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악연의 끝(4)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봉투를 뜯고 종이를 펼쳤다.
카가(加賀 가하)국의 십만 일향종 신도가 목숨을 바쳐 하시바군을 막겠다. 그러니 이쪽의 일은 맡겨두고, 다른 뱡향에 전념하기 바란다.
그러한 내용이 소에키의 명의로 적혀 있었다.
순간 그는 이 편지 자체가 적의 계략이 아닌가하고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이 필적만큼은 분명 소에키가 쓴 것이 확실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 스스로도 다도를 자주 즐겼고, 소에키와의 교류도 남들 못지않게 자주 한 편이었다.
적어도 소에키가 천하를 방랑하는 길에 오르기 전까지는, 종종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글자에 담긴 현기는 흉내낸다고 해서 재현할 수가 없는 것.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히사히데는 계획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여기 소에키 선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나?”
“다도의 대가이고, 쿠보와 친분이 깊었다는 건 압니다만…….”
이 정도가 참석자들이 소에키를 인식하는 최대치였다.
“그런가……. 그렇다면 이치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겠군.”
오랫동안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다닌 직속 닌자라면, 판단의 재료가 될 만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을 터였다.
하시히데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홀연히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에키 선사께서는 지금 카가국에서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신 상태요. 떠나시기 전에도 일향종과 교류가 많은 편이었고, 천하 유랑을 마치신 뒤에는 아예 거기에 눌러앉으셨소.”
“쿠보께서도 알고 계신 일이었나?”
“그렇소이다. 켄뇨를 쓰러뜨릴 적에, 원래 카가국의 잔당도 마저 소탕하려 하신 바가 있소.”
이건 히사히데도 아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쿠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카가국으로의 출병을 단념하고, 일향종 잔당을 방치해왔다.
그 이유가 오늘에서야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카가국의 일향종은 켄뇨와 손을 끊었고, 소에키 선사께서는 그들의 지주 같은 존재가 되신 상태였소.”
“허허, 이런 것쯤은 미리 이야기를 들었어도 좋았을 것인데…….”
쿠보와의 친분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겠지만, 히사히데 역시 나름대로 소에키와 친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에서는 아주 다행스러운 일로 드러났지만, 일체의 교류가 끊겼던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치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쿠보께서는 지금 카가국에 퍼진 사상은 매우 급진적이고, 아주 까다로울 거라 하셨소이다. 그러니 소에키 선사께 맡겨두고, 관찰만 하라고 하셨소.”
만약 옛 잇코잇키(一向一揆 일향일규, 일향종 주도의 민란)처럼 폭주해버린다면, 그때는 처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였다.
“잇코잇키라…….”
그 말을 들은 히사히데는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것도 하필 카가 지역에서 일어났던 잇키와 관련이 있었다.
하시바군을 온전히 소에키와 일향종에게 맡기기에는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히사히데는 전령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봐, 소에키 선사는 군사와 연이 없는 분이셨다.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운을 떼자, 전령으로 온 승려가 발끈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우리 신도가 비록 정예는 아니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어섰습니다.”
“모욕하려는 건 아니니, 일단 들어봐. 하필 카가에서의 일이라 더 찜찜한 거니까.”
히사히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기억하는 옛 일을 풀어놓았다.
“아사쿠라 가문에는 소테키(宗滴)라고 하는 장수가 있었다. 그가 카가국에서 일어난 일향종 무리를 격파했지. 알고 있나?”
“동네 어르신께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워지겠군.”
그때는 쿠보조차도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거나, 혹은 아직 눈도 뜨지 못했을 적의 일이었다.
그러나 히사히데는 그때야말로 미요시 나가요시 밑에서 전성기를 구가했기에,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사방에서 잇코잇키가 일어나고, 그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것은 오미(近江 근강)국 북부에서 카가국에 이르는 잇키.
무려 삼십만이 모인 대군세.
그들은 아사쿠라 가문의 영지, 에치젠을 침공했다. 그걸 막아서는 아사쿠라군의 병력은 고작 일만여 명에 그쳤다.
그러나 아사쿠라군은 그 수십 배의 열세를 뚫고, 잇코잇키를 카가국에 주저앉히는 데에 성공했다.
많은 이들은 소테키를 명장이라 칭송했지만, 히사히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무리 모아봐야,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하다. 소테키의 행적은 그걸 입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하시바군은 도합 삼만여 명의 군세로 오슈를 휩쓸고, 지금 천하를 울리고 있는 판이었다.
“무려 삼십만이 고작 일만에게 깨진 일이었지. 그런데 소에키 선사께서는 이제 고작 십만으로 하시바군을 상대하겠다고 한다.”
내가 그 말을 믿어야겠나. 이 말까지 나오지 않은 것이 편지를 써서 보낸 소에키에 대한 배려일 터였다.
그 생각이 상대에게 닿지 않을 리 없었다. 편지를 가져온 승려는 열을 올리며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그때와는 다릅니다! 당시의 잇키는 혼간지 일족이 이끌고 있었고, 탐욕을 부리다 자멸한 겁니다. 지금은 터전을 지키는 것이니, 우리 모두 죽음을 각오한지 오랩니다.”
“정말 그러한가?”
“믿지 못하여 원병을 보내겠다면, 우리는 고니시군 역시 폭군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소!”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흥미롭다는 듯이 전령을 쳐다보았다.
뜻과 맞지 않는다면, 양면 전쟁이라도 각오하겠다는 의지. 어리석기 짝이 없었지만, 때로는 저런 자들이 세상을 바꾸기도 하지 않던가.
그렇게 생각한 히사히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소에키 선사를 믿어보도록 하지.”
전령이 돌아간 뒤, 다른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우려를 표했다.
“정말로 하시바군의 두 번째 갈래는 방치하실 생각이십니까?”
“꽤나 결의에 찬 눈이 아니던가.”
“그렇게만 보실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네.”
히사히데는 피식 웃었다.
“어쨌든 시간은 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나. 우리에게 필요한 게 바로 그 시간이고 말일세.”
그쪽 방면의 진격을 늦출 수만 있어도, 이쪽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훨씬 넓어진다. 참석자들 역시 군문에서 뼈가 굵은 몸, 세세하게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과연 그렇기도 하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안전장치는 많이 걸어둘수록 좋겠지. 아케치 공. 말을 바꿔서 미안하게 됐소만, 비와호 일대로 가서 조약에 가입한 자들을 규합해주시오.”
따로 고니시군을 파견하지는 않고 아케치 미츠히데의 영지 병력만 대동하라는 말이었다.
설령 소에키 선사와 일향종 신도들이 뚫린다 해도, 저렇게 결의를 보인 자들이라면 힘을 빼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였다.
그거라면 오미국 북부의 무가들을 다독이는 것도 가능했다.
미츠히데가 처음 했던 주장과도 일치했기에, 그는 선선히 히사히데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지요.”
그리고 곧 있으면 그들의 쿠보가 혼다. 게다가 한두 달만 버티면, 모리와 미요시의 원군도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병력을 이끌고, 히데요시를 막겠소이다.”
* * *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끄는 하시바 2군은 손쉽게 엣추 땅을 함락시켰다.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한 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며, 본거지에서 나와서 하시바군을 요격하려 했다. 그러나 역시 의기만 앞설 뿐이었다.
아사쿠라 가문은 오래된 만큼, 그 일족의 숫자도 상당했다.
이제는 허울만 남았다고는 해도, 가주의 지위는 여전히 탐나는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숫자만 보면 양측은 거의 대등했으나, 아사쿠라군은 탄탄하지 못했다.
반 이상은 방계들이 이끌고 온 병력이었고, 그 방계들이 돌아서면서 요시카게도 허망하게 붙잡혀버렸다.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사에몬노카미(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관위). 이제 주군께 귀순하시지요.”
“그럴 수는 없다. 나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나니와 조약에 가입한 자들은 가족을 황도로 보내야 한다고요?”
이미 서로가 아는 사실, 굳이 입에 올려가며 줄다리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끌고 가라!”
요시카게는 곧바로 참수되었고, 배신으로 공을 세운 아사쿠라 일족인 아리시게라는 자가 에치젠의 관리자로 세워졌다.
그것도 미츠나리의 군세가 거기까지 갔을 때의 이야기지만, 요시카게를 이긴 그들의 마음은 이미 교토에 가 있었다.
“기회를 주신 하시바 공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고, 그냥 후방을 충실하게만 지켜주십시오.”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도 배신할 수 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죽었지만, 그 가족들은 아직 나니와쿄에 살아있을 터였다.
만약 하시바군이 패배한다면, 이 잔챙이의 명운도 거기까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장본인도 모르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이시다 공. 결코 공의 뒤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은 없게 하지요.”
그러나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그들의 앞에도 거대한 장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십만의 군세는 숨기려고 해도 숨기기 어려운 법. 엣추를 넘어서 카가에 들어선 하시바 2군은 소에키가 이끄는 일향종 무리를 발견했다.
“흠, 십만, 십만이라……?”
물경 십만이라는 숫자는 자못 사람을 압박하는 데가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온 마에다 토시이에는 껄껄 웃기만 할 뿐, 달리 우려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결국 오합지졸일 뿐일세. 북소리만 들어도 놀라 달아날 자들이지.”
“그렇다고는 해도, 숫자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지위만 놓고 보면, 마에다 토시이에가 이시다 미츠나리보다 위였다. 그러나 2군의 주장은 미츠나리였고, 토시이에는 그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었다.
그가 예전처럼 폭압적인 인물이었다면 진작에 지휘권부터 뺏고 봤겠지만, 지금의 토시이에는 정중하게 선봉의 자리를 요구했다.
“허허, 걱정하지 말래도. 정 찜찜하다면, 내가 창끝이 되도록 하겠네.”
앞을 막고 있는 적이 십만이라고는 해도, 이쪽의 전력은 명백히 그 이상이 될 터였다.
토시이에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일당백의 전사라는 에미시 일만, 그리고 여진의 명마를 탄 일천의 무사들. 이만한 군세라면 오합지졸의 무리는 얼마든지 깨부술 자신이 있었다.
“저들을 제물로 삼아 기세를 올리고, 오미국 북부의 무사들을 회유해보세.”
미츠나리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지만, 그가 판단하기에도 토시이에의 말이 옳았다.
“좋습니다. 하지만 마에다 공께서는 중심을 지켜주셔야 하니, 선봉으로 나서는 일은 참아주십시오.”
“하하, 알겠네. 그러도록 하지.”
미츠나리가 생각하기에, 저들을 상대할 만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아사쿠라 공. 공의 가문이 일향종을 격파한 일이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문중의 어르신이셨던 소테키 님께서 삼십만 역도들을 박살내버리셧지요.”
“공이 한 번 그걸 재현해보는 건 어떻겠소?”
마침 아사쿠라 아리시게도 자신의 입지를 굳힐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시카게를 잡아다 바친 것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다. 여기에 전공 하나를 더 세운다면, 그의 발언력도 높아질 터였다.
“선봉을 맡겨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미츠나리는 그에게 일천의 기마 무사를 빌려주었다.
거기에 원래 아리시게가 이끌고 있던 가문의 병력 삼천까지 더하면, 승산은 충분했다.
“후쿠시마 공, 공이 기마 무사단을 이끌고 아사쿠라 공을 도와주시오.”
“… 알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