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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172화 (172/225)

172화 악연의 끝(8)

‘石田(석전, 이시다)’라고 적힌 표식은 시나노로 옮겨졌다. 그리고 간토 동부에 있던‘加藤(가등, 가토)’의 표식이 들어내진 뒤, ‘羽柴(우시, 하시바)’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새로 나온 적장의 이름이 도도 다카도라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쿠보.”

“그럼 저 이시다를 도도로 고치게.”

내가 그렇게 지시하자, 지도 위에 놓여진 표식이 바뀌었다. 그걸 본 시마 카츠타케가 질문해 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패전의 책임을 물어 견책된 것일 뿐으로 보입니다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그렇다 해도 제대로 표시해 두는 게 좋지 않겠나.”

도도 다카도라는 아직 유명한 무사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철새 같은 행보로는 나름 이름이 알려졌지만, 실력에 관해서는 그다지 고평가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어쨌든 그와 도도 가문 역시 전국시대의 마지막 승자 중 하나라는 것을 아는 이상, 섣불리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혹여 위험한 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글쎄, 소문대로라면 벌써 창을 거꾸로 쥐었을 자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잖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과연…….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도도 다카도라의 실력을 의심했던 카츠타케도 내 말을 듣고 금세 수긍했다.

그 역시 전국시대 기준으로 문무를 겸비한 무사였고, 미심쩍은 부분을 경계할 줄 아는 지장의 면모도 있었다.

“군 봉행의 진언대로 하는 게 낫겠군. 괜히 협곡을 돌파해서 손해를 키울 필요는 없지.”

마츠나가 히사히데도 도도 다카도라와 몇 차례 맞붙었다고 했다. 그러나 상대는 돌파를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고, 히사히데 역시 굳이 무리해서 뚫을 생각은 없는 모양새였다.

- 시나노국은 지키기는 쉬워도 빼앗기는 어려운 땅이외다. 우리도 여기에 일부만 남겨서 지키게 하고, 간토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히사히데가 보낸 서신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그의 주장은 아주 합리적이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스루가를 넘어 간토로 진격하는 게 좋겠지.”

반론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전체적인 세력의 규모 차이가 상당한 만큼, 이쪽은 굳이 무리해서 각개격파를 당해 줄 이유가 없었다.

이제 다음으로 정할 일은 누굴 어디로 보내느냐였다.

“군 봉행은 이제 쉬고 싶다고 하더군. 계속 시나노 방면을 맡기기는 곤란하겠는데, 누가 가는 게 좋겠나?”

그도 이제는 고희를 넘겨서 팔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대로의 수명보다도 이십을 더 살았지만, 그렇다 해도 사실 언제 갈지 모르는 나이일 터였다.

만약 내가 대리를 맡기지 않았다면 몰라도, 오늘내일할 수도 있는 노인을 계속 부려먹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같이 간 야규 무네요시는 아직 더 써먹어야겠지만.

내 생각을 읽었는지, 혼다 마사노부가 냉큼 입을 열었다.

“야규 공이 가 있으니, 그냥 그에게 맡기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마사노부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히사히데와 같이 간 야규 무네요시를 남기는 것도 한 방법이긴 했다. 그러나 히사히데를 끌어오기 어려운 상황에서, 영악한 원숭이를 잡으려면 무네요시도 아까웠다. 그는 아직 히사히데에 비하면 한창 때일 터였다.

“히데요시를 잡으려면 이쪽도 전력을 기울여야 하네.”

“그렇다면 여기 시마 사콘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당연하지.”

“쿠보의 말씀대로라면 시코쿠간레이(四国管領 사국관령, 미요시 마사야스.)나 우마노키미(右馬頭 우마두, 모리 테루모토.)가 아니고서는 맡길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려면 조금 더 늦어질 터였다.

게다가 전공을 세울 기회나 손실이 크고 작을 가능성 같은 부차적인 요소까지 고려하면, 동맹에게 맡기는 건 그다지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다.

나는 지도상에 놓인 ‘藤堂(등당, 도도)’를 물끄러미 보았다.

사실 그 이름을 볼 때부터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정해 둔 바가 있었다. 다만 그는 객장 신분이라 섣불리 거론하기는 곤란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마사노부의 말대로 적절한 인선이 없다면, 물망에 올리기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여기 이 공에게 맡겨 보면 어떻겠나?”

내 말을 들은 참석자들이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이순신을 쳐다보았다.

“능력은 의심할 바가 없네. 그리고 기한이 지나면 떠날 사람이니, 차후에 생길 문제도 없겠지.”

“쿠보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장수와 책사들이 못 이기는 척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나노 방면은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된통 뒤집어쓰기 좋은 일감이었기에, 누구도 자원하려 하지도 않았고 일부러 지목해서 맡기기도 애매한 전선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파견 나온 장수라면 그러한 정치적 배려를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무엇보다도 이순신 본인이 맡겨진 임무를 방만하게 처리하지도 않을 거고.

“그럼 이 공, 자네에게 오천의 병력을 맡기겠네.”

돌파가 가능하면 돌파하되, 그렇지 않다면 경계에 힘써 넘어오지 못하게 막을 것. 그게 내가 이순신에게 부여한 임무였다.

그 역시 진중한 태도로 선선히 승낙했다.

“일개 객장에게 일을 맡겨 주시니,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제 나니와쿄에서 정할 수 있는 일들은 대강 마무리되었고, 나는 군대를 이끌고 직접 간토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조선에서 원군을 보냈다고?”

“예, 쿠보.”

“어서 안으로 들이게.”

장수들의 면면은 익숙했다. 나와 같이 여진족을 상대했던 군관들, 한극함과 그 일당들이 원군을 이끌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공방. 어명을 받들어 공방을 도와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내가 편지만 띄워 놓고 황급하게 돌아오자, 조선에서도 받아들이는 무게가 상당했던 모양새였다.

거기에 한극함이 줄을 갈아타면서, 그 위치가 붕 뜨게 되어 버렸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를 슬쩍 낮춘 뒤, 한극함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조정은 어떻게 굴러가고 있나?”

“폭풍전야입니다. 소장은 공방 덕에 가까스로 몸을 빼냈지만, 다른 이들은 쉽지 않을 겁니다.”

내가 써먹으라고 자료까지 던져 줬으니, 조선 국왕이 알차게 뽑아먹을 태세를 갖춘 듯했다.

이건 뭐 말 그대로 강 건너도 아니고 바다건너 불구경이니, 나중에 사탕이나 빨면서 감상하면 될 거고.

“잘 왔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던 차인데, 아주 적절한 전력이 더해졌군.”

첩보에 의하면, 지금 하시바군에 가담한 야인들은 두만과 압록 일대에 자리잡은 부족들보다도 더 북쪽에서 살았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야인들 중에서도 떨거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일 터였다.

그보다 훨씬 사납고 날랜 자들을 상대로 싸워 왔던 조선군이 왔으니, 상대하기도 훨씬 수월해질 것 같았다.

*       *       *

하시바군이 간토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아직 치요다성은 버티고 있었다.

다이묘가 진작에 도망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형에 힘입어 함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 주인은 달아났는데, 성은 버티고 있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구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의무를 다하시오.

약삭빠르게 도망 나온 호조 우지히데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압박에 밀려 다시 자신의 성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나마 우지히데가 다행이라고 여길 만한 일이 없지는 않았다. 무시무시한 도이족을 때려잡았다는 조선의 기병이 그에게 원군으로 붙었다.

“가, 감사드립니다, 대인.”

“나야 공방을 도와드리러 온 것일 뿐이오.”

나니와쿄를 떠난 뒤, 한극함은 태도가 오만한 쪽으로 바뀐 상태였다.

그간 일본과 꾸준히 교류가 늘었다고는 해도, 아직 조선에서 일본인이란 섬나라 오랑캐라는 인식이 강했다. 게다가 주변의 환경도 그러한 태도를 부추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조선의 주상전하와 동급인 경공방이 아니라 한 지역의 추장을 대하는 것이기도 했고, 우지히데가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를 취했던 것도 태도 변화에 적잖이 기여한 상태였다.

“일본국의 풍류도 조선보다 못하지 않군. 저 이빨만 빼고.”

“우리네 풍습이 그러니 좀 봐주시지요.”

우지히데는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기 위해, 환영연을 크게 열었다. 높으신 분들의 잔치에 유녀가 빠질 수는 없었고, 한극함은 한껏 분위기에 취해 희희낙락했다.

그렇게 꿈같은 이틀이 지나고, 드디어 적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야인 기병들이 센소지(浅草寺 천초사)까지 접근해왔다고 합니다!”

전령이 급보를 전하자, 우지히데는 한극함에게 매달렸다.

“한 공, 부디…….”

“염려 말고 성이나 지키게.”

한극함은 호기롭게 말한 뒤, 안장 위로 훌쩍 올랐다.

그가 이끄는 일천의 조선 기병이 그 뒤를 따라 출격했다.

전령이 말한 대로, 야인 기병들은 노략질을 일삼으며 센소지 인근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그나마 사찰 건물 자체는 멀쩡했지만, 그 주변은 아수라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절 아랫마을이 불탔다. 남자는 죽고, 여자는 끌려가고 있었다. 한극함은 이런 모습을 종종 보았지만, 그게 북변이 아닌 곳에서도 벌어지는 풍경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살다살다 바다를 건너서 야인들을 상대해 보는군.”

“어찌하시겠습니까?”

“뭘 묻는 겐가? 우린 누구냐?”

한극함이 부장의 질문에 답한 다음, 큰 소리로 병사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야인 오랑캐를 때려잡는 북병영의 기갑사(騎甲士)입니다!”

“우리 앞에 뭐가 보이나?”

“야인 오랑캐입니다!”

“그럼 뭘 해야겠나?”

공격!

한극함과 그가 이끄는 조선의 기병들은 함성을 외치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야인들은 한창 약탈에 정신이 팔린 채로 있다가, 날벼락을 얻어맞고 말았다.

“아니, 저건!”

“조선군이다!”

“조선군이 왜 여기에 있어?”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상대를 만난 야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이 일본인들을 당황하게 만든 이상으로, 조선의 기병은 그들을 놀라게 했다.

“거총!”

한극함의 지시에 따라 돌격하던 기병들이 한 손으로 나팔단총을 치켜들었다.

“쏴라!”

그리고 이어지는 호령을 신호로, 일제히 납구슬을 흩뿌렸다.

“컥…….”

“도, 도망쳐!”

“도망치면 다 죽는다! 어서 대열을 만들어라!”

이제 조선과 마주하고 있는 여진족들은 조총에 익숙했지만, 이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팔총에 서툴렀다는 말이 맞을 터였다.

“처, 천둥이 몰아친다!”

“이, 이런 멍청한 것들…….”

순식간에 반 이상이 낙마한 야인들은 겁에 질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패주한 적이야말로 기병이 낚아먹기 좋은 사냥감이 아닐 수 없었다.

“적이 달아난다! 모조리 잡아라!”

“와아아-!”

야인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한창 약탈을 벌이느라 체력이 달려 금세 잡히고 말았다.

“사, 살려 주, 끅…….”

약 오백에 달하던 야인들은 그중에서 백 개의 목을 내놓았고, 다시 백 명이 포로로 잡혔다.

무사히 달아난 것은 약 반절 정도, 이만하면 서전은 대승이라 할 수 있었다.

“역시 왜구들은 약한 자들이군. 고작 이런 것들에게 당했다니.”

한극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전공을 챙겨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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