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악연의 끝(5)
“십만이라고는 해도, 고작해야 백성들이 창칼을 든 것에 불과하오. 북소리 한 번이면 모두 달아날 것이외다.”
아사쿠라 아리시게는 그렇게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 수다를 듣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그래도 저 기세만큼은 아주 흉흉하니, 주의할 필요가 있을 거요.”
“후쿠시마 공은 하시바군에서도 알아주는 용장이라고 들었소만,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혹여 겁이라도 먹은 것인지?”
“입조심하시오.”
기어이 아리시게는 마사노리의 속을 긁었다. 그러나 아주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지, 마지막 선을 넘기 전에 입을 닫았다.
애초에 그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밑에 배속된 것부터가 불만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군인 하시바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의 부족한 공격성을 보충하기 위해,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2군으로 보냈다.
그렇다면 마사노리야말로 선봉이 되어야 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가 나설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아사쿠라군에 내분을 일으킨 것은 그래도 수긍할 만했다. 그만큼 아군의 노고가 줄었으니,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그러나 가주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에게 선봉을 맡기고, 마사노리를 그 부장으로 밀어 넣어버린 일. 이것만큼은 도저히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선봉을 맡은 두 장수가 은연중에 반목하는 동안에도 진군은 계속되었고, 어느새 그들은 일향종 무리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앞장을 설 것이니, 후쿠시마 공은 적의 측면을 강타해주시오.”
“흠, 알겠소.”
원래대로라면 기병의 돌격이 선행하고, 그 뒤를 보병이 받쳐야 할 터였다. 적어도 지금까지 하시바군은 그렇게 싸워왔다.
여진의 군마는 그러한 전술을 감당하기에 적당했다. 그 덩치에서 나오는 충격량은 능히 적의 대열을 박살내버렸기에.
그러나 아리시게는 전공을 세울 욕심에 눈이 멀어 있었고, 마사노리는 상대가 하는 꼴이나 구경하자는 태도로 방관했다.
어차피 아사쿠라 가문의 병력은 덤이나 마찬가지니, 여기서 진탕 소모해도 나쁠 것은 없다.
그렇게 생각한 마사노리는 순순히 상대의 말에 따랐다.
아리시게가 이끄는 아사쿠라군은 북소리를 울리며 호기롭게 적진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그들의 작전계획은 이미 전사한지 오래였다.
“아사쿠라 가문의 깃발이다!”
“결코 물러서지 마라!”
본영에서 열린 군의에서, 이시다 미츠나리는 적이 아사쿠라 가문의 깃발만 보고도 도망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 마사노리가 보기에, 되려 역효과만 있을 뿐이었다.
“폭군이 우리를 짓밟으러 온다! 적에게 자비를 배풀지 마라!”
기병이 측면을 강타하려면, 적의 신경이 온전히 앞쪽에 쏠려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리시게의 부대는 무지렁이를 도륙내기는커녕 그대로 붙잡혀서 쩔쩔매고만 있었다.
“어서 베어버리란 말이다!”
“놈들이 악착같이 달려듭니다. 이대로는 아군이 그대로 파묻히고 말 겁니다!”
아리시게의 부장이 절규한 것처럼, 그들은 적진에 점차 매몰되고 있었다. 밀고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했지만, 빠져나오기는 더더욱 곤란했다.
“죽어라!”
“컥…….”
아사쿠라군의 병사가 하나의 일향종 신도를 베면, 그 뒤에서 다른 신도가 우르르 몰려나와 상대했다.
“형제가 죽었다. 원수를 갚아라!”
처음 한둘을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병사들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가장 앞선 몇몇에게 본보기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우르르 도망가야 했다. 그리고 아리시게와 그 부하들도 그러한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향종 무리의 진형은 단단하기만 했다.
“어서 군을 뒤로 물려야 합니다!”
아직 완전히 포위된 것은 아니었기에, 아리시게 한 몸을 뺄 기회는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역시 비겁했다.
“그래, 뒤는 너희들에게 맡기겠다!”
적의 악착같은 모습에 질린 그는 대오를 정돈하는 대신,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아, 아니……. 주군, 주군!”
가신은 애타게 아리시게를 불렀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우두머리가 달아나는 모습은 사기에 좋은 영향을 미칠 리 없었고, 아사쿠라군은 그대로 콩가루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군대만큼 삼키기 좋은 먹잇감도 드문 법이었다.
“사, 살려주시오…….”
“모조리 죽여버려라!”
전의를 상실한 자들도,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자들도 모두 평등하게 창에 꿰인 꼬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사노리는 그대로 냉정하게 돌아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저들은 독종이다. 섣불리 건드렸다간 우리도 저 꼴이 나겠지. 일단 후퇴한다.”
* * *
“스승님, 우리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서전을 승리로 끝낸 일향종 신도들은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다른 자들도 아니고, 아사쿠라군을 이겼단 말입니다.”
그러나 소에키는 온전히 그들과 같은 감정을 누리지 못했다.
아사쿠라군 삼천을 죽이는 동안, 일향종 신도들은 이천이 죽고 오천이 다쳤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나무아미타불……. 많은 목숨이 죽고 말았구나.”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 해도, 죽은 이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그가 유랑을 나온 이유도, 거인들에게 휘둘리는 백성들을 외면하지 했던 것이 컸다.
그런 만큼, 전장에서 죽은 자들을 당연한 희생이라 치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을 위해서 산 자들이 고통을 겪게 되어서야, 문자 그대로 본말이 전도될 일이었다.
소에키 역시 달아오른 사기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었기에, 거기까지만 말하고 화제를 돌렸다.
“잔치를 열어 형제들을 위로하고, 교대로 푹 쉬게 하거라. 아직 싸움이 끝나려면 멀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스승님.”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 하시바 2군의 본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아리시게의 패배를 확인한 그들은 아주 신중한 태도로 일향종 무리와 대치했다.
털옷을 입은 에미시 전사들이 최대한 얇고 넓게 진형을 펼쳤고, 그 앞에는 얼마 전에 모습을 보였던 기마 무사들이 돌격할 준비를 한 상태였다.
적진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본 소에키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여러 명사들과 교류한 몸이었다. 다회에서는 수많은 주제의 대화가 오갔고, 그중에는 무사들의 관심사가 주로 거론되곤 했다.
좋은 군마 역시 좋은 칼이나 갑옷처럼 자랑거리였고, 어떠한 말이 좋고 나쁜지 정도는 자주 나오는 화제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사람의 키를 훨씬 능가하는 거대한 말들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 사람은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눈앞에 거대한 공포가 다가오면 겁에 질리게 마련입니다.
과연 그 말대로의 모습이었다.
하시바군이 요괴를 부린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쓰는 전마는 요괴를 연상케 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만약 저것들이 가까이 다가온다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해야만 맞설 수 있을 터였다.
“과연…….”
소에키는 이치로의 말을 떠올리며, 그가 방문했던 일을 조용히 곱씹었다.
스모토로 편지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은 때, 이치로가 그를 찾아와서 했던 이야기였다.
지금 고니시 유키나가를 대신하고 있는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그의 승산이 결코 높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마츠나가 공께서는 이 점만 주의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쿠보의 직속 닌자는 그렇게 말하며, 두 가지 계책을 알려주고 갔다.
하나는 잘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잘 지는 방법이었다. 소에키는 그중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형제들이여, 결코 죽기로 싸우지 마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군막에 모인 간부들은 소에키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그게 당연한 반응일 터였다.
원래 전장에 나오면 죽기로 싸우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적은 아주 사나운 일당백의 용사라는 에미시가 대부분인데가, 일부는 요괴를 연상케 할 정도의 거대한 전마를 타고 있소.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필시 전멸하고 말 것이오.”
“우리는 죽음이 아깝지 않습니다.”
매우 완고한 태도였다. 그러나 소에키는 그들에게 역정을 내는 대신, 차근차근 그 이유를 설명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그들은 약간이나마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만 소에키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기만 했다.
얼마 후, 양측의 대치 상태는 깨졌다. 하시바군이 진격을 개시하면서, 일향종 무리도 거기에 맞섰다.
“와아이이이---!”
“모두 창을 들어라!”
백성들은 첫 승리를 떠올리며, 의기양양하게 무기를 내세웠다. 그러나 점차 적이 다가올수록, 그들의 몸은 의지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아, 안 돼……!”
“도망쳐!”
과연 가까이 다가온 기마 무사들의 위용은 사람의 기를 꺾어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우린 노예가 된다! 자리를 지켜라!”
콰직!
누군가가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으나, 이어지는 파열음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몇몇은 그 외침대로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으나, 거대한 덩치에 그대로 치여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생소한 차림새의 에미시 전사들이 일향종 무리를 덮쳤다.
* * *
“크하핫, 진작에 이랬어야 했어!”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미친 듯이 웃으며 적을 찌르고 베었다. 들려오는 꽹과리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살아 움직이는 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하시바군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 죽은 사람은 없었고, 몇몇이 긁힌 수준으로 다친 정도가 피해의 전부였다.
그날 저녁, 이시다 미츠나리는 승전연을 열었다.
“모두들 수고가 많았소. 지금처럼만 하면, 교토 입성도 곧 이루어질 거요.”
이날만큼은 마사노리도 주장에 대한 불만을 접어두었다. 그가 원하던 선봉을 맡았고, 그가 이끌었던 기마 무사단은 승리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게다가 전전긍긍하는 아리시게의 행태는 아주 훌륭한 술안주였다.
연회는 하루로 끝났으나, 하시바군은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야만 했다.
미츠나리는 자신의 실책을 덮기 위해, 승전연을 아주 성대하게 열었고, 술을 양껏 마시도록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주저앉아 있는 동안에도, 일향종 무리는 어떠한 반격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적이 움츠러들었다는 확신이 서자, 하시바군은 더욱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향종? 잇코잇키도 옛 말이지!”
“암, 그렇고 말고. 툭 치기만 하면 우르르 무너지는 놈들이 무슨 싸움이냐고. 크크크”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향종 무리가 겁에 질려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시바군이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을 들으며, 조용히 칼을 갈고 있었다.
진격하는 하시바군 앞에 족히 일만은 되어보이는 일향종 무리가 나타났다.
“전공이 저기 있다, 잡아라!”
오합지졸은 한끼 식사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게 하시바군의 위아래 모두가 품은 생각이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일향종 무리는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
“헉, 헉……. 도망치는 재주 하나는 일품이군.”
계속해서 추격을 시도했지만, 그들은 끝내 꼬리조차 잡지 못했다. 그런 하시바군 앞에 또 다른 군세가 모습을 보였다.
“이번엔 저쪽이다!”
“잡아라!”
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단지 적이 도망쳤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을 의기양양하게 했지만, 정작 두 번째 싸움을 제외하면 얻은 게 전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카가의 늪지대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