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악연의 끝(2)
“확실히…… 여긴 살기가 좋구만.”
야인 족장은 만족스러운 듯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우리 주군께서 고니시 유키나가, 그자를 쓰러트리면 이곳을 귀공께 내리실 겁니다.”
“지금 당장 부족을 이주시키고 싶은데.”
지금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합류한 이시다 미츠나리가 그에게 달래듯 말했다.
“나니 공, 아직은 곤란합니다. 아직 일이 성사되지도 않았는데, 잿밥부터 탐하시렵니까?”
원래 그의 이름은 따로 있었으나, 길고 복잡한데다 일본인이 제대로 말하기 어려운 발음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나니’라고 불렀기에, 히데요시와 그 부하들은 그냥 그대로 통칭했다.
애초에 그들은 일본인이 그 습속을 이해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 무력만큼은 진짜였기에, 이시다 미츠나리는 그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도 하군.”
야인 족장은 미츠나리의 말에 동의한 뒤, 껄껄 웃었다. 그나마 이들과 대화가 통할만한 주제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다소 교리 상의 차이는 있었어도 야인들 역시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에, 그나마 최소한의 접점은 존재하는 셈이었다.
‘도토야 공은 어찌 되었을지……. 부디 살아만 있으면 좋겠는데.’
이시다 미츠나리도 나름 유연한 사고방식의 인물이었지만, 지금처럼 아주 이질적인 도이(刀伊)를 상대하는 것은 까다롭기만 했다.
만약 이들의 합류를 주선했던 도토야 조세이가 있었다면, 이들을 다루기는 훨씬 더 쉬웠을 터였다.
그러나 도토야 조세이의 연락은 끊기고 말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직접 왔으니, 주군의 뜻을 이룰 좋은 기회라는 말만 남기고.
항복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으니, 소식이 닿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터였다.
생각을 정리한 미츠나리는 고개를 휘휘 흔들어 잡념을 털어내고, 군막으로 돌아갔다.
* * *
도토야 조세이가 남긴 말의 의미는 금세 그 실체를 드러냈다.
찜찜함을 마음 한 구석에 밀어 넣고 온성부로 돌아오니, 전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쿠보, 급보입니다!”
그가 내민 것은 마츠나가 히사히데 명의의 서찰. 담긴 내용은 설마 했던 그대로였다.
에조치에 숨어 있었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바다를 건너, 야마토를 침공했다.
오슈는 순식간에 넘어가 버렸고, 몇몇 다이묘들이 험지와 요해처에 의지해 버티는 게 전부인 상황이라고도 적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니와 조약이 그 효력을 발휘해, 등을 돌린 자가 없었다는 것 정도였다.
“알겠다. 오늘 중으로 출발해야겠군.”
숨 돌릴 겨를은 없었다. 그나마 여기서 수운을 이용하기가 나쁘지 않다는 게 다행일 터였다.
나는 이번에 따라왔던 조선의 장수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본국에 급한 일이 있어, 먼저 돌아가야 할 듯하네. 여기, 내가 전하께 보내는 서찰일세. 경원부사가 전달하는 게 좋겠군.”
그렇게 말하며, 누가 어떤 전공을 세웠는지를 기록한 두루마리를 한극함에게 넘겼다. 그들은 모든 사정을 알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관절 무슨 일이기에…….”
“아무래도 여기서 잡은 자는 미끼였던 모양이야.”
아직 한극함과 아이들을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웠지만, 어차피 같은 내용을 적어서 쾌속선편으로도 보낼 생각이었다.
내 말을 잘 듣는다면 나중에 떡이라도 하나 더 챙겨줄 거고, 그게 아니라도 상관은 없을 터였다.
지금의 상관에게 의리를 지킨답시고 또 뒤통수를 노린다면, 그때는 운명까지 같이 하게 될 테니까.
“참군에게는 미안하게 됐군. 본국으로 가기 전에 약간의 시간을 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이 또한 나라의 일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조선군과의 용무가 끝난 뒤, 곧바로 누르하치에게도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시다면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자네 부족의 일은 걱정하지 말게. 조선의 국왕에게도 편지를 써두었으니, 자네가 울라부를 접수하는 일도 묵인할 걸세.”
내가 자신의 속내를 정확하게 찔렀는지, 누르하치는 살짝 자신의 뺨을 붉혔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만, 아쉬워서 그럽니다.”
“오늘만 날이겠나. 본국의 사태가 정리되면 또 볼 기회가 있을 것이네.”
그렇게 말한 뒤, 나는 나지막하게 말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가 해준 배려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닐세.”
내가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하자, 비로소 누르하치는 안심하는 기색을 내보였다.
“그렇다면 이 아우는 형님의 약속만 믿고 있겠습니다.”
이렇게 조선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서둘러 녹둔도로 출발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철포수들을 싣고 온 배를 타고, 스모토로 방향을 잡았다.
“쿠보, 이제는 말씀을 해주셔도 될 듯합니다만…….”
무릉과 우산 사이를 지날 무렵, 이순신이 나를 찾아와 묵은 질문을 던졌다.
그도 이제는 일본말에 많이 능숙해 진 상태였다.
일전에 그는 내가 조선까지 건너온 진짜 이유를 물어 보았고, 나는 모든 게 끝난 뒤에 말해 주겠다고 했던 바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긴 했다.
“쿠보께서는 승전연의 끝을 보지 않고 나가셨지요. 그리고 그날 밤, 노이합적의 군영에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정작 포로 중에 일본인으로 보이는 자는 없었다. 이순신은 그렇게 덧붙였다.
“자네의 생각이 옳네. 조용히 처리할 필요가 있었지.”
“지금도 그렇습니까?”
“글쎄……. 딱히 그렇지는 않군. 이제는 트집을 잡아 봐야, 그자도 죽어 버렸으니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한 뒤, 그 역도가 내 친형이라는 것을 밝혔다.
“만약 그 사실이 미리 알려졌다면, 조정에서도 나를 그리 곱게 보지는 않았겠지. 어떤 이들은 내가 조선을 겨냥한 술수를 부렸다고 했을 것일세.”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이순신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본 그로서는, 달리 의심할 구석을 찾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소식으로만 사태를 접할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러나 이는 권도가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일세.”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그도 생각할 게 많은 눈치였고, 나는 더 이상 뭔가를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이순신을 존경하는 이유의 핵심은, 그 올곧음이 아니었던가. 굳이 그걸 꺾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묵은 질문에 답을 하고, 선실로 돌아와 다시 히사히데의 편지를 펼쳤다.
“호조 우지히데와 다테 마사미치는 도망 나왔고, 아사나 모리오키는 포위당한 상태라고…….”
간토 서부가 통째로 넘어가 버렸고, 호쿠리쿠도 반이 넘어갔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빠른 진격 속도였기에, 나는 그 내용을 재차 정독했다. 그러나 그 뒤에 사실을 뒷받침하는 진술도 나왔다.
‘도망쳐온 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하시바군에는 명마가 널렸다고 하오. 그리고 도이(刀伊)를 보았다는 자들도 있었소. 저들을 상대했다가 겨우 살아난 병사들은 인마합일의 요괴라고까지 하니, 그 수준이 상당한 듯싶소이다.’
이게 편지를 썼을 때의 상황이었으니, 지금쯤이면 세키가하라나 그 너머까지 왔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터였다.
조세이는 정말로 미끼였던 것일까. 그래도 이상할 건 없지만.
그가 울라부에 있다는 걸 확인한 시점에서,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츠가루에 보낸 초계 함대의 숫자를 줄이자고 제안한 바 있었다.
하시바 히데요시의 행방은 묘연하고, 그 부하가 울라부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니 히데요시 역시 에조치를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
히사히데의 근거는 그러했다. 그리고 스모토에 남아 있었을 다른 이들 역시, 거기에 동의했을 터였다.
나 역시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나마 지금 다시 해협 봉쇄를 강화했으니, 증원이 생기지는 않으리라는 게 유일하게 희망적인 관측이었다.
“규모도 생각보다 크진 않고…….”
에미시가 약 삼만, 그리고 새로 전향해서 저쪽에 가담한 무사들이 오천, 그리고 야인 기병은 약 이천 정도 된다고 했다.
이 정도의 적은 불의의 습격이 무서울 뿐, 아주 위협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적의 단점은 명백하다. 굳게 뭉치기가 어렵다는 점이지. 그러니 그 기세를 어떻게든 꺾어 놓기만 하면, 다음은 쉽다.”
다만 그 과정이 지난하고 상당한 피해를 유발할 터였다. 그게 유일한 근심이었다.
* * *
카가 국 이시카와 군(郡), 하시바 히데요시의 침공이 임박한 상황, 민심도 점차 술렁이고 있었다.
이 지역은 일향종 교단의 손에 들어간 이래, ‘백성이 다스리는 땅’으로 유명했다.
원래 주인이었던 토가시 일족은 쫓겨나고 방계가 허수아비로 세워진 상황, 실질적인 통치는 교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승려가 흘러 들어오면서, 이 지역의 분위기는 점차 별명에 걸맞게 변해갔다.
일향종 교단 중심의 신정일치 사회는 점차 하급 무사와 부농들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향종의 총본산인 혼간지가 몰락하면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켄뇨의 일족도 완전히 힘을 잃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켄뇨의 일족과 연을 끊었다고는 해도, 그들은 악명 높은 일향종. 혼간지의 몰락은 주민들을 긴장케 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따로 손을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앞으로의 흐름을 관찰하기 위해 내버려둔 것에 가까웠지만.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 일본에 새로운 현상을 일구어 냈다.
수많은 일향종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늙은 승려 하나가 그들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옛 무사의 군세가 이 땅에서 자신들의 법을 강요하려 한다! 이방인 용병의 무리가 형제들을 짓밟으려 한다!”
“다시 소출의 팔 할, 그 이상을 빼앗기는 시절로 돌아갈 것인가? 비루한 폭군이 우리의 운명을 정하게 둘 것이냔 말이다!”
그 질문에 신도들은 창을 들며 화답했다.
“아니외다! 우리는 결코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일어나라, 카가의 백성들이여! 우리의 뜻을 천하에 보일 영광스러운 날이 왔도다.”
일향종 신도들의 함성과 열기가 천지를 진동했다. 일장 연설을 마친 노승은 그 모습을 보며,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스승님, 덕분에 신도들의 사기가 올랐습니다.”
“나는 일개 승려일 뿐이고, 누굴 제자로 가르칠 인물이 못 되네. 어찌하여 계속 나를 부끄럽게 하는가?”
“저희의 눈을 틔워주셨으니, 소에키 선사님께서는 모든 신도들의 스승님이십니다.”
노승은 자신이 받는 대우가 불편한 듯했지만,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존숭하는 태도를 취했다.
소에키는 설득을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닐세. 이건 누구라도 알 일이야. 나는 단지 그걸 되새기게 했을 뿐이네.”
소에키는 그렇게 말하며, 옛 일을 회상했다. 저들의 말대로라면, 지금 카가 국 일향종의 진정한 스승은 그 자신이 아니라 고니시 유키나가일 터였다.
그러나 아직은 세상이 그걸 용납하지 않을 터, 그는 진실을 숨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왔다.
그의 사형은 끝내 세월에 빛이 바래져 갔지만, 소에키 본인은 백성들과 함께하기를 택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시작한 소년. 아니, 이제는 장년이 되었을 그는 카가 국을 짓밟지 않는 것으로, 은연중에 자신의 뜻을 내비쳤다.
이제는 그가 무엇을 심었고,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보일 차례였다.