도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 전의도 계곡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고니시군의 모습에 꺾이고 말았다.
“저, 저게 고작 이천이라고?”
족히 오천은 될 터였다. 애초에 적은 숫자를 줄이지 않았다. 거기가지 생각이 닿은 다카도라는 자신의 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당했군. 항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